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형준(b. 1988)은 지필묵을 근간으로 꿈에 나타난 무의식의 세계를 풀어나가는 작업을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 왔다. 작가는 동양 사상과 전통 재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 해오며, 오늘날 현대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여백’과 상상 속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방식에 대해 지속적으로 실험하고 있다.

주형준, 〈Shelter 2〉, 2017, 장지에 수묵 채색, 130x400cm ©주형준

주형준의 작업은 자신의 무의식에 반영된 현실의 불안을 텍스트로 기록하는 일에서 출발해, 이를 그림의 언어로 재현하는 과정을 거친다. 초기 작업에서 그는 현실에서 받는 불안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일종의 방어기제로서 화면을 구상하였다.


주형준, 〈Shelter 1〉, 2017, 장지에 수묵 채색, 76x107cm ©주형준

당시 그의 작업은 크게 세 가지 요소로 구분 지을 수 있다. 첫 번째는 현실에서 자신에게 야기하는 불안을 시각화 시킨 것, 두 번째는 그것에 반영하여 만들어진 도피처, 세 번째는 불안으로 비롯되어 만들어진 방어기제이다.
 
예를 들어, 그의 그림 속에서 현실의 불안은 늑대로, 도피처는 담벼락 또는 집으로 표현되어 나타났으며, 이후에는 늑대는 빛으로, 담장과 집은 일회적 성격을 가진 텐트나 천막으로 변화되어 왔다.

주형준, 〈Safeguard 15〉, 2019, 장지에 수묵 채색, 140x200cm ©주형준

2019년 신한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SAFEGUARD》에서 주형준은 그간 보여주었던 세 가지의 요소가 반영된 화면 안에서 대상들을 선별하고 소거하여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구체화 하고자 했다. 가령, 도피처라는 요소를 화면 안에 드러내지 않고 화면 밖의 공간으로 밀어내어, 빛과 그에 대응하는 방어기제의 표현으로 대립각을 세우는 것에 집중했다.

주형준, 〈Safeguard 26〉, 2019, 장지에 수묵 채색, 77x110cm ©주형준

이러한 대립은 작업에서 극적인 표현과 시각적 대비 효과를 위해 연출되는 동시에, 평면 안에서 공간의 확장을 위한 장치로도 표현되었다. 이를 통해 작가는 화면 안의 시선이 작업 안에서 맴돌지 않고 시선을 자연스레 화면 밖으로 또는 화면 너머의 공간으로 이끌어내어 공간의 확장을 유도했다.
 
그리고 자연의 이미지로 표현된 방어기제는 자아가 만들어 낸 것이라는 인위적인 의미를 가중하기 위해 도형의 형태로 등장하였다. 작가는 방어기제란 항시 발현되는 것이 아닌 외부의 자극이 있어야 나타난다는 점에 착안해 인위적인 방어기제들이 빛으로 표현된 불안에 반영하여 갖가지 크고 작은 도형들로 표현해 나타냈다.


주형준, 〈Safeguard 8〉, 2019, 장지에 수묵 채색, 100x100cm ©주형준

이러한 불안에 대한 주제는 30대 사회초년생인 자신이 가족으로부터 독립하여 안전한 보금자리를 찾지 못했던 작가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몸과 정신이 성숙해져 본래의 가족과 분리되어야 할 시기가 다가왔지만 냉담한 현실 속에서는 독립적이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갈등에서 야기된 불안이었다.
 
작가는 자신의 거처에 대한 불안이 나타나고 그에 따라 자아 안에 잠재되어 있던 방어기제가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부분을 형상화하기 위해 그는 자연의 이미지를 차용해 방어기제화 시켜 조형물을 생성하고, 그 안으로 숨어드는 장치로 사용하였다.

주형준, 〈Safeguard 19〉, 2019, 장지에 수묵 채색, 100x100cm ©주형준

이에 대치하는 빛은 불안을 시각화 시킨 대상이다. 빛은 생명력을 나타냄과 동시에 어둠이라는 부정적인 요소를 함께 내포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자신이 겪었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감정과 사유를 화면 안의 장치로 옮겨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화면 안에 자리하게 된 대조적인 장치들은 마치 줄다리기를 하듯 긴장감을 유지하며 각자의 내면 안에 품고 있는 다양한 불안들을 건드리고 공감을 이끌어 낸다.

《완성연상》 전시 전경(쉬프트, 2020) ©주형준

한편, 2020년 쉬프트에서 열린 개인전 《완성연상》에서 주형준은 ‘완성연상’이라는 지각 심리에 착안해 현실의 불안에 대한 재현을 새로운 형식으로 풀어나갔다. ‘완성연상’이란 부분과 부분을 통하여 전체를 인지하는 지각 심리 현상을 의미한다. 비록 전체 맥락 사이에 여백이 있더라도, 사람은 그 전후 관계를 통해 빈 공간을 상상하고 그 안을 채우게 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그림 안에서도 여백은 여러 가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며, 기존에 완성했던 그림들을 조각을 내어 빈 공간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조각들 사이에 생겨난 이 인위적인 여백을 통해 감상자의 상상을 그림 안으로 끌어들여 그림을 완성시키고자 했다.

《완성연상》 전시 전경(쉬프트, 2020) ©주형준

이러한 ‘여백’에 대한 관심은 ‘좋은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화가로서의 근본적인 고민에서 출발했다. 주형준은 이에 대한 자신만의 해답으로 “작가만의 감성이 잘 묻어 나오는 그림”이라고 말한다. 무언가를 재현하고자 할 때 재현의 대상과 재현해내는 형상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존재한다. 그는 이 간극을 자신만의 언어로 채웠을 때, 작가의 감성이 잘 드러나는 그림이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즉, 대상과 재현되는 형상의 차이를 채워 나가는 과정에서 작가만의 언어가 발현되고, 그로부터 각기 다른 감성이 표현된다는 것이다. 이어서 작가는 “그렇다면 그 간극이 엄청나게 커졌을 때, 그 만큼 작가의 언어가 많이 묻어나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이는 곧 꿈에 대한 재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주형준, 〈그의 출현〉, 2020, 종이에 수묵, 115x175cm ©주형준

작가에게 있어서 꿈은 그러한 간극을 최대치로 설정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꿈 속의 장면은 한번도 보지 못했던, 혹은 봤지만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므로 순간적인 관찰만으로 그 이미지를 기억하게 되기에, 이를 재현하기 위한 간극은 현실의 대상보다 더욱 클 것이다.
 
주형준은 이를 위해 2018년부터 자신이 꾼 꿈을 매일 텍스트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꿈에 반영된 현실의 감정, 이야기, 이미지 등을 화면 위에 재구성하였다.
 
꿈에 나타난 이미지에는 현실에서 받은 불안이 무의식 속에 저장되었다가 발현된 이미지와 평소에 기억하고 있었던 사소한 일상적인 이미지가 혼재되어 나타났다. 그는 이 꿈들이 불안에 의해 나타난 현상이며,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자신의 또 다른 방어기제로서 나타난 것이라고 보았다.

주형준, 〈내 코고는 소릴수도 있겠다〉(부분), 2020, 순지에 먹, 442x33cm ©주형준

이와 함께, 전시 《완성연상》에서는 질감에 대한 표현 또한 변화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전작에서 주형준은 전통적인 동양화 재료를 가지고 기존의 기법을 자신의 주제와 결합시켜 재해석해 왔다. 특히 그는 전통 채색 기법 중에서 중채법(重彩法)을 활용했다.
 
물감을 쌓아 올리는 중채법은 그 과정에서 밑에 있는 층들이 점차 종이에 스며들며 서로 혼색이 되는 특징을 가진다. 작가는 이렇게 물감의 레이어를 쌓아 올리며 다층적인 자신의 무의식 세계와 정서를 종이 위로 옮겨 왔다.
 
화려하고 대조적인 색감이 어우러지던 전작과는 달리, 《완성연상》에서는 흑백의 수묵화가 그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고 있었다. 여기서 작가는 색채를 쌓아 올리는 방식이 아닌 준법(皴法)을 통해 내면 속 불안의 형태를 섬세한 질감의 묘사로써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흰 매가 머물던 자리》 전시 전경(상업화랑, 2023) ©상업화랑

한편, 2023년 상업화랑에서 열린 개인전 《흰 매가 머물던 자리》는 평범한 사람이 가지는 아주 개인적인 소망을 재현하는 그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작가는 자기 자신을 비롯해 지금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소원을 마치 신화 속의 영웅담처럼 그렸다.


《흰 매가 머물던 자리》 전시 전경(상업화랑, 2023) ©상업화랑

이는 평범한 사람들이 품은 소원의 크기나 무게가 신화 속 주인공들이 행했던 일들에 비해 가볍거나 사소한 것이 아니라는 작가의 철학에서 형성된 주제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작가는 시선에 따라 사소할 수 있는 개인적인 소원과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한 과정들을 상상하고, 그것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염원의 마음을 담으며 그림을 그려 나갔다.
 
이러한 작가의 염원은 탑 형태의 입체 회화 작품에서 더욱 시각적으로 다가온다. 과거 탑 주변을 돌며 자신의 소망을 빌던 것처럼, 관객은 이 회화 조형물 주변을 돌면서 탑의 형태로 쌓아 올려진 평범한 이들의 소망을 마주하고, 또 자신의 마음 속에 자리한 각자만의 소망을 비추어 보게 된다.


《흰 매가 머물던 자리》 전시 전경(상업화랑, 2023) ©상업화랑

즉, 《흰 매가 머물던 자리》에서 선보인 작업들은 인간의 욕망을 감각하는 회화로, 자전적 서사와 사회적 기억, 사적 관계의 사람들로부터 소원 이야기를 수집하여 보편적인 일상을 조명한다. 신화에 등장하는 신이나 설화 속 영웅, 왕 등 소위 상위 계층의 일대기를 조명한 과거의 그림과는 달리, 그의 작업은 현 시대의 시각에서 보편적인 대중을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는 과거의 계급 계층의 신격화된 이미지를 전복시키는 표현으로도 볼 수 있다.
 
그렇게 주형준의 작업은 그려낼 이야기와 그리는 이미지 사이의 간극, 나아가 과거의 신격화 되어 표현된 그림과 현재의 보편적 욕망 사이의 전복된 표현들을 조율하고 화면을 배분하는 작업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어둔 곳에 있을 땐 내 그림자도 날 떠나 있는다》 전시 전경(금호미술관, 2025) ©금호미술관

그리고 주형준은 2025년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어둔 곳에 있을 땐 내 그림자도 날 떠나 있는다》에서는 ‘Q’라는 가상의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작품을 소개했다. ‘Q’는 온 세상이 칠흑 같은 먹색으로만 보이는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빛줄기를 찾아 고군분투하는 인물로, 작가 자신 또는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대변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작가는 선묘를 통해 작고도 거창한 Q의 소원 서사를 극적으로 그려내며, 삶의 미세한 균열과 그 틈에서 피어나는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거대한 화면을 분절시켜 제시하거나, 돌출된 구조물 위에 회화를 배치하는 방식은 관객이 작품 속 서사를 입체적으로 읽어 나가도록 유도한다.


《어둔 곳에 있을 땐 내 그림자도 날 떠나 있는다》 전시 전경(금호미술관, 2025) ©금호미술관

이처럼 주형준은 과거의 전통 회화를 주요한 매체로 삼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지금을 살아가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재현의 대상과 그림, 즉 현실과 가상 사이의 간극을 자신만의 언어로 채워 나가는 그의 작업은, 현 시대를 살아가며 지신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마주하는 일과 겹쳐 보게 한다.
 
과거와 현재, 현실과 이상 사이를 조율해 나가며 완성된 주형준의 그림은 그 앞에 선 평범한 이들에게 치유와 위로의 예술로 다가온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몰입되는 동안 다른 것은 다 잊게 되는데 나의 그림을 보는 사람 또한 그 순간만큼은 그랬으면 좋겠다. 쉘터는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사람들이 안전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그 마음안의 공간을 충분히 잘 활용하다 보면 언젠간 현실과 이상사이에서 줄다리기 하는 그 긴장감마저 즐길 수 있는 날이 오게 되지 않을까.”  (주형준, YOO ART 인터뷰 중) 


주형준 작가 ©김홍도미술관

주형준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동양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를 취득하였으며, 미술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어둔 곳에 있을 땐 내 그림자도 날 떠나 있는다》(금호미술관, 서울, 2025), 《흰 매가 머물던 자리》(상업화랑, 서울, 2023), 《완성연상》(쉬프트, 서울, 2020), 《SAFEGUARD》(신한갤러리, 서울, 2019)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아주 오래 걱정한 미래》(교보아트스페이스, 서울, 2025), 제25회 단원미술제 선정작가전 《여기∞ 마주하다》(김홍도미술관, 안산, 2024), 《Our Volume》(상촌재, 서울, 2023), 《〈기획〉전 2020》(문화비축기지, 서울, 2020)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주형준은 제22회 금호영아티스트에 선정되었으며, 대구 가창창작스튜디오(2020) 및 중국 베이징 공아트스페이스(2013) 레지던시 입주 작가로 활동한 바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