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eet Siren》 전시 전경(레인보우큐브, 2018) ©정수정

믿고 싶은 것과 믿을 수밖에 없는 것 사이의 세계_전영진

각각의 캔버스는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작가가 만들어 낸 세상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되는 긴 서사의 단편들을 담은 이미지 들이다. 작가는 글자 없는 그림책의 페이지를 순서를 뒤섞어 캔버스의 형태로 걸어 놓았다. 관객은 본능적으로 이 그림책의 줄거리를 읽으려 퍼즐을 맞추듯 이미지의 순서를 고민할 것이다. 작가는 언뜻 보기에 명확하지 않은 이미지들 속에 장면에 순서를 추측할만한 힌트를 남겨 놓았다.

관객은 반복된 교육으로 몸에 익은 흔한 서술구조에 따라 세포 혹은 우주로 보이는 이미지에서 탄생이라는 시작을, 꿈틀거리며 세상 밖으로 나오려는 추상적인 이미지에서 유의미한 생명체를, 그렇게 자라난 인간의 형태를 띤 생명체의 일과를, 그들이 모여 만들어 낸 미지의 세계를 차례로 느끼게 된다.

어떤 작가가 내놓은 것에도 정해진 답은 없지만, 관객은 정수정 작가의 작품을 통해 각자의 결론에 스스로 이르러,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혹은 네버랜드를 찾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각자의 모든 세계에는 공통적으로 현실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분법이 없다. 실제와 환상, 선과 악, 남과 여, 젊음과 늙음, 기쁨과 슬픔 등. 사실 작가가 관객에게 의도적으로 요구하는 유일한 바는 그 ‘구별 없음’에 있다.

보쉬 Hieronymus Bosch의 〈쾌락의 정원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에 대한 답으로 그렸다는 이번 전시의 메인 작품 〈Giving answers to Bosch〉(2018)를 통해 관객은 그가 탄생시킨 세상을 더욱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마음의 위안을 찾기 위해 논리와 과학으로 진실을 탐구하는 인간의 모습과 그와는 정반대에서 무형의 신을 만들어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오히려 진실과 멀어지는 인간이라는 양극단의 모습.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 신화 그림의 형태와 종교(혹은 이단)적 요소를 심어 대단한 과학적 발전에도 여전히 허상을 좇는 우리를 발견하도록 한다.

존재하지 않는 작가의 세상 역시 보쉬의 그림이 그러하듯 우리의 현실을 평평하고, 무덤덤하게 담고 있다. 이로써 작가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못하는 인간의 양가감정과 이중성이라는 무형의 것, 보이지 않는 힘과 이끌림을 유형의 이미지로 표현했다.

없는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예술가의 지위는 사실 세상의 무엇도 지휘하지 못함에도 언어 너머에 존재하는 감정 혹은 생각을 끌어낸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진다. 작가는 이러한 정제된 통제력을 그의 그림 속에 실제적이지 않은 형태의 이미지로 변형시켰다. 그의 생명체(드로잉)는 물감(색)을 먹고 자라난다.

미완성 혹은 드로잉으로 남겨진 부분은 관람자에게 바라보는 것만 가능한 그의 지위에 머무를 것을 강요하고, 예술이 가진 한계를 친절하게 설명하며, 우리가 꿈꾸는 모든 것들은 사실은 예술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믿고 싶은 것과 믿을 수밖에 없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우듯 말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