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평의 작업을 처음 마주하면, 마치 연극
무대 배경처럼 ‘그저 배경의 일부’로 치부하기 쉬운 사물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류학자 알프레드 겔(Alfred Gell)이 말한 것처럼, 이 예술 오브제들에 ‘행위주체성’이 깃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이
세상에 결과와 영향을 만들어내는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듯, 김지평의 오브제들 역시 그런 자율성을 띤다.
이렇게 김지평의 설치 작업 속으로 들어서면, 한국 전통 예술의 재료를 다듬는
작가의 손끝에서 태어난 물질들이 우리의 주체성을 다른 차원의 세계와 대면하게 이끈다. 이 글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말한 ‘세계-짓기’ 개념, 즉 세계가 ‘사물-짓기’를 통해 존재하게 된다는 사유로 《올해의 작가상 2025》 출품작들을 함께 둘러보는 여정이다.
병풍에 펼쳐진 윤회의 여러 풍경
병풍은 한국의 장식 미술과 순수 미술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왕실과 양반가를 꾸미는
오브제로 존재해왔다. 병풍은 주로 방 뒤편에 놓였고, ‘병풍 같다’는 말은 눈에 띄지 않고 특별한 영향력이 없는 사물을 가리키는 은유로 쓰이기도 한다. 한국의
종교 및 문화 의례와 전통은 자생적 요소들로만 이뤄지지 않았고, 특히 아시아의 식민 공동체들과 이뤄진 접촉을
통해 전개된 다양한 교류의 혼합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일상 공간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만들어진 사물들로부터 진화하는 전통의 형식들을 볼 수 있다.
병풍에 그려진 풍경들 사이에도
이런 맥락이 흐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인 〈해학반도도海鶴蟠桃圖〉(1902)는
가장 자주 언급되는 사례로, 원래 미국 호놀룰루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었다. 이
병풍에서는 구름과 하늘이 마치 벽지의 무늬처럼 경계 없이 이어지고, 화려한 금박이 여백을 표현하며, 학과 복숭아가 자연 세계의 풍요와 평온함을 드러내듯 화면에 스며든다.
이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진 병풍들은 동아시아 각지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며, 그 ‘기원’이나 출처, 어떤 국가의 틀에 속하는지를 다루는 역사화 과정에서는 종종 논쟁이 벌어진다. 이들은
각국의 양식과 정체성을 입증하는 지표로 활용되고, 동아시아 전역에서 이뤄진 선물 교환 문화나 외교적 양식
변화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김지평은 이른바 “자기반성의 장르”라 불리는 동양화와 수묵화를 배웠음에도 이러한 형식을,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찬양하는
지표로만 여기지 않는다.
〈산수화첩〉(2023–2025) 연작에서 그림책을
디오라마로 변형하거나 〈다성多聲 코러스〉(2023–2025) 연작에서 옛 병풍을 업사이클링해 한국의 일상적
민담과 삶에서 가져온 원형적 인물들로 새롭게 채워 넣는 방식은 앞서 언급한 국가 소장품들의 장엄한 거리감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김지평의 병풍은 오히려 집안을 꾸미는 일상의 미학을 담으면서도, 물질적 형태
그 자체로 살아있는 행위자가 되어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연다. 작가가 직접 수집하고 콜라주한 재료를 공예적으로
결합해 태어난 이 오브제들은 병풍 각각에 부여된 원형을 통해 다른 존재들을 가리키며, 애니미즘적 성격을 띤다. 이들은 이제 이상화된 자연의 투영으로 관객과 거리를 두지 않고, 한국의 일상에서
마주칠 법한 인물들과의 만남 안에서 존재한다.
병풍의 용도는 기능보다 미학적인 것이었지만, 보통
옷을 갈아입을 때 시선을 가리는 용도로 활용되는 등 개방된 실내 공간에서 분할이라는 환영을 만들어내는 오브제로도 쓰였다. 병풍의 매력은 시야를 가리는 도구로서 지닌 모호함에서 비롯되기도 하는데, 이는
병풍이 은밀히 훔쳐보는데 쓰이는 낭만적 도구가 될 수도 있음을 뜻한다. 김지평의 작업에서 병풍은 또 다른
종류의 모호함을 체현하는 장치가 되어, 무당, 아줌마, 디바, 군인, 샐러리맨, 록스타 등 다양한 한국적 인물의 원형을 재현한다.
작가가 수집해 조합한 갖가지
문양과 의복의 표식들은 병풍 위에 마치 피부나 옷처럼 얹혀 이들을 드러낸다. 김지평의 병풍은 남녀가 밀고
당기는 유희의 도구가 아니라, 한국에서의 삶이 지닌 사회적·시각적 풍경을
구성하는 다양한 인물들을 대신하는 애니미즘적 존재로 기능한다. 이 병풍들은 우리의 단일한 경험을 넘어서는
위치와 세계로 향하는 통로이자 연결점으로, 한국의 삶에서 겪는 다양한 국면을, 말하자면
불교에서 말하는 삶과 죽음의 순환, 즉 윤회를 보여준다.
이처럼 도상적 원형들을 통해 이뤄지는 만남은 이 오브제들을 마치 사람인 듯 대하며
맺는 애니미즘적 ‘만남주의’의 형태다. 이
병풍들을 통해, 또한 이들이 우리의 마음을 넘어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매개라고 여김으로써, 전통적 병풍화는 전복되고 만다. 유럽 계몽주의 사유에서 만남의 변증법은 ‘자아’와 ‘타자’라는 환영적이고 이념적인 분리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불교적 틀에서는 이런 구분이
무너진다. 깨달음의 역할에 대한 고유의 믿음이 존재하는 불교에서는 자아가 아닌
‘무아無我’만 존재할 뿐이다. 더 나아가, 미술사학자 로저 넬슨(Roger Nelson)은
‘만남주의’를 자아와 타자의 위계적이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구분을 전제하는 원시주의와 ‘대조되는’ 상호작용으로 설명한다. 이는
차이를 마주했을 때 소외나 거리가 발생한다는 통념과는 차이가 있다. 김지평의 병풍 속 다양한 인물군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을 아름답게 만들어냄으로써, 접근하기 어려운 장엄함이 아닌 일상으로부터 차이에 대한 호기심을 자아낸다.
애니미즘의 핵심은 사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이다. 애니미즘은 살아있음의 가능성을 단지 감각을 지닌 존재로만 한정하지 않는다. 여기서
예술가의 손은 병풍 가운데 한 폭에 등장하는 무당의 기능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는데, 무당은 비인간적이고
심지어 인간을 넘어서는 물질들에서 나타나는 존재들과의 만남을 매개하는 중개자다. 다양한 천 조각을 이어 붙여
만든 이 병풍들은 관습적으로 무생물로 여기는 대상으로부터 인간의 주체성을 인식하게 한다. 한국 문화에서 무당이라는
역할은 근대화와 함께 유입된 여러 종교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며 역사적으로 논란이 되어왔다.
그러나 한국의
샤머니즘과 애니미즘은 가정이라는 영역이 영혼과 조상들이 머물며 돌봄을 요하는 곳으로, 영적으로 특히 충만한
공간이라고 여겨왔다. 무당은 또한 불운과 나쁜 혼령들을 막는 보호자로서의 역할도 한다. 애니미즘은 현대 한국에서 널리 퍼진 주요 일신교들과 달리 아시아 문화권에서 흔히 나타나는 혼합주의적 형태를 고유하게
보여주며, 다양한 문화적 교류의 통로가 되고, 어쩌면 시대를 앞선 원초적
세계주의의 형태를 제시한다고도 할 수 있다. 무당이 다른 차원을 오가는 능력은 은유적 차원에서 볼 때 인간을
넘어선 행성적 스케일을 넘나드는 사물과 예술작품의 이동과 닮았다.
무당과 예술가 사이의 또 다른 유사점은 예술가가 관객과 재료를 다른 차원으로
이동시키는 능력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의 손은 단순히 무언가를 창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특정한 시간과 장소의 흔적을 함께 새겨 넣는다. 미술사학자 파멜라 코리(Pamela Corey)는 공예와 개념주의의 관계를 ‘민족적 정체성을 지닌 촉각적
제스처’로 설명하면서, 재현의 증거가 이처럼 손으로 이뤄진 노동의 창조
과정을 통해 드러나며 “자신이 지닌 사물성의 본질을 수행적으로 선언한다”라고
말한다. 수묵의 전통, 특히 병풍화를 살펴보면 전통 공예 문화에서 병풍이
지닌 다양하고 혼종적인 경향은 익숙한 인물들을 가리키면서 지역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전통적·민족주의적 틀을
넘어설 수 있는 상징적 지위를 획득한다.
세상의 무게를 짊어지다
김지평의 신작 〈코즈믹 터틀〉(2025)은 ‘인간 너머의 존재’ 혹은 ‘다중자연주의’라 불리는 것, 다시 말해 인간 의식을 예외적인 것으로 두지 않고 다양한 종들
간 상호의존의 역량 속에서 인식론이 어떻게 자리하는지를 탐구하는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작품 제목은 거북이가
등껍질에 온 세상을 짊어진다는 익숙한 신화를 참조한다. 이는 전체 지식 체계에 대한 은유로 읽힐 수 있으며, 영어 격언 ‘어깨에 세상의 무게를 짊어지다’처럼
짐을 짊어진다는 의미로도 해석 가능하다. 이는 올림포스 신들에 반기를 든 대가로 땅을 등에 짊어져야 했던
그리스 신화 속 아틀라스를 떠올리게 한다.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라는 개념은 대개
토끼와 거북이 우화에 등장하는 거북이의 특성과 연결된다. 거북이는 신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식과 전략을
이용해 성취를 이루는 끈기 있고 한결같은 동물로 나타난다. 이는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문화뿐 아니라 태평양 지역 등 여러 문화권에서 거북이를 상징으로 삼는 수많은 참조망을 이룬다. 이와 동시에 김지평은 〈코즈믹 터틀〉을 여러 조각의 목판화로 분절해 설치가 놓인 전시 공간에 흩뿌린다. 조각적이면서도 은유적인 이 존재는 작가가 상상하는 ‘세계 속의 세계들’과 혼합주의, 인간 너머의 세계와의 만남을 암시한다.
김지평의 〈코즈믹 터틀〉은 인쇄 기술을 암시함으로써 세계 안에서 개념이 어떻게
이동하는지, 지식이 나무와 종이의 접촉 과정을 통해 어떻게 문자 그대로 각인되는지를 떠올리게 한다. 최초의 인쇄본은 닥나무로 만든 한국 전통 제지 기법을 특징으로 했는데, 이는
훗날 병풍에 그림과 도판을 담는 데 사용된 재료이기도 했다. 세계는, 학자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이 ‘인쇄 자본주의’라 부른 것의 확산, 즉 저렴한 종이와 목판 인쇄라는 기계적 복제로 구현된 인쇄물을
통한 언어 유통이 자아낸 공통의 이해 속에서, ‘상상의 공동체’로 결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혁신 덕분에 메시지를 멀리, 널리 전파할 수 있는
속도로 텍스트 생산이 가능해졌다. 1440년경 유럽 전역에 성경을 전파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고 종종 세계
최초의 인쇄본으로 잘못 알려진 구텐베르크 인쇄물이 등장하기 200년 전인
1234년, 고려에는 이미 현지에서 잘 알려진 인쇄술이 존재했다. 최초의
인쇄본은 유교 경전이었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은 684년에서 704년 사이 제작된 불교 경전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으로 1966년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되었다. 또 다른 불교 경전인 『금강경金剛經』(868)은
경전 마지막에 ‘널리 배포하라’는 표현이 있어 사실상 저작권 없이 자유롭게
제작된 최초의 책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봉헌물로서의 예술작품
‘다성多聲 코러스’ 연작의 한국적 원형들과
〈코즈믹 터틀〉의 목판 조각들로 이뤄진 설치에서, 김지평 작업 속의 연결망을 일종의 응축된 생활 공간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작품들은 생명을 얻어 움직일 잠재력을 품고, 관객이
작품을 바라보는 동시에 작품도 관객을 응시한다. 집이라는 공간에서 영혼들은 관심과 돌봄을 필요로 하고, 그들을 살려두기 위해 정성껏 올리는 봉헌물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김지평은 한국
문화 전통를 다루는 폭넓은 수련을 통해 궁중적이고 장인적인 예술 전통에 깊이 발을 딛고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신화적인 것을 다룰 때조차 근면과 겸손을 기리며 땅 위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에 대한 경의를 담아낸다. 거북이, 병사, 디바-할머니, 무당, 외로운 샐러리맨 등은 역사의 중심적 인물이라기보다 묵묵히 세상을 짊어지고
살아가며 그 안에서 세계를 만들어가는 존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