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gin Kim, Pixel Memory 2, 2023, oil on canvas, 130.3 x 130.3cm © Jungin Kim

김정인의 픽셀: 정합성의 최대단위, 모호성의 최소단위

전시장에서 처음 마주한 김정인의 〈재조합되는 과정 1〉에서부터 나는 묶인 개처럼 그림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작업실에서 이미 보고 눈에 익었다 믿었는데 아니었다. 그날 내가 찍은 작품 사진들은 보통 회화 한점 당 평균 3장씩이다. 〈재조합되는 과정 1〉을 바라보며 왼편, 중앙, 오른편에서 촬영 버튼을 누른 이래 거의 모든 그림 앞에서 서성임이 적용됐다. 관람을 자유롭다 여기는 것도 오인에 가깝곤 하다. 나는 그의 포석에 노출되어 당겨지는 한편 그의 수를 읽고 퇴각하기의 연속이었다. 

이처럼 김정인의 회화에 매여 감상이 연이어졌다. 같은 층에 전시된 〈재조합되는 과정 3〉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소위 ‘픽셀’ 하나가 확대되어 눈앞에 던져졌고 〈재조합되는 과정 4〉에서는 픽셀들에 플래시가 크게 한방 터트려진 듯하게 보였다. 〈기억을 모으는 일〉의 이미지 전체에 힘을 미치는 분절되어 재조합된 나무, 그리고 〈선명해지는 기억 2〉에서는 누그러져 픽셀 안으로 조각나 안착한 나무를 보며 이 한 층의 전시만으로도 충분하다 싶었다. 김정인은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질문에 회화로 답했고 내 과제는 그의 현재 해결책을 곱씹는 일이다. 피로하기도, 어렵기도 하지만 한편 충만하게 고양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기억의 연상과 돌아와 누적된 사진을 훑어보며 《PIXEL MEMORY》의 픽셀(pixel)에 대해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픽셀이 맞나?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픽셀’은 아닌 것 같은데? 사전적 의미에서 픽셀은 텔레비전·컴퓨터 화면의 화상을 구성하는 최소단위를 의미한다. 색 정보를 지닌 최소한의 네모인 픽셀의 조합과 축조로 디지털 세계는 구현된다. 그렇다면 김정인의 픽셀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입방체에 가까운 이 픽셀 이미지들은 이미지 정합성의 측면에서는 최대단위로 작동하고, 이미지 모호성을 위해서는 최소단위로 작동하는 듯하다. 

즉 정합성을 위해서는 픽셀 그 자체가 성글고, 모호성을 위해서는 옹골차게 얽혀 갈등을 조장한다. 회화로 이식된 픽셀은 (이미지) 세계의 최소단위 구성 요소에 자족하지 않고 탈세계에 대해서도 지분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 요구가 일방적이지는 않다. 그 또한 “이해가, 지연이 끝까지 가능할 거라고 생각은 안해요”[1]라고 말했듯, 차단보다는 저지에 가까운 입장이지 않을까.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제가 요즘 관심 있는 게 모호성의 강화거든요.” 그의 말대로 모호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픽셀은 의미의 가중치를 향해 있다면 안된다. 모호성 그 자체가 아닌 모호성의 강화. 그는 의미나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그리는 이가 아닌, 그리기의 태도나 지향에 천착하는 듯하다.


 
이미지 접붙이기

나는 김정인과 회화적 기질에 대해 문답했었고 그때 추출한 몇 개의 단어는 ‘관리’에 대한 ‘제동’, 그럼에도 ‘중앙’과 ‘변두리’에 대한 ‘질서정연’한 시도와 같이 충돌되는 의미들의 ‘접붙이기’였다. 이에 대해 그는 “이미지 접붙이기”라고 표현했다. 이미지 접붙이기라고 할 때, 그 접붙이기는 그에겐 구체이지만 우리에겐 모호할 어떤 장면과 들러붙는다.
어릴 적에 옆집에 철근을 우회하지 않고 이를 감싸고 자라는 나무가 있었어요. 지금은 배었는데 어릴 때부터 20대 초까지 그 나무를 보고 자라서 저는 그게 너무 절박해 보이더라고요. 서로 피해서 자라도 될 건데 서로 다른 이질적인 성질끼리 부둥켜안고 있는 듯한 어떤 이미지로 느껴졌고. 그게 어딘가에 박혀 있다가 이제 뭔가 나무에 계속 저를 투영해보는 단초가 됐던 것 같아요.[2]

접붙이기, 접목(Grafting, 椄木)은 식물재배의 기법으로 식물 일부를 떼어 다른 식물에 붙이는 작업이다. 김정인에게는 나무를 위시해 이미지로 드러나는 많은 요소들의 본딩(bonding) 과정이 된다. 상성이 좋지 않으면 실패할 확률이 높은 목적지향적 재배 기술과는 달리, 김정인의 이미지 접붙이기는 어린 시절의 일화처럼 이질성을 강하게 발휘하면서도 감응을 유발한다. 그 과정에서 기억은 낮은 점성과 높은 굴성으로 작동한다.

그는 그간 차곡차곡 쌓아온 사진 아카이브에 대해 말했다. 그중에서도 누락된 이미지들에 대해 더듬고 있었다. 고의는 아니지만 선택에서 배재되어 온 이미지들의 이유를 자문하는 가운데 완전히 자신으로부터 탈피되지 못한 이미지들과 연루하는 (재)작업을 이전 전시에서부터 시도해왔고 이번 전시에서는 기억의 속성을 배가시켜 전작과의 차별성을 획득하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이미지이지만 이때 이미지는 재현이나 도상 아닌, 심상에 가까워 보인다. “이 친구들도 결국 기억의 어떤 하나의 픽셀 픽셀이거든요. 왜냐하면 장면이나 그런 것들을 연상할 때 뭔가 나름 2D같이 생각을 하지 않고 3D같이 생각을 하더라고요.” 필연적으로 회화가 되었을 때 이차원성으로 귀결되는 회화의 운명일지라도 김정인에게 이를 일으켜 세우는 힘은 기억을 거름으로 한다. 이 과정에서 경계하는 태도는 개발사업자(developer)와 같은 성취다. 그는 《견고하지 않은 땅을 딛고 서기》(2020)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땅의 유동성을 액체적으로 감각하는 가운데 그 방책으로 이미지들의 일시적 연대를 도모해 왔다. 유동적 대지로부터의 존립은 그 유동성을 품고 디딜 때 가능하다. 따라서 이미지 접붙이기의 매질인 기억이 낮은 점성과 높은 굴성을 지녀야 함은 자연스러운 수순이 된다. 이때 기억은 보증 아닌 의심에 치우쳐 사실 아닌 여분의 상상 혹은 환상에 기여한다.


 
입방체: 시각체제의 관습에 저항하는 기준선

김정인의 픽셀은 이처럼 이미지 모호성을 강화하고, 그 픽셀들을 접붙이는 매질은 기억이다. 이때 기억은 순도를 거역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음은 주지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남은 질문이 있다. 왜 픽셀은 입방체인가? 기억의 (재)구성이 삼차원성을 지닌다고 하더라도 이 지점은 회상에서 비롯한 사고와 개념의 범주에서 벌어지는 일인데 회화에서 보이는 입방체라는 구체성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런 고민을 하며 〈PIXEL MEMORY 1〉과 〈PIXEL MEMORY 2〉를 맨눈으로, 또 놓인 망원경으로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부터는 감상이자 가정일 수 있다. 이 작품들에 드리워진 차양과 같은 반투명의 가림막-유래는 비닐이라고 했으나 이미지의 원출처가 중요해 보이지는 않는다-이 회화에 미치는 영향을 숙고했다. 안내에 따라 망원경을 사용해서 회화를 바라볼 때 조장되는 감상의 관습을 복기하게 됐다. 

망원경을 사용할 때 망막은 장막을 피해 픽셀을 더듬게 되었는데 이 상황에서 망원경은 회화를 보게 하면서도 다시, 보기의 일반적 관습을 확대하는 장치로써도 기능하고 있다는 점을 뒤늦게 깨달았다. 즉 내겐 반성을 위한 장치가 됐다. 가림막으로 보이는 물체를 치워가며 그 안의 회화를 감상한다는 것은 회화를 회화 그 총체(들)로 간주하지 않고 대상과 배경 혹은 대상과 장애물을 분별해 내려는 시각체제의 고질적인 습속 아닌가. 보기의 관습을 내려놓지 않는 이상 기억의 픽셀이 입방체 아닌 그 어떤 모듈이라고 하더라도 김정인의 시도로부터 미끄러져 내릴 수밖에 없다.

내 가정이 이럴 때, 김정인과의 유대를 살피기 위해 그가 기획팀이자 작가로 참여한 《cut! cut! cut!》(2020)으로 거슬러 올라서 그의 입장을 참조해 본다. “나는 프레임을 물리적 외곽으로만 보지 않고 수축 이완하는 나의 기준으로 본다.”[3] 이때 프레임은 전통적인 회화 지지체인 캔버스 프레임을 상회한 의미를 갖는다. 공간, 웹, 지면을 겹쳐 이어가며 진행된 이 전시에서 그는 오프라인에서의 회화, 드로잉 혹은 지면, 온라인의 웹을 망라하는 이미지들에서 ‘튕긴 이미지(Bouncing image)’들에 대한 “방생”-그는 이 과업의 현시를 “팝업창”에 비유했는데-을 시도했다. 이 과정은 비평가 황재민의 “물질성이 중요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걸 휘발하기로 한 역설적인 선택”[4]이라는 지적처럼, 방생이 ‘기획’이 되고 프레임의 제약이 “기준선” 재구축의 계기로 전이된 것이다.

아무리 회화가 플랫하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미세한 깊이와 질감이 있기 때문에 휘발을 감수하고 거리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각자 모험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5]

그렇기 때문에 《PIXEL MEMORY》에서의 입방체 픽셀 구성은 현재 전략적인 ‘기준선’ 설정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휘발을 감수하고 거리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일련의 시도를 나는 맨눈과 망원경 사이의 감각 격차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내게 입방체 픽셀은 모험을 위한 전진 기지로 다가왔다.
 


역전의 시시각각

김정인은 “권력이 나를 완벽히 이해하게 되면 그게 이제 관리의 시작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그럼 나는 권력을 역으로 교란하겠다”는 마음으로 회화에 임했다고 한다. 픽셀은 기준선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 저지선을 구축하기도 한다. 그리기 관습에 대한 저지선, 구성의 안정성에 대한 저지선, 형상이 이해로 전환되는 것에 대한 저지선, 무엇보다 매끈한 회화로의 봉합에 대한 저지선. 그는 작가가 흔히 범하는 관념적, 심리적 저항선에 충족하지 않고 회화에서 구동되는 자기 답습을 벗어나기 위한 운신을 시시각각 펼쳐가고 있다. 그의 회화는 캔버스 지지체의 면 확장을 감행하지 않는다. 그보다 그 앞과 뒤로, “미세한 깊이와 질감”을 찾아 나서면서도 망막의 촉각을 자극하기에 그치지 않기 위해 애쓴다. 이번 전시의 작가노트에도 반영된 그의 입장, “비-가시적인 권력에 점유되지 않고, 탈-종속적 태도로써 본연의 자아 사수”[6]는 ‘모호성의 강화’와 마찬가지로 ‘지연’을 의욕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과업이다. 강화나 지연은 결과가 아닌 상태가 목적이다. 그렇다면 회화는? 회화도 결과 아닌 상태일 뿐이라고 하기에는 작가 존재가 지나치게 흐려지고 말 우려가 있다. 상태 변주가 회화의 기저이지만 이로부터 레이어가 쌓이는 회화(들)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많은 유화 중 단 한점의 수채화 작품인 〈나무〉에는 픽셀, 입방체, 프레임이 거두어져 있다. 다만 빛의 파상은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반영되어 나뭇가지를 산란해 놓고 있다. “큰 빛을 위해 자그마한 빛들을 던진다”는 생각에서 비롯하는 이 깜빡거림은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어진 대상물 재현과 거리가 있다. 위용 있는 (것처럼 보이는) 회화를 완수하기가 (더) 쉬울 수 있는 선택지를 누락시키고선 주관식으로 풀어가는 회화라는 문제. 흔히 –1, 0, +1이 답이라고 여기는 해답 있는 세계에 대한 못마땅함. 거기서부터 김정인을 유추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아주 오래 안토니오 그람시의 ‘이성으로 비관해도 의지로 낙관하자’는 구절을 마음에 품어 왔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적어도 김정인의 회화 세계에서는 이성과 의지, 비관과 낙관은 그의 기억의 구현물처럼 뒤섞여 가능한 세계를 모험처럼 ‘감행’해 간다. 나는 앞서, 묶인 개처럼 그림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고, 격하게 표현했는데 이 말은 구속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지선이 기준선이 되기도 하는 세계에 대한 인정을 의미한다. 내가 그렇듯, 그에게도 오늘의 안부와 질문거리들을 챙겨본다.
 


[1] 2023년 9월 28일 김정인과의 대화에서 발췌함. 이하 큰따옴표로 처리된 인용은 김정인의 말임을 밝힌다.
[2] Ibid.‘
[3] 《cut! cut! cut!》(2020) 도록 중 작가노트에서 발췌함, p. 44.
[4] 《cut! cut! cut!》(2020) 도록에 수록된 비평가 황재민과 기획팀 김정인, 이은지, 황원해의 인터뷰 중 황재민의 발언임. p. 73.
[5] 《cut! cut! cut!》도록 중 김정인의 발언임. 위의 쪽. 거리적 한계에 대해 부가하자면 2020년 제주 새탕라움에서 전시가 진행되다보니 현실적으로 찾아오기 어려운 관객을 위해 웹과 지면을 이용해서 이 한계를 극복하려는 모험을 시도했다.
[6] 《PIXEL MEMORY》 작가노트에서 발췌함.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