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인은 2017년경부터 회화 작업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작업은
그보다 더 오래 전에 그렸다고 해도 믿을 법하다. 화면 전체를 뒤덮는 회색조의 톤에 사실적인 묘사, 그리고 유화 물감이 뿜어내는 물질성 등이 어우러져 만드는 분위기는 지금까지 많은 회화 작업들을 감상하며 기억에
쌓여온 어떤 익숙함과 이어지기 때문이다. 무척이나 오래된 미술 매체임에도 회화가 가진 매체로서의 가능성은
아직 고갈되지 않았고, 회화를 재창안하려는 시도는 그래서인지 갈수록 새로운 실험적인 방향을 향해 가고
있는 듯하다. 김정인의 작업이 어쩐지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이유는 기발한 재료를 끌어온다거나, 다른 분야와 융합한다거나, 혹은 가상 세계와 연결하는 등 회화에서
벌어지는 각종 미래적인 시도를 보는 데 우리의 눈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1.
작가가 회화를 대하는 태도는 그의 작업 세계 전반과도 마주 닿아 있다. 여러
매체 가운데 회화를 고수하는 이유를 묻자 그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대상을 캔버스에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기억이 대상을
편집하는 시간을 존중하고, 이미 그려 놓은 부분에 이후 무언가를 덧대거나 다시 그리는 등 화면은 한
번 붓을 놓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오고, 수정하며 시간과 함께 흘러간다. 작가가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도록 허할 때 가능한 과정이다. 이러한 ‘더딘’ 습성은 매체에 대한 입장이면서 동시에 작가가 살아가고 싶은
삶의 속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느릿한 호흡으로 살아가기에 세상은 개인에게 끊임없이 변화를,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강요한다. 그래서 세상의 폭력적인 속도에
작가가 키워온 ‘저항성’이 작품 세계를 읽을 키워드가 된다.
2.
김정인이 지향하는 ‘저항성’은 어떤
감각일까? ‘저항’은 미술에서 명확한 계보와 뉘앙스가 굳어진
선명한 개념으로, 권력을 향해 저항했던 예술적 실천을 가리킨다. 김정인은
본인 작업의 좌표를 미술사에서 찾으며 멕시코 벽화운동, 문화대혁명 이후의 변화한 중국미술, 국내 민중미술 등을 계보로 제시하는데, 이는 미술계에서 통용되는
저항의 개념을 대표하는 역사적 사례들이다. 이러한 선례들이 갖는 명료한 저항의 기호를 김정인의 작업과
비교하자면, 권력을 비판한다는 일반적인 선에서 갖는 유사함만큼이나 명확해지는 것이 둘 간의 차이점이다. 미술의 기존 맥락에서 ‘저항’은
국가, 식민세력, 자본주의,
세계화, 재개발과 같이 표적으로 삼은 대상과 내용이 구체적이기에 긴장의 날이 예리하게 서
있는 반면, 김정인이 이야기하는 ‘권력’은 구체적이기보다는 포괄적인 존재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저항성’은 다른 해석을 요청한다.
저항은
소재의 선택에서도 드러난다. 작가가 주로 서울의 뒷골목을 배회하며 찾는 그림의 재료는 시대의 흐름에서
소외된 것들이다. 댕강 잘려 버려진 나뭇가지, 한 때 우아함을
뽐냈지만 초라하게 길가에 버려진 삼미신 조각상은 어딘가 이 시간을 버거워하며 버텨내고 있었던 기색이 역력하다. 낡고, 바래고, 지친 존재에게 동병상련을 느끼며 스스로를 투영하는 그림은
대담한 사회적 발언이라기 보다는 현대인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심리적인 초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3.
시대의 속도감을 서울만큼 극명하게 보여주는 도시가 또 있을까? 수많은 작가들이
현대 서울의 모습을 다각도로 포착해왔다. 재개발로 변해가는 모습을 저널리즘의 시선으로 아카이빙하거나, 과거가 사라지며 생겨나는 공허함을 감각적인 화면으로 표현하거나, 개발을
비판하며 행동주의로 나아가는 등 다양한 접근들이 있었다. 민중미술 작가들이 활동했던 1980년대와 비교할 때 자본주의는 지난 40여년 간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며 고도화되었다. 도시의 겉면이 휘황찬란한 만큼 화려한 조명 바깥으로 밀려난 그늘진 풍경도 그만큼
풍성하기에, 이는 작가에게 다양한 소재들을 제공한다. 천천히
흘러가는 회화의 시간과 함께, 작업을 지탱하는 다른 하나의 축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공간성이다.
권력이
질주하는 속도는 서울 내에서도 각기 다른데, 빗겨간 곳 중 하나가 작가의 고향인 장충동과 신당동이다. 작가의 일상이 진행되는 삶의 터전인 이 곳은 각종 뉴타운 개발로 소란스러운 타 지역에 비해 개발이 (아직까지는) 덜 이루어졌기에 그가 말하는 느린 시간성이 남아있다. 이 일대에서 보내는 하루하루는 김정인에게 편안함으로 다가오는 듯 하고, 작가가
두 다리로 직접 걷고 두 눈으로 관찰하며 수집한 일상의 흔적들은 그의 작업과 삶 모두에 튼튼한 기초 체력을 이룬다. 이렇게 서울은 혼돈의 중심이면서 미래에 대해 기대를 품어볼 수 있는 이중적인 곳이다. 작가는 흩어져 있을 땐 연약한 존재들을 한 화면에 불러 모으고 붓질을 통해 연결하는 ‘연대’에서 희망을 꿈꾼다.
빠르게
변하는 도시의 속도만큼 연대하는 방식도 변하고 있다. <꺼지지 않는 불씨>에는 술잔을 부딪히는 두 사람의 손이 만나 하트 모양을 만드는 장면이 있다. 건배를 하며 하트 모양을 만들고, 그 인증샷을 SNS에 올리는 것이 한 때 유행이었다. 개인의 관계가 갈수록 파편화되어
가고 있다고들 하는데, 이전의 연대 방식이 소멸하는 대신 새로운 세대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 그들이 연대하는
또 다른 문화를 만들어낸다. 작가가 자신의 일상에서 가져온 조각들을 화면 안에 기록하는 방식은 SNS라는 공개된 공간에 일상의 소소한 순간을 전시하고 공유하는 문화를 떠올리게 한다. 김정인의 화면에서 회화의 오랜 익숙함과 서울이 품고 있는 작은 희망, 새로운
세대의 감성이 포개어질 때 그가 제안하는 연대의 빛이 번뜩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