김그림(b. 1993)은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비인간의 삶의 방식을 통해 인간을 돌아보는 관점을 연구해 왔다. 이를 위해, 작가는 인간, 식물, 광물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 없이 서로 의지하고 공존하는 장소로서의 ‘생명권(biosphere)’에 대한 관심을 토대로, 생명이 존재하는 장소에 직접 가서 느낀 체험과 생각을 회화적인 분석을 통해 화면에 담는 작업을 하고 있다.  


김그림, 〈바위 위에 앉은 호수와 돌〉, 2018, 캔버스에 유채, 130.3x130.3cm ©김그림

김그림의 작업은 숲과 같은 다양한 생명이 존재하는 장소에 직접 찾아가 관찰하는 일에서 출발한다. 이후 작가는 관찰의 시간과 체험을 통해 얻은 생각들을 회화의 언어로 풀어내어 그림의 형태로 제시한다.
 
작품 속 풍경은 촉각적이고 스며드는 화면을 통해 인간, 동물, 식물, 광물 등이 서로 친밀하게 조우하는 것을 보여준다. 화면 속 촉각적인 생물의 형상은 인간의 모습과 삶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기도 하며, 이들이 모여 새로운 생태계를 이루는 모습이 그려진다. 


《RHYTHMOSCAPE 생동하는 풍경》 전시 전경(예술공간 서:로, 2022) ©김그림

2022년 예술공간 서:로에서 열린 김그림의 첫 번째 개인전 《RHYTHMOSCAPE 생동하는 풍경》에서 작가는 남미 답사 동안 작가 자신의 몸이 직접적으로 체험했던 감각을 표현하였다.
 
고도와 공기 밀도가 급격하게 바뀌는 지역들을 가로지르며, 작가는 환경에 따라 몸이 매우 다르게 반응하고 감각한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리고 이때 풍경은 긴장하고 이완하는 몸에 스며들면서 새겨졌다.
 
이렇듯 풍경과 몸, 보이는 것과 느껴지는 것이 식별 불가능해지는 순간 속에서 작가는, 극단적으로 달라지는 환경의 조건 안에서 자연에 내밀히 담겨 있는 물질과 그 성질을 탐구했다.

김그림, 〈생동하는 풍경〉, 2021-2022, 캔버스에 유채, 가변설치 ©김그림

이렇게 포착된 물질들은 신체적 감각에 와닿는 재료가 되고, 그것들은 공감각적으로 기억 속에 남게 된다. 몸의 호흡에 따라 전개된 김그림의 풍경 안에는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들의 차이가 지워지고 공존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김그림, 〈생명의 가장자리〉, 2023, 캔버스에 유채, 72.7x72.7cm ©김그림

이렇듯 자연에서의 공존과 순환은 김그림의 그림 속에서 자연에 대한 신체 경험을 거쳐 새로운 풍경으로 확장되거나 은유된다. 그렇기에 그림에는 단순히 풍경 자체뿐 아니라 그로부터 비롯되는 몸의 감각과 그 사이로 밀려들어온 모든 감정이 어우러진다.


《푸른 어둠 속 둥지 짓기》 전시 전경(수애뇨339, 2025) ©수애뇨339

김그림의 두 번째 개인전 《푸른 어둠 속 둥지 짓기》(수애뇨339, 2025)는 숲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하던 중 목격한 둥지를 짓는 새의 모습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어둡고 깊은 숲속에서 둥지를 짓고 있는 푸른 새틴 바우어새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날갯짓하는 모습들을 크고 작은 화폭에 담았다.


김그림, 〈Peeking into the Nest〉, 2025, 캔버스에 유채, 53x45.5m ©김그림

부지런히 재료를 운반해 주변 환경과 조화롭게 둥지를 짓는 바우어새의 모습에서 작가는 그 성실함과 치열함이 인간과 닮아 있음을 깨달았다.
 
특히, 청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매일 독립된 거주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을 떠올렸다. 생명의 순리이기도 한 바우어새의 둥지 짓기는 인간의 세상에서도 동일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김그림, 〈푸른 어둠 속 둥지 짓기〉, 2024-2025, 캔버스에 유채, 193.9x390.9m ©김그림

작품의 푸른 어둠 속 숲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 죽은 나무, 뼛조각, 그리고 새로운 생명이 피어난 잎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탄생, 성장, 공생, 경쟁, 죽음이 함께 존재함을 의미한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여 둥지를 짓고 생명을 이어가는 바우어새의 모습은, 어둠 속에서도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비추어 보게 한다.


《산이 사는 곳》 전시 전경(챔버, 2025) ©김그림

이와 더불어, 김그림은 고군분투하는 생명체들을 감싸고 있는 털결에 주목해 왔다. 가령 고산지대 식물의 표면을 덮은 털은 그의 회화에서 무수한 결로 겹겹이 쌓인 둥지가 되어 나타나기도 하였다.
 
촉지적이고 섬세한 모질로 뒤덮인 둥지를 묘사함으로써 관객을 회화 너머의 시각적 환상 속으로 이끄는 동시에, 둥지를 생의 시간과 행위가 층층이 쌓인 거처로서 바라보며 생명의 순리에 대해 떠올리게 한다.


《산이 사는 곳》 전시 전경(챔버, 2025) ©김그림

나아가 2025년 챔버에서 열린 2인전 《산이 사는 곳》에서 작가는 그러한 둥지를 삶을 감싸 안고 보호하는 외피이자 삶이 주는 긴장감을 해소할 수 있는 내면의 빛을 품은 곳으로 해석의 가능성을 확장하였다.
 
무성한 선으로 구성된 둥지는 나무 기둥, 이를 관통하는 가지, 뾰족한 돌과 중첩되어 화면을 이룬다. 이 안에서 형성된 털결과 붓질은 겹치고 읽히며 점차 두터워 짐으로써 둥지를 보호하는 층을 만들어 낸다.


김그림, 〈산이 사는 곳〉, 2025, 캔버스에 유채, 165x150m ©김그림

〈산이 사는 곳〉(2025)의 도톰한 보랏빛 털결이 둘러싼 화면 중심에 자리한 맑고 찬란한 푸른 빛의 호수는 작가가 자연과의 관계 안에서 맞이한 새로운 하산의 감각을 표상하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생명체들이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안식처로서의 공간으로 나타난다.


《BENEATH BRANCHES》 전시 전경(WWNN, 2025) ©WWNN

그리고 2025년 WWNN에서 열린 개인전 《BENEATH BRANCHES》에서 김그림은 어두운 숲 속을 거니는 행위의 과정에서 감각한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던 생명의 근원, 모든 생명체의 미분화된 상태를 환기시키는 수수께끼의 푸른 빛이 서린 추상적 양감 등을 화면에 담아냈다.
 
그 안에는 숲의 풍경 속에 매복해 있는 유연한 선들, 그것이 매개하는 감각의 균열, 탈중심화 된 주체에 대한 자각, 현실의 가장자리를 서성이는 몸의 리듬, 그러한 존재들의 대립 혹은 연결로 구축된 비선형적인 세계가 에워싸고 있었다.


《BENEATH BRANCHES》 전시 전경(WWNN, 2025) ©WWNN

그간 고산지대와 같은 대자연에서 마주한 둥지의 모습을 담아내 왔다면, 이 전시에서 김그림은 매일 뒷산을 산책하다가 발견한 둥지를 소재로 삼는다. 낯선 타지의 풍경에서 접했던 미지의 풍경을 그려오던 그가 동네 뒷산 풍경을 관찰하기 시작한 직접적인 계기는 할머니가 사시던 통영의 자연을 어떤 특정한 계절에 아주 가까이서 바라보게 되었던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BENEATH BRANCHES》 전시 전경(WWNN, 2025) ©WWNN

할머니의 죽음을 둘러싼 시공간의 체험과 그것이 촉발시킨 정서와 감각이 풍경을 그린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재고하게 함으로써, 그의 작업 세계에 어떠한 변화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생기 없는 통영의 숲에서 죽음과도 같은 깊은 흑 빛 어둠을 목격했고, 그 속에 깃든 재생의 감각을 알아차렸다. 숲의 어둠 속 모든 생명체가 뒤엉켜 있는 상태를 목격하며, 작가는 세계를 다시 인식하게 되는 감각과 사유를 ‘그리기’라는 반복적인 행위로 옮겼다.


《BENEATH BRANCHES》 전시 전경(WWNN, 2025) ©WWNN

그 과정에서 화면은 거시적인 것(숲)과 미시적인 것(둥지), 살아있는 것(새)과 죽어있는 것(나뭇가지), 어둠(갈색)과 빛(파란색)의 극단적인 대비를 가로지른다. 그리고 이 둘의 비현실적인 공존으로, 김그림은 주체와 대상 사이의 이분법적 역할이 지워진 채 긴밀하게 얽혀 있는 비선형적인 관계의 모습을 그려낸다.
 
안소연 미술비평가는 전시 서문에서 김그림이 그린 숲이 육체, 특히 모체에 관한 기억을 동반한다고 말한다. 그의 숲은 “삶과 죽음을 포괄하는, 내부와 외부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는, 어둠과 빛을 동시에 지닌, 시각과 촉각의 범주를 뭉뚱그려 놓는, 원초적인 고립의 장소로서 모체”를 상기시킨다는 것이다.


《BENEATH BRANCHES》 전시 전경(WWNN, 2025) ©WWNN

이처럼 김그림은 대상을 본다는 것을 넘어, 그것을 시각적이고 촉각적으로 감각하며 경험한 복합적인 감정과 감각, 사유 등을 ‘그리기’라는 행위로 병합시킨다. 구상적인 풍경과 추상적인 몸의 감각을 혼합한 작품 속 풍경은 촉각적이고 스며드는 화면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인 관계를 강조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서 동물, 식물, 광물이라는 존재 사이의 조우를 미시적으로 그리면서 나타나는 본인이 체현한 감각은, 그림의 대상들을 구별 짓기보다는 대상과 같은 상황, 정동에 이끌리는 것들로 전환된다. 생동하는 생명체의 형태가 화면을 떠다니며 만드는 이미지의 운율은 캔버스 위로 흩어지고, 보는 이들을 또 다른 가상의 생태계의 화면으로 이끈다.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비인간의 삶의 방식을 통해 인간을 돌아보는 관점을 연구해 왔다.”    (김그림, 2025 ARKO DAY 인터뷰 중) 


김그림 작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김그림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쳤다. 개인전으로는 《BENEATH BRANCHES》(WWNN, 서울, 2025), 《푸른 어둠 속 둥지 짓기》(수애뇨339, 서울, 2025), 《RHYTHMOSCAPE 생동하는 풍경》(예술공간 서:로, 서울, 2022)가 있다.
 
또한 작가는 《산이 사는 곳》(챔버, 서울, 2025), 《플랜-t: 둥지 엿보기》(스페이스 미라주, 서울, 2024), 《숨쉬는 선》(보다 갤러리, 서울, 2024), 《보이는 그리고 보이지 않는》(갤러리 플레이리스트, 부산, 2023), 《사적이고, 시적인 것》(갤러리 인, 서울, 2022), 《Dispersed Echo 흩어진 울림》(공간 파도, 서울, 2022), 《식별 불가능성에 대하여》(도잉아트, 서울, 2018)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