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원은 2017년 첫 개인전 이래 지금까지 5번의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매 개인전에는 당시의 마음과 사유가 고스란히 담겼다. 초기의 개인전은
노동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번뇌, 예술가라는 직업이 갖는 사회적 불확실성에 대한 대응이자 성실 증명 시도로
비친다. 과도한 성실만을 요구하는 사회, 휘몰아치는 서울
미술로부터 거리두기를 두기 위해 돌연 택한 몽골행에서 가진 스스로에 대한 고찰, 효용성에 대한 되새김은
다음 전시 《Starry, starry ghost》(2020, 갤러리175)로 이어진다.
이제 작가는 사회적 기준이나 꼬리표에 자신을 맞추기보다는
자신의 속도로, 이세계(異世界)를 짓기로 한 듯 보인다. 마치 불화는 숙명이라는 듯이. 2021년 개인전 《목젖까지 던지세요, 사랑에》(2021, 온수공간)는 이번 전시와 주제적으로 보다 직접적 연결이라
할 수 있는 작업을 선보인 자리였다. 이후 아교 템페라라는 주재료의 특성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시기(《불멸의 크랙》(2022, GOP FACTORY))를 거쳐 현재다.
약 8년의 시간이 쌓였음에도 작가는 여전히 작업 근간, 뿌리에 대한 질문을 품고 “길을 잃은 채 머물기”[5]를 수행한다. 여기에서 길을 잃은 채 머문다는 것은 부정적 의미보다는 일반의 세계와 조금 다른 모양과 속도를 갖는 그의 세계
안에서 어떤 가능성 찾아 나가는 일, 어둠 속을 더듬는 창조적 시도로 이해하는 편이 옳겠다.
한편
선에 대해 살펴보자. 정주원의 그림 속 선은 물자국에 가깝다. 언뜻
눈물이 흐른 흔적처럼도 보이는 그의 그림엔 정말이지 우는 표정도 심심찮게 등장해 왔다. 물자국과 같은
선은 작업 전반이 담아내는 마음과 맞물리기도 하지만, 재료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된 결과물이기도 하다. 작가가 오래 써온 아교 템페라가 생성하는 불가항력적 크랙[6]은
한때 작가에게 그림을 방해하는 요소로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를 극복 대상이라기보다는 특수성으로서
받아들여 물감을 얇게 쌓는 방식 등을 통해 유연하게 조정하고, 그림 안 요소로서 자연스럽게(불편하지 않게) 위치시킨다. 실패(로 생각하던 것)를 통해 기존의 인식이나 관습, 규범을 재구성하고 다양성을 끌어안는 것은 그의 작업이 나아가고자 하는 태도,
방향성과 궤를 함께한다. 그가 그리는 선은 명료하고 날카롭기보단 모호하다. 구분 짓기 위함이라기보다는 흐트러뜨리기 위한 머뭇거림에 가깝다. 중첩된
선 사이로 선연히 드러나는 형상, 형상 너머로 떠오르는 인간적인 순간이 붙들릴 때, 작업은 완성된다.
전시장
한편에 어정쩡하게 놓여있는 입체 구조물 〈대단한 벽〉(2024) 역시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림을 걸기 위한 일종의 가벽이지만 3D 펜으로
얼기설기 짜인 벽돌 벽은 중앙을 점거하지도, 그 무엇도 효과적으로 가리지 못한 채 작은 그림들만을 지탱한다.[7] 이는
모호한 그대로가 제 역할로서 관객의 동선과 경험을 이끈다.
〈아홉
개의 몸, 네 개의 손〉(2024)을 보며 정주원이 예술에
갖는 마음, 삶을 대하는 태도를 다시 한번 어림해 본다. 그것은
아마 〈단단하고 건강한 몸〉(2024)처럼 지반에 뿌리내리고, 토막들을
쌓아 커다란 하나의 ‘존재’로 거듭나는 것 아닐까. 서로 다른 두께의 주름과 굳은살, 껍데기를 갖고 있음에 그 어떤
시간을 보내고 왔던 그것은 중요치 않다. 정주원의 작업 표면 뒤에 서려 있는 깊은 사랑, 숱한 머뭇거림 끝에 완성된 그림 앞에서 그가 보냈을 무한의 시간을 더듬어 본다.
[1] 이 글의 제목은 밴드 언니네이발관의 노래 제목을 인용했음을 밝힌다.
[2] 앙리 베르그송, 『웃음』(Le Rire), 정연복[옮김], 문학과지성사, 2021, 34-36쪽.
[3] 위의 책, 28쪽.
[4] 나무, 나뭇가지는
그의 작업 안에서 지팡이나 이인삼각의 모양새로 신체의 연장 혹은 보조도구로서 표상되기도, 토막들이 쌓여
단단한 하나를 이루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 전통적으로 마을을 수호하거나 이정표 역할을 해온 장승을
연상케 하는 형태로 드러나기도 한다.
[5] 잭 핼버스탬의 표현을 빌렸다.
이어지는 다음 문장 역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방황하고, 즉흥적으로 만들어내고, 결핍된 채,
같은 자리를 맴돌며 움직일 것이다. 우리는 길을 잃고, 자동차를
잃고, 어젠다를 잃고, 어쩌면 정신도 잃겠지만, 잃음으로써 의미를 만들어내는 다른 길을 찾아낼 것이다.” 잭 핼버스탬, 『실패의 기술과 퀴어 예술』(The Queer Art of Failure),
허원[옮김], 현실문화, 2024, 62쪽.
[6] 정주원은 2020년
개인전을 제외하고는 쭉 동양화 안료, 백토에 아교를 용매로 한 수제 물감을 주재료로 작업해왔다. 그는 재료에 대해서 그간 “아교 템페라”라는 용어로 통칭해 왔는데, 이때의
‘템페라’는 안료에 용매를 섞어 직접 만든 물감을 의미한다. 재료를 만드는 방식에 따라 다른 점도와 농도를 가져온 정주원의 그림에는 크고 작은 크랙이 수반되어 왔다. 그는 직전의 개인전 《불멸의 크랙》(2022, GOP Factory)를
통해 크랙이 주는 무력감에 대해 집중적으로 탐구한 바 있다.
[7] 아이러니하게도 이 벽의 제작 과정에는 엄청난 노동과 시간이 집약되었다. “대단한 벽”은 실로 진실이기도 농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