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ve box》 전시 전경(얼터사이드, 2024) ©얼터사이드

“어느 날 밤에, 그냥 누워 있었는데.”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침대 다리 하나가 무너지면서 바닥으로 떨어졌어.
안락하지 않아도 잠들 수 있을 만큼 졸린 상태가 아니어서 화를 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왜 무너지지 않은 온전한 침대여야 할까?
나는 누운 채로 바로 잠들었어…….” 1

 
죽은 것을 만질 때면, 거의 만지는 듯이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면, 무언가 죽음에서 풀려나와 살아 있는 것과 동등한 감각을 겉면에 드러내 기 시작한다. 죽은 것은 죽어 있는 채로 일종의 추함의 상태를 유지하고 서, 그리고 추함을 넘어서서 우리의 몸과 나란히 존재하게 되고, 그러한 순간에 우리는 인식의 잠이라는 불가피한 휴지기에 빠져들게 된다. 세계 를 이루고 있는 사물들은 대부분 죽어 있고, 죽어 가고 있고, 그것들의 결 속으로부터 도망친다는 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기에 최종적인 질문은 죽 음이 아니라 생이 있는 곳을 향해 던져진다. “왜 우리는 온전해야 할까?” 그렇게 마취된 정신은, 또한 그와 함께 억제되어 사물화된 몸은 살아 있는 것과 죽어 있는 것의 사이에 틈입하면서 죽음이라는 비가역적인 사건만큼 이나 되돌릴 수 없는 물질과 생명의 충돌을 경험한다.

장영해의 개인전 《Glove box》(2024)에서 관람자가 보게 되는 것은 부서지거나 무너지는 와중에 포착된 신체와 물건, 그리고 풍경의 잔상으 로서 작품들이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본래의 형태나 상황을 눈앞에 그려 보는 일은 마치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진다. 그러한 까닭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작용들이, 이미 일어나 버린 행위들이 작품을 에워싸고 시야를 압도하기 때문인데, 이는 원인 불명으로 훼손된 신체나 물체를 망연히 바라볼 때 겪게 되는 일과 비슷하다.

고양이의 형상은 속수무책으로 녹아 내리고 있는 모습이고(〈cat〉) 현실의 벌레는 3D 렌더링 이미지로 열화되었다가 되살아나기를 반복한다(〈insect looping video〉). 이종 교배적인 몸짓으로 서로를 향해 포개지고 있는 패딩점퍼와 공업생산물의 아상블라주(〈무제〉),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 수 없이 가공 처리되어 희뿌연 안개가 덮여 있는 듯한 흑백 사진(〈135/85mmHg〉), 몸의 분비물과 혈액을 표면에 재현하여 하얀 비곗덩어리를 떠올리게 하는 둔중한 석고 조각물(〈무제*2〉)을 연속적으로 감상하다 보면 앞서 제기된 질문이 다음과 같이 변주되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우리는 과연 온전할까?”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 1S34008AP, F010122011964, .04. 0*8. 5mm〉와 같은 영상에서는 죽은 몸이, 혹은 그렇다고 가정된 비가시적인 존재가 스크린 밖 카메라의 몸체를 통해 시점의 주체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심폐소생술의 긴박하고도 무자비한 움직임과 화장된 유골을 쓸어 담는 조심스럽지만 일상적인 동작이 교차되어 전개되는 이 영상에서는 비신체로서 유해에 남겨져 있는 티타늄 치아의 행적을 되짚어가듯 수술 당시의 광경을 복기하는 가운데 구강에 가득 한 붉은 피를 숨기지 않고 보여준다.

관람자는 마취된 대상으로서, 죽음의 당사자로서, 그리고 생사의 가능성이 겹쳐 있는 쓰러진 인물의 관점에서 영상에 접속하게 됨으로써 상처 입지 않은 자신의 피부를, 피부 속 보이지 않는 붉은색의 심연을 이상하리만치 낯설게 살펴보게 된다. 《Glove box》의 작품들은 생명의 가장자리를 다루는 한편 숨 쉬는 법보다 숨을 멈추는 법을 가르쳐준다는 점에서 전시장을 배회하는 신체들을 무기체 사이에 끼어든 이질적인 침입자로 호명한다. 그러나 언제나 몸을 강탈당하는 쪽은 작품이 아니라 관객이며 정신을 차리게 되는 순간은 자신이 잠시 마취되었음을 깨닫게 된 이후이다.

가장 긴 타임라인으로 구성된 영상 〈ray〉는 술에 취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한 편의 내밀한 소동극을 다루며 욕망이라는 주제를 차가운 X선 이미지로 벼려낸다. 누군가는 정신을 붙들고 다분히 현실적인 문제에 골몰하는 동안 어떤 이는 명료한 의식을 내려놓고 쏟아지는 말들에 몸을 맡기면서 욕망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벗겨낸다. 욕망은 이미 드러나 있고, 현실을 우회하고 있고, 운행 중인 전차와 같이 무의식이 다져 놓은 길을 멈출 수 없이 내달린다. 본능적이고 성애적인 신호들은 은밀하게 전달되거나 한없이 지연되지만 X선은 인물의 대사와 시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마음의 실체를 잡아낸다. X선은 마음을 결코 촬영할 수 없고 최소한의 흔적조차 붙잡을 수 없음에도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나타낼 수 있는 최대한의 기표임이 밝혀진다. 해석의 문제를 초과하여 X선은 인간을 투과하고 이해할 수 없는 구조물의 내부를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처리한다.

마취되었던 시간은 기억나지 않더라도 분명하게 실재한다.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느낌, 그 느낌만은 지울 수 없이 과거와 미래의 틈 어딘가에 새겨져 남아 있다. 전시의 제목과 동명의 설치물인 〈glove box〉를 볼 때 관람자는 인큐베이터 속의 시간과 바깥의 시간 둘 중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상자의 무너진 바닥 면을 다만 응시하게 된다.〈colleague〉 를 쳐다보고 있으면 그것이 머릿속의 장면을 환기하는지 아직 만나본 적 없는 의사들의 초상에 불과한 것인지 필름지의 구겨진 주름과 함께 판단은 분열된다. 장영해는 현장을 집도하는 의사로서 경계를 지닌 여러 개념들을 수술대 위에 올려 두고 관람자가 마취된 시간 한복판을 의심스럽게 배회하도록 한다.

우리의 “온전함”에 대한 해소되지 않는 의문을 품고서 전시장을 나설 때면 한 영상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심장을 마사지하는 소리를 서서히 그리고 다시금 뚜렷하게 인식하게 된다. 전시 공간 전체에 가해지는 과중한 압력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하다 보면 삶의 토대는 더욱더 조그만 구멍으로 수축될 뿐이지만 그것이 유일한 삶의 형태임을 자각한다면 무너진 것 위에서도 우리는 잠에 들 수 있다.
 
1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야생의 심장 가까이』, 을유문화사, 민승남 옮김, 2022.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