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ve box》 전시 전경(얼터사이드, 2024) ©얼터사이드

치과에서 사랑니를 뽑는다. 통각만이 차단된 상태로 입 안 발치 도구에 집힌 생니가 완강해, 함께 당겨지는 두개골의 질량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신경정신과에서 정신 위생을 위한 약을 처방받는다. 복용을 기점으로 갈리는 두 ‘나’는 서로를 근본적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면서 교대로 죽었다가 살아나기를 거듭한다. 치명적인 감염성 질환으로 집에 갇힌다. 사적인 공간이 공적인 의료망에 예속된 격리소와 중첩되고, 모두는 ‘나’의 침대가 병원의 침대와 구분되지 않는, 때로는 관과도 구분되지 않는 몇 년을 보내야만 한다.

장영해는 ‘나’라는 믿음과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는’ 지각 사이에서 우리를 진동시키는 접촉에 관한 작업들을 전개해왔다. 지난 개인전이 섹슈얼리티의 관습이나 규칙에 따른 강박적 리듬과 그로 인한 감정적 운동성에 주목했다면, 이번 두 번째 개인전은 그런 운동성의 차원이 언제나 수반하는 모종의 매개를 전경화한다. 그 매개와 그로써 수행되는 사물화/대상화의 메타포로 동원되는 것은 격리체를 통제할 수 있도록 장갑을 내장한 컨테이너인 ‘글러브 박스(glove box)’의 시각성과 그것이 함축하는 의학적 통제의 손길이다.

글러브 박스로 도해될 수 있는 편집증적 관측 구조, 그리고 통제자와 통제 대상의 불가피한 위계 하에서, 증상은 인위적으로 억제되고 필요하다면 환부가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며 경우에 따라서는 몸의 연명 자체가 중단되기도 한다. 그것은 의학적 통제가 삶이라는 명목으로 몸의 여러 층위에 편재시키는 크고 작은 죽음들이다. 그 죽음들은 우리가 자신의 몸을 즉물적으로 ‘나’와 동일시할 수 없다는 새삼스러운 진실의 가장 일상화된 예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장영해는 그렇게 속절없이 외부를 향해 열린 몸에 대한 기탈(excription)로써 비로소 주체가 가능해진다는 식의 지나치게 산뜻한 아이러니는 일단 뒤로 물린 채, 대신 ‘나’의 일부인 몸이 ‘임상’이라는 직능적 차원에 물질적 대상으로 포섭되었을 때의 감각을 담담히 형상화함으로써 거기서 불거지는 모든 의미의 죽음들을 기리고자 한다.

통제의 이물적 감각이 ‘나’를 깎아내고 들어내며 발생한 찌꺼기가 압착되거나 재단된 듯한 부동의 덩어리들이 있다. 거기에 가해지는 객관성의 하중과 날카로움이, CPR 카운트의 장황한 헐떡임으로, 그리고 관객과 등장인물을 동시에 소격시키듯 스크린을 가로지르는 X선 투과 이미지의 냉담함으로 계속 더해지는 것만 같다.

여기서 관객과 전시 사이에 성립하는 항등식은 관객의 몸 안에 유폐된 죽음들을 향해서도 열려 있는데, 이곳에 기립해 있고 상영되고 있는 것은 마치 단상처럼 ‘나’를 떠받치고 있으면서도 ‘나’와 격절되는 몸체(corpus)들이며, 그 몸체들이란 의학적 통제 하의 우리 몸뚱이이자 그로써 매개되는 경험 속에서 튀겨지거나 쪼그라들었던 순간적 감각의 시체들이기도 하다. 병원만큼이나 표백된 공간인 화이트큐브에서, 관객들이 그 시체들의 사인을 각자의 방식으로 진단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어떤 곳에서 진단은 애도와 구분되지 않는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