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민(b. 1994)은 전통적인 동양화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무엇이 동양화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지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동양화의 여러 뿌리들 중에서 자신에게 유효한 지점과 원리를 참조해 자기만의 새로운 동양화 시스템을 실험한다.

황규민, 〈Beyond the Stone〉, 2019, 한지에 수묵채색, 162.2x130.3cm ©황규민

황규민의 초기 작업은 특정한 장소나 상황 속에서 직접 경험했던 것들, 그 당시의 감정과 느낌, 이로부터 촉발된 이야기들을 전시 공간에 재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2019년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열린 첫 번째 개인전 《Muh Emdap Inam Mo》에서 작가는 히말라야 산맥을 여행하며 마주한 자연과 그로부터 느꼈던 감정과 사유를 당시의 풍경 이미지로 옮겨와 풀어냈다.
 
그림과 부조 조각, 판화로 이루어진 전시는 작가가 당시 산길에서 느꼈던 것들을 관객과 감각의 형태로 공유하는 방식으로 꾸려졌다. 전시장 입구에는 ‘Put your left hand on the stones’라는 문구가 적힌 표지판이 있고 그 좌측에는 글자가 새겨진 비석들이 늘어서 있었다.


《Muh Emdap Inam Mo》 전시 전경(서교예술실험센터, 2019) ©황규민

황규민은 자신이 직접 만지고 보았던 이 비석을 재현해 관객 또한 이 위에 손을 올리며 미래에 대한 각자만의 생각과 감정에 빠져들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고자 했다. 돌을 만지며 모퉁이로 돌면 한 폭의 안개 그림과 판화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 판화의 원판은 관객이 손을 얹고 있는 부조 조각이었다.
 
작가는 이를 통해 “같은 도안이 풍기는 전혀 다른 느낌과 중간 중간 만날 수 있는 안개 낀 풍경 속에서 다가오는 시간의 환상을 걷어내고 사람들이 각자의 현 위치에 서 볼 수 있으면” 했다고 설명한다.

《Muh Emdap Inam Mo》 전시 전경(서교예술실험센터, 2019) ©황규민

그가 네팔의 산길에서 만난 수많은 돌들은 주민들에게 성스럽게 여겨지던 존재였다. 주민들은 이 돌들을 만나면 왼쪽으로 걸어야 하며, 그 돌에 새겨진 문자를 만지며 주문을 외면 하루의 일이 잘 풀린다고 믿었다.
 
그 돌에 새겨진 문자는 티베트 승려가 적은 것들로, 히말라야 사람들은 그 뜻을 정확하게 알 수 없음에도 매일 이를 매만지며 미래의 안정을 구한다. 황규민은 읽을 수 없는 문자에 자신의 미래를 내맡기는 이들을 바라보며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고민했다.

황규민, 〈Beyond the Stone 2〉, 2019, 한지에 수묵채색, 162.2x130.3cm ©황규민

과거와 현재만 알 수 있을 뿐, 앞으로 닥쳐올 미래는 불확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위해 마음을 다하는 히말라야 사람들의 주문을 전시장으로 옮겨 옴으로써 작가는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의 시간과 그림 속 안개처럼 흐릿한 그 이후의 시간에 대해 사유해볼 수 있도록 했다.  


《Penetrating Stone》 전시 전경(KSD 갤러리, 2020) ©황규민

이듬해 KSD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Penetrating Stone》 또한 작가의 일상적인 경험에서 출발한 작업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황규민은 일상에서 마주한 장면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작업으로 옮겨 왔다. 전시는 이렇게 수집한 장면들에 대한 그의 회화적 탐구와 철학적 사유를 조명하고자 했다.
 
전시 제목인 ‘뚫린 벼루(Penetrating Stone)’는 ‘열 개의 벼루가 뚫렸고, 천 자루의 붓이 닳았다(磨穿十硏 禿盡千毫)’고 전해지는 추사 김정희의 고백에서 비롯되었지만, 이 문장이 일반적으로 함의하는 ‘노력’의 가치가 아닌, 기성 가치 체계를 문제의식 없이 맹목적으로 따르는 양상을 투영한 반어적 표현이다.

황규민, 〈모방명가화보(摹倣名家畵譜) - Boundaries〉, 2020, 종이에 유성판화, 30x20cm ©황규민

같은 맥락에서 황규민의 ‘뚫린 벼루’ 연작은 ‘복제’의 알레고리를 통해 작가가 ‘동양화’ 학제 내부에서 체험한 자전적인 성찰을 담고 있다. ‘뚫린 벼루’ 연작은 크게 세 가지 기록으로 분류된다. 우선 제1작업은 작가가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서 수집한 일상의 사진 이미지를 수묵매체로 옮기는 시간이었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어떠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거나 임의의 형상을 포착할 수 있는 장면들을 사진으로 수집한 다음, 수묵을 매체로 ‘사진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 사이의 균형점을 찾아 나갔다.

황규민, 〈Boundaries_print〉, 2020, 한지에 먹가루, 89.5x57cm ©황규민

이어서 제2작업에서 황규민은 동양화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중국 청나라의 전통화보 『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의 양식을 참조해 목판화 연작을 제작했다. 근현대 한국의 서화 교육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화보(畵譜)’는 서화의 여러 모티프를 담는 한편, 대가의 계보가 잘 정리되어 있어 그림을 직접 구할 수 없는 중산층에게 교재로 쓰이기도 했다.
 
제2작업의 화면은 제1작업의 약 20분의 1크기로, 도상, 테두리, 부제가 중심부터 순서대로 위치하고 있어 그가 참고한 전통화보의 형식과 비슷해 보인다. 또한 동시대적 사건을 약 400여 년 전에 출판된 화보의 양식으로 재구성됨으로써, 그 간극에 허구적 서사가 채워지게 된다.

《Penetrating Stone》 전시 전경(KSD 갤러리, 2020) ©황규민

제1작업의 위상을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는 제2작업의 태도는 제3작업에서도 이어진다. ‘뚫린 벼루’의 제2작업이 전통 화보를 전유하였듯이, 세 가지의 과정은 전통회화를 모사해온 역사를 반추한다. 그러나 이때 작가는 단순히 양식을 따르기보다 과거의 전통이 관습적으로 작동하는 원리를 빌려 자신의 작업을 제작함으로써 동시대적으로 재해석한 새로운 체계를 구축한다.
 
제3작업에 대해 살펴보자면, 황규민은 이때 자신이 직접 고안한 특별한 기계를 이용해 만든 먹 가루를 재료로 삼아 제2작업만을 참조해 제1작업을 모방한다. 이 기계는 구멍 난 철판 위에서 아교로 굳힌 먹을 그대로 갈아 가루로 만든다.

《Penetrating Stone》 전시 전경(KSD 갤러리, 2020) ©황규민

사람이 직접 벼루에 먹을 갈아 만드는 전통적인 수행 방식 대신 기계의 작동으로 모은 먹 입자는 단지 기존의 것과 그 크기만 달라진 것이 아닌, 과거의 관행을 덜어냄으로써 특정한 예술적 전통과 거리를 두는 태도로 나아간다.
 
이렇듯 3개의 단계로 이루어진 ‘뚫린 벼루’ 연작의 각 개체들은 옛 화본의 양식을 원본으로 전제하며 그대로 모방한 『개자원화보』와 달리, 황규민이라는 한 개인이 경험한 현실과 연결된 ‘그림의 연속체’로서 과거의 계보로부터 일탈한다.

황규민, 《다시 그린 세계: 한국화의 단절과 연속》 전시 전경(일민미술관, 2022) ©황규민

2020년 개인전을 기점으로 황규민은 ‘화보’의 형식을 빌려 과거 참조에 관한 이야기를 새롭게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작가는 동양화단을 비유한 시스템을 독자적으로 만들고, 그 안에 동시대 작품을 입력하는 작업을 전개해 왔다.
 
또한 그는 이러한 실험의 중요한 장치로 가상의 인물 ‘황 씨(b. 1874)’를 등장시킨다. 이 시스템의 주요한 틀은 긴 세월 그림 감상을 즐긴 미술 애호가로 설정된 가상의 인물 황 씨가 원작을 배울 수 있도록 ‘화보’를 제작하고, 화보 낱장을 점, 획 등 ‘단위’로 이용하여 새로운 그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황씨화보》 전시 전경(OCI 미술관, 2022) ©OCI미술관

2022년 이러한 연장선에서 열린 개인전 《황씨화보》는 작가 황규민을 통해 동시대 서화를 접하며 감동한 황 씨가 ‘황씨화보’를 제작하기 시작했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황씨화보’ 연작은 『개자원화보』를 비롯한 여러 전통화보를 참고하여 만들어졌다.
 
그러나 전근대 서화와는 달리, ‘황씨화보’는 다양한 그림의 소재를 기준으로 목차가 나뉘어져 있다. 목차는 화목에 따라 하늘(天), 물(水), 불(火), 비(雨), 돌(石), 흙(土), 풀(艸), 나무(木), 사람(人), 서화(書畵), 이렇게 열 종류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는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이 생기고 사람이 자리 잡아, 글과 그림을 남기는 역사의 순간까지에서 직관할 수 있는 아홉 가지 자연과 한가지 인공물이다.


《황씨화보》 전시 전경(OCI 미술관, 2022) ©OCI미술관

그리고 그 안에는 작가 황규민이 경험해온 상황이나 특정한 장소들에 대한 기억과 감정의 장면들로 이루어진 그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아가, 작가는 화보의 낱장을 이 목차의 형을 따라 배치해, 한데 모아 그 뜻을 드러냈다. 각 그림은 여섯에서 십여 개로 조각내어 전체와 그 세부를 알 수 있게 하였다. 더불어 그림의 제작 년도, 크기, 매체, 기법 등 그림을 익히기에 유용한 정보를 적고, 그림에 담긴 이야기나 작가 자신의 의견을 짧게 담았다.


황규민, 〈화보21-부유하는 물덩이-알맹이〉, 2023, 한지에 목판, 수채화 물감, 유성 잉크, 미색과 백색 한지 배접, 검정액자, 금속, 156.0×106.0cm (각 31.2×21.2cm) ©황규민

전통화보의 형식을 재해석해 만든 새로운 시스템에 자신의 작업을 담아오던 작가는, 이후 서화 매체를 이용하는 다른 작가의 그림으로 확장하여 화보의 기본 디자인을 변형할 다양한 방법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화보에 대한 여정은 다시 한번 가상의 인물 황 씨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황 씨는 박소현과의 만남(《물, 길》, 한원미술관, 서울, 2023)에서 창작의 욕심이 싹튼 이후 김승규를 만나 한 차례 전시 (《신앙없는 기도》, 갤러리 요시나가, 도쿄, 일본, 2023)를 진행했고, 송지인을 만난 2024년에는, 화보 수록의 기준을 구체화하게 되었다.


《송지인화보-살꽂이》 전시 전경(인천아트플랫폼, 2024) ©인천아트플랫폼

2024년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열린 2인전 《송지인화보-살꽂이》는 황 씨가 네 번째로 만난 동시대 서화가 송지인의 그림을 보고 제작한 ‘황씨화보’를 선보이는 전시였다.
 
송지인은 수묵 재료를 기반으로 회화 작업을 진행하는 한편, 설치와 오브제 등 매체 실험을 함께 이어오고 있다. 최근 일상에서 인지적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사건이나 상황, 특정 인간 또는 동식물을 관찰하며 쉽게 인지되지 못하여 관심 대상에 벗어난 소외된 사례들을 지속적으로 목격하고, 이를 수집하여 시각언어로써 제시하는 중이다.


《송지인화보-살꽂이》 전시 전경(인천아트플랫폼, 2024) ©인천아트플랫폼

어느 날 좋은 술을 구하러 나간 황 씨는 송지인의 식물 설치 작업과 이를 기반으로 만든 관객 참여프로그램인 〈목자의 꽃꽂이〉(2023)를 보았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송지인이 그림을 종이에서 끄집어내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고 생각해 이를 화보에 수록하기로 했다. 이후 여러 종의 비둘기를 섞어 만든 〈하이브리드비둘기〉(2023)와 그들이 사는 〈도바리움(Dovarium)〉(2023)을 보고 이 역시 다양한 인간상을 사회에 녹여내며, 나누어 주는 그림이라 생각한다.


《송지인화보-살꽂이》 전시 전경(인천아트플랫폼, 2024) ©인천아트플랫폼

《송지인화보-살꽂이》는 '끄집어낸 그림'과 '섞은 그림'을 함께 보여주었다. 가령, 전시장에 펼쳐진 투호 놀이터는 황 씨가 〈목자의 꽃꽂이〉를 해석해 만든 화보다. 송지인이 관람객들에게 한국식 꽃꽂이를 나누어 주었듯 황 씨는 투호놀이를 통해 관람객들이 공간에 그림을 그려볼 기회를 제공한다.
 
〈화보그림-하이브리드 하이브리드 비둘기〉(2023)는 이미 섞인 송지인의 〈하이브리드 비둘기〉를 ‘황씨화보’의 재배치 시스템에 입력해 더 복잡한 하이브리드 개체를 만들어 보여준다. 함께 화살을 꽂고 섞인 비둘기를 바라보면서 잊힌 그림과 잊혀지는 존재를 떠올릴 수 있도록 했다.
 
이처럼 황규민은 전통적인 동양화의 기술이나 사상을 그저 답습하는 것에서 나아가 과거의 형식을 빌려온 시스템에 자신을 비롯한 주변의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입력함으로써, 오랜 동양화의 전통이 현 시점에서도 유효한 가치로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동양화를 비유한 시스템을 만들어, 그 안에 동시대 서화를 입력한다. 가상의 인물 황씨(b.1874)가 원작을 배울 수 있는 ‘화보’를 제작하고, 화보 낱장을 점, 획 등 ‘단위’로 이용해 새로운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 시스템의 틀이다. 나는 이 시스템을 이용해 서화→동양화→동시대서화의 연결을 분명하게 그리고 싶었고, 서화 애호가 황씨의 눈으로 동시대 서화를 바라보려 애썼다.”  (황규민, 작가 노트)


주형준 작가 ©김홍도미술관

황규민은 홍익대학교에서 동양화과 학사를,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원 동양화과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개인전으로는 《황씨화보》(OCI 미술관, 서울, 2022), 《Penetrating Stone》(KSD갤러리, 서울, 2020), 《Muh Emdap Inam Mo》(서교예술실험센터, 서울, 2019)이 있다.
 
또한 작가는 《아아! 동양화: 영원한 파라디소》(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파주, 2025), 《각자의 기호》(갤러리진선, 서울, 2024), 《협업의 기술》(인천아트플랫폼, 인천, 2024), 《송지인화보-살꽂이》(인천아트플랫폼, 인천, 2024), 《信仰なしの祈り(신앙 없는 기도)》(갤러리 요시나가, 도쿄, 2023), 《다시 그린 세계: 한국화의 단절과 연속》(일민미술관, 서울, 2022)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황규민은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2024), 인천아트플랫폼(2023) 등에 입주 작가로 선정되었으며, 그의 작품은 OCI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