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원(b. 1993)은 작가 자신이 일상에서 자주 마주하는 것들을 사진으로 기록하며, 이를 도안으로 삼아 회화로 담아내는 작업을 이어왔다. 예를 들어, 도서관 서가, 늘 타는 버스, 차창 바깥의 풍경 등이 그 대상이 된다.
 
작가는 마치 수공예 작업처럼 여러 겹의 물감을 덧칠하며 사진 속 일상적 풍경의 표면으로부터 드러나지 않았던 세상의 세세한 겹을 형형색색 드러낸다.


김혜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은 은행나무〉, 2020, 캔버스에 수채, 과슈, 아크릴 미디엄, 130.3x89.4cm ©김혜원

김혜원은 이렇게 늘 보고, 찍는 일상적 풍경을 재료로 택하고, 고른 사진을 곰곰이 쳐다보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실제로 보는 풍경과 달리 사물의 정면을 향해서만 시점이 고정된 사진 이미지에 대해 작가는 “지상 위의 세계를 뒷면이 평평한 부조처럼 만들어버리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김혜원, 〈마포중앙도서관〉, 2021, 캔버스에 수채, 과슈, 아크릴 미디엄, 193.9x97cm ©김혜원

이렇듯 사진 속에서 3차원의 현실 공간은 2차원의 종이 표면 위로 평평하게 고정되기 마련이지만, 그가 회화로 옮기기 위해 택하는 일상의 이미지들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 가 본 것 같은 공간들을 담고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가장 전면에 있는 물체로 가려진 배경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김혜원은 카메라가 포착하지 못한 세상의 세세한 겹을 기억에서 끄집어내며, 그 각각의 겹을 머릿속에서 도안으로 재구성한다.

김혜원, 〈당산철교를 건너는 2호선 열차의 내부〉, 2022, 캔버스에 수채, 과슈, 아크릴 미디엄, 194x194cm ©김혜원

그림의 대상을 선택하고 도안을 구상한 다음 비로소 그리기가 시작된다. 사진을 그림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작가는 드라마틱한 붓질이나 개인의 감정 표현을 최소화한 채로, 오로지 반복적인 붓질의 움직임에 몰두한다.
 
가령, 작가 노트에서 그는 “물감을 짜서 계산된 색을 섞어 만들고, 적절한 모양과 크기의 붓을 선택하여 물감을 화면에 바르는 행위는, 어느 순간 특정한 대상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을 잊어버리게 만든다”고 말한다.

김혜원, 〈당산철교를 건너는 2호선 열차의 내부〉 (세부 이미지), 2022, 캔버스에 수채, 과슈, 아크릴 미디엄, 194x194cm ©김혜원

그리고 작가는 이렇게 기계적으로 겹을 만들어가는 행위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대상을 그린다는 생각이 0에 수렴하게 되고, 그러한 창작과는 무관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오직 손의 움직임만이 시각을 자극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김혜원의 작업은 예술가의 주관이 개입되는 ‘작가적인’ 태도에서 비롯되기보다는 수행적인 노동을 통한 그리기의 움직임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김혜원, 〈사진촬영금지〉, 2022, 캔버스에 수채, 과슈, 아크릴 미디엄, 45.5x45.5cm ©김혜원

김혜원은 수채화로 이미지의 바탕을 잡고 과슈와 아라비아 고무액을 섞어 표면에 얹히는 그만의 회화적(혹은 공예적) 형상과 층위를 만들어 나간다. 손목과 손가락 뼈 마디마디의 반복된 움직임으로 완성된 그의 그림은, ‘작가성’을 담보하는 무언가라기보다 하나의 수공예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김혜원, 〈처음 타 보는 버스의 내부〉, 2023, 캔버스에 수채, 과슈, 아크릴 미디엄, 145.5x97cm ©김혜원

물감층을 겹겹이 쌓는 과정에서 그림 속 이미지는 아주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서서히 덮이게 된다. 그렇게 표면에 남게 된 여러 겹의 물감층에는 갖은 색채와 섬세한 질감들이 자리하게 된다.
 
이에 대해 황재민 미술비평가는 물리적으로 물감층이 쌓이면서 이미지를 가릴수록 “일상을 바라보던 기존의 감각이 벗겨지고 새로운 풍경이 드러나는 역설적 운동이 회화 위에 있다”고 평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의 노동 집약적인 작업을 거쳐 캔버스 표면 위에 안착한 물감의 질감과 여러 개의 색점은 사진으로 다 담기지 못한 찰나의 인상과 분위기를 담아내며, 단순한 ‘재현’으로 설명할 수 없는 회화적 층위를 만들어 낸다.


《Thickness of Pictures》 전시 전경(Hall1, 2022) ©김혜원

2022년 김혜원의 첫 번째 개인전 《Thickness of Pictures》은 이러한 작가의 그리기에 대한 방법론을 소개하면서 이미지가 내포한 ‘장소의 이동’에 대해 다루었다. 작가는 지하철과 버스 등 대중교통을 타고 여러 장소를 오가며 일상의 풍경을 수집하고, 그러한 사진 이미지를 도안으로 삼아 회화로 옮겼다.


《Thickness of Pictures》 전시 전경(Hall1, 2022) ©김혜원

작가가 수집한 풍경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장소들이지만 그의 그림 속에서는 사람들의 모습이 삭제된 채 장소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었던 각종 구조물들만이 남게 된다. 이는 곧 다양한 성격의 일상적 풍경이 지닌 조형성과 색채감이 부각되면서 원근감이 강조되며, 평소 느끼지 못했던 강한 공간감이 드러나게 된다.
 
아울러, 그의 그림 속에 그려진 지하철 역의 공중 전화기와 자판기, 시내버스의 내부 등 평범하고 희미한 장면들은 디지털 사진의 픽셀이나 해상도와는 다른 회화의 표면과 물질을 갖게 된다.


김혜원, 〈명동 신세계 백화점 외벽〉, 2022, 캔버스에 수채, 과슈, 아크릴 미디엄, 260.6x130.3cm ©김혜원

예를 들어, 〈명동 신세계 백화점 외벽〉(2022)은 스마트폰의 작은 스크린 속 이미지를 캔버스 크기로 확장했을 때 픽셀이 깨짐으로써 누락된 디테일들을 물감과 붓질로 채우는 과정을 거치며 제작되었다. 이미지가 포착하지 못한, 즉 픽셀보다 더 미시적인 세계의 공간에는 색과 물성, 시점과 거리, 손과 신체의 움직임과 같은 회화의 과정과 경험이 채워지게 된다.


《해 시계》 전시 전경(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023) ©김혜원

한편, 김혜원은 2023년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열린 개인전 《해 시계》에서는 ‘시간성의 이동’을 표현하는 이미지를 선보였다. 이 전시에서 그가 설정한 ‘시간’의 개념은, 빛의 움직임에 따른 풍경의 변화를 포착하면서 해의 길이와 계절이 품고 있는 자전과 공전에 따른 하루와 계절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는 작가가 구현해 온 공간감의 구성으로부터 시각에 보다 영향을 주는 태양 빛의 존재를 다양한 색 표현이 가능한 소재로 끌어오는 방법이기도 하다.


김혜원, 〈홍대입구역 1번 출구 에스컬레이터〉, 2023, 캔버스에 수채, 과슈, 아크릴 미디엄, 130.3x189.4cm ©김혜원

이에 따라서, 김혜원은 특정 시간대를 암시하는 사진을 골라 작업의 토대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주로 실외 풍경 사진이 주를 이루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시간에 관한 힌트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진들이 채택되었다.
 
작업 과정에서, 아라비아 고무라는 미디엄을 활용한 물감을 화면 위에 굳히며 만들어진 불균질한 표면 요철은 독특한 미티에르 효과를 낳는다. 작가는 그 위로 물감을 반복하여 얇게 쌓으며 섬세한 사실적 표현과 밀도감, 색감의 깊이 등을 구사하며 이미지가 내포하고 있는 ‘시간성’을 강조하는 결과물을 보여주었다.


김혜원, 〈숲속〉, 2025, 캔버스에 아크릴릭 물감, 수성 유화 물감, 오일 스틱, 260×144cm ©김혜원

그리고 최근 피코에서 진행된 그의 세 번째 개인전 《픽처레스크 투어》는 그가 도심 속 메타세쿼이아 숲에 방문해 하늘 높이 치솟은 나무를 파노라마 시점으로 촬영했던 경험에서 출발한다.
 
이후 그는 가로로 넓게 펼쳐진 창 너머로 숲의 외관을 관찰할 수 있는 작업실을 사용하게 되었고, 17세기 풍경화가 클로드 로랭의 ‘블랙 미러’를 떠올리며 아이패드의 검은 액정에 반사된 창밖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픽처레스크 투어》 전시 전경(피코, 2025) ©피코

전시의 제목인 ‘픽처레스크(Picturesque)’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의미한다. 17-18세기 풍경화가들은 자연을 직접 관찰하며 우리의 눈을 매혹하는 ‘픽처레스크’한 풍경을 그림에 담아 왔으며,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는 도시를 떠나 지방의 자연과 풍광을 좇는 ‘픽처레스크 투어’가 유행했다.
 
이때 사용된 ‘블랙 미러’ 또는 ‘클로드 미러’는 코팅된 검은색의 볼록 거울로, 풍경의 색상과 색조 범위를 줄이고 부드럽게 만들어 풍경을 마치 풍경화처럼 보이도록 한다.
 
18세기의 관광 상품이었던 ‘픽처레스크 투어’가 자연으로 하여금 클로드 로랭의 고전주의적 아르카디아를 모방하게 만들었다면, 김혜원은 스마트폰 사진을 모방하는 일상에서 출발하여 화가의 작업실로 거슬러 올라가는 마음의 경로를 제시한다.


김혜원, 〈자동차 밑 고양이〉, 2025, 캔버스에 아크릴릭 물감, 아크릴릭 미디엄, 72.7×60.6cm ©김혜원

이처럼 김혜원은 사진첩에 저장된 일상적 이미지를 도안으로 이해하고 분해하여, 그것을 회화적 바탕에 노동 집약적인 재현 공정을 거쳐 그려낸다. 따라서 그의 회화는 얼핏 사진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회화적 즉물성을 드러내며 그림이 그려진 시간을 가늠하게 만든다.
 
김혜원은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인식하는 광학적인 현상으로 설명한다. 이에 따라, 그는 배경과 형상이라는 공간적 구조 이전에 빛과 색이라는 입자들로 세계를 인식함으로써, 수공예적인 그리기의 방법을 통해 빛과 색으로 구성된 찰나적인 인상을 물질의 형태로 화면 위에 남긴다.

 ”누군가 그리고자 하는 이미지의 내용보다는 화면 안에 겹을 쌓아가며 그림을 그리는 과정 자체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가 있다면, 그가 매 순간 창의적으로 구상하고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행위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작업 과정에서 창조적인 행위가 발현되는 시간은 짧게 지나가고, 나머지 시간은 예술적 창의와는 무관하게 흘러간다면, 그림을 그리는 매 순간의 합인 그 시간을 도대체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김혜원, 작가 노트) 


김혜원 작가 ©PIE

김혜원은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조형예술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개인전으로는 《픽처레스크 투어》(피코, 서울, 2025), 《해 시계》(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서울, 2023), 《Thickness of Pictures》(Hall1, 서울, 2022)이 있다.
 
또한 작가는 《레인보우 섀도우 체이서》(팩션, 서울, 2025), 《페리지윈터쇼 2024》(페리지갤러리, 서울, 2024), 《지워진 기억조차 리듬을 남긴다》(우석갤러리, 서울, 2023), 《히스테리아: 동시대 리얼리즘 회화》(일민미술관, 서울, 2023), 《모뉴멘탈》(뮤지엄헤드, 서울, 2023), 《낯선 여정》(드로잉룸, 서울, 2021), 《재현의 방법》(원앤제이 갤러리, 서울 2020)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