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음악 작곡가 조태복(GRAYCODE, b. 1984)과 정진희(jiiiiin, b. 1988)로 구성된 아티스트 듀오 그레이코드, 지인은 컴퓨터를 이용한 사운드 작업을 기반으로 다른 장르의 예술과 상호 작용하는 사운드-미디어 작품을 제작해 왔다.
 
이들은 소리를 단순히 재현의 수단이 아닌 존재와 시간, 감각이 구성되는 현상으로 다룬다. 주요한 작업의 재료인 스피커와 하드웨어 시스템은 단순한 음향 장치가 아닌 공간의 여러 감각적 요소들과 공명한다. 그레이코드, 지인의 작업은 청취의 방식을 몸을 통한 다감각적이고 시공간적인 경험으로 이끈다.


그레이코드, 지인, 〈#include red〉, 2016, 오디오-비주얼, 《#include red》 전시 전경(인천아트플랫폼, 2016) ©그레이코드, 지인

그레이코드, 지인은 2016년 인천아트플랫폼에서의 공동작업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프로젝트를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제작한 첫 번째 공동작업인 〈#include red〉(2016)는 “빨간색은 무슨 소리일까?”라는 호기심에서 출발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파장인 가시광선은 일정한 색상과 고유의 주파수를 지닌다. 그 중에서 빨강색은 가시광선 중 가장 낮은 주파수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소리의 파장으로 변환하면 20헤르츠(Hz) 정도에 해당된다.


그레이코드, 지인, 〈#include red〉, 2016, 오디오-비주얼, 《#include red》 전시 전경(인천아트플랫폼, 2016) ©그레이코드, 지인

그레이코드, 지인은 마치 건축도면과 같은 알고리즘 구조의 정확한 데이터와 숫자, 코드를 통해 빨강색을 영상과 사운드로 프로그래밍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include red〉는 정확한 데이터로 프로그래밍된 사운드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전시장에서 이를 대면하는 순간, 관객은 색채가 주는 강렬함과 소리가 주는 긴장감을 먼저 보고 듣게 된다.
 
빨강색과 그 색채가 가진 주파수에 해당하는 사운드가 결합된 작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두 가지 감각의 구조적 혼합, 즉 공감각적인 영역으로 이끈다. 나아가 작품은 관객의 동선에 따른 소리의 배치와 공간성을 고려한 사운드로 이루어져 있어, 매번 새로운 감각적 순간들을 만들어 낸다.


그레이코드, 지인, 〈+3×10^8m/s, beyond the light velocity〉, 2017-2018, 오디오-비주얼 고정형 미디어, 8분 3초 ©그레이코드, 지인

이후 발표한 오디오-비주얼 작업 〈+3×10^8m/s, beyond the light velocity〉(2017-2018)는 현존하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빛의 속도 그 너머에 존재할 우주적 현상을 상상하며 제작되었다. 작품의 제목인 ‘+3×10^8m/s’는 진공상태에서 빛이 가지는 속도를 의미하며, 이는 우주의 모든 에너지와 물질이 가질 수 있는 속도의 최댓값이다.
 
이 작업에서 그레이코드, 지인은 매질을 타고 흐르는 비사기적 파장이 신체에 닿으며 확장되는 다층적 감각을 탐구하며, 시각적 운동성을 지닌 영상과 다양한 방향에서 오는 소리들을 통해 팽창하는 우주의 감각을 전달하고자 했다.


《10^-33cm》 전시 전경(독일 한국문화원 갤러리 담담, 2019) ©그레이코드, 지인

한편, 2019년 독일 베를린 한국문화원 갤러리 담담에서 열린 개인전 《10^-33cm》에서는 거시적 우주에서 미시적 세계로 향하는 여정에 관한 프로젝트를 소개했다. 그레이코드, 지인은 이전에 감지하지 못했던 가장 작고, 깊고, 끝없는 시공간의 순간을 듣고자, 상상 가능한 가장 작은 공간인 플랑크 길이(약 10^-33cm) 속에 존재하는 소리를 만들었다.

《10^-33cm》 전시 전경(독일 한국문화원 갤러리 담담, 2019) ©그레이코드, 지인

이들은 가청 주파수 전체 스펙트럼과 함께 23.999Hz 및 0Hz라는 두 개의 비가청 소리를 사용하여 다양한 사운드를 레이어링하면서 총 11개의 사운드 트랙을 제작했다. 트랙 1부터 9까지 사운드는 점차 분절되고 복잡해지며 지면 아래로 가라앉는 듯한 감각을 자아낸다. 예기치 않게 압축된 트랙 10에서는 새로운 차원에 진입하는 듯한 느낌을 유발하고, 마지막 트랙 11에서는 내면의 시각을 자극한다.
 
이러한 사운드는 시간과 공간의 틈 사이로 깊숙이 침투하며, 중력이 사라진 또 다른 세계, 즉 미시 세계에 도달한다. 양지윤 큐레이터는 이에 대해 “보이는 것의 끝과 안보이는 것의 끝, 들리는 것의 끝과 안 들리는 것의 끝에 관해 시청각적 경험의 자리를 마련한다”고 평한다.


《Time In Ignorance, ∆T≤720》 전시 전경(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2020)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이듬해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에서 열린 개인전 《Time In Ignorance, ∆T≤720》은 한 달이라는 전시 기간을 시간 기반의 매체인 사운드 아트로 치환해 보는 프로젝트였다. 이들은 “우리가 감각할 수 없는 방대한 미지의 시간이 실제 경험이 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바탕으로, 총 720시간이라는 전시 기간 동안 시간의 불확실성을 사운드로 계량화하여 우리의 가시성 너머에 존재하는 시간들을 감각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동적 시스템 수학 모델을 기반으로 발생시킨 소리의 변화는 시간의 흐름을 인식시키고, 공명하는 공간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감각의 차원을 제시한다. 이때 시간의 변화를 매개로 하는 소리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이동과 변형을 뜻하며, 동시에 시각적 정보로도 존재한다.

《Time In Ignorance, ∆T≤720》 전시 전경(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2020) ©그레이코드, 지인

이 작품은 비평형에서 평형으로 이행하는 과정 안에 위치한다. 오프닝 퍼포먼스를 통해 생성된 '카오플렉서티(chaoplexity)'의 혼돈 상태는, 비평형의 최초 순간을 제시한다. 자연 속에서 비평형은 차이를 유도하는 절대 조건으로 작용한다.
 
전시 기간 동안 사운드 작업은 이러한 상태로부터 이탈하는 움직임을 생성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자발적인 변화는 언제나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며, 이 시간 기반 사운드 작업과 함께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의문 또한 계속해서 이어진다.


《Data Composition》 전시 전경(세종문화회관 미술관, 2021) ©그레이코드, 지인

한편, 2021년에 개최했던 개인전 《Data Composition》에서 그레이코드, 지인은 데이터를 시간으로 보고, 이를 수집해 사운드로 제작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총 3부작으로 구성된 프로젝트는 A. 데이터를 모으는 웹사이트(Data Composition – ), B. 세종문화회관 전시장에서의 50일간의 전시, C. 작곡된 사운드 작품(Data Composition)으로 이루어진다.


《Data Composition》 전시 전경(세종문화회관 미술관, 2021) ©그레이코드, 지인

 이 프로젝트는 전시를 진행하면서 전시 기간 동안 관람객들의 데이터를 모으는 것으로 시작된다. 도슨트의 안내에 따라 웹사이트에 접속하게 된 관람객은 자신의 IP 주소, 웹사이트에서 머문 섹션과 시간이 수치화되어 저장된다. 전시기간 동안 이렇게 수집된 관객들의 로그 데이터는 전시가 종료된 이후 또 다른 사운드 작품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즉 이 작업은 우리가 인터넷 네트워크에 머문 시간과 그곳에 남긴 정보들을 청각이라는 감각의 형태로 변환시키며, 평소 인지하지 못했던, 눈에 보이지 않았던 데이터화된 현실을 감각하게 한다.


그레이코드, 지인, 〈wave forecast〉, 2022, 야외 설치 퍼포먼스 전경 ©그레이코드, 지인

그레이코드, 지인은 2022년 프로젝트 〈wave forecast〉부터 이전과는 다른 제작 방식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시간이라는 일차원의 축 위에서 무작위로 발생하는 자연의 변화량을 측정하고자 서귀포 법한포구 바닷가에서 만들어지는 데이터를 수집했다.
 
0.05초를 기준으로 삼아 자연이 만들어 내는 진동의 변화를 숫자화된 데이터로 기록하고, 이 변화량 데이터를 아날로그 라디오 주파수 신호로 송출하여 전기 없이도 설치할 수 있게 하였다.

《∆w》 전시 전경(송은, 2023) ©그레이코드, 지인

그리고 이 프로젝트는 2023년 송은에서의 전시 《∆w》로 재구성되었다. 그레이코드, 지인은 제주도 서귀포 바다에서 추적한 다양한 층위의 진동수, 주기, 변화량 등을 활용하여 무작위의 자연을 소리로 모델링했다. 또한 주어진 전시장을 소리와 공명하고 함께 연주하는 공간으로 삼아 자연을 실체적 대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11개월 전 제주도의 자연으로부터 수집한 데이터를 서울에 위치한 전시 공간이 갖는 건축적 특성을 매개로 새로이 재연함으로써, 지금-여기에 실재하지 않는 시공간의 감각들을 관객의 몸을 통해 느낄 수 있게 한다.


그레이코드, 지인, 〈phyper〉, 2024, 《사라졌다 나타나는》 전시 전경(경기도미술관, 2024) ©경기도미술관

그레이코드, 지인은 2024년 작업 〈phyper〉를 통해 이들의 첫 공동 작업인 〈#include red〉에서 실험하였던 빨강색이 가진 진동을 보다 섬세하게 다루어 보고자 했다. 전시 공간에는 150cm 크기의 유리판에 반사되는 빨강색의 빛을 기준으로, 파장이 낮은 빨강부터 긴 빨강까지 각기 다른 채도의 빨강색이 발광한다.
 
음파와 가시광의 서로 다른 진동은 오디오 케이블과 광케이블로 연결되어 있다. 아날로그의 소리 데이터는 다시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되어 광케이블로 출력되고, 그렇게 공간에 퍼지는 낮은 주파수의 소리는 신체에 직접적인 진동으로 다가가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로써 작품은 ‘진동으로서의 빛과 소리, 그리고 신호로서의 빛과 소리가 하나의 단위로 모인 상태’가 된다.


《공기에 관하여》 퍼포먼스 전경(아트선재센터, 2025) ©그레이코드, 지인

이렇듯 그레이코드, 지인은 우리가 속한 세계에 존재하지만 물리적으로 경험하기 어려운 여러 현상과 순간을 소리와 빛의 진동을 매개로 하여 ‘감각 가능한 현실’로 발생시킨다. 이때 청취는 단순한 수용이 아닌 몸의 시간이며, 시간 속에서 존재를 생성하는 경험이 된다.
 
일련의 프로젝트를 통해 이들은 청각을 중심으로 감각의 구조를 재조정하며, 관람객에게 시간적이고 밀착된 청취의 경험을 제안한다. 다층적인 진동 속에서 관람객은 자신의 경계와 존재의 감각을 되새기게 된다.

 ”우리는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것들을 시청각적 심상으로 드러내는 작업을 한다. 그것은 모든 현상을 볼 수 있는 눈을 상상하며 만드는 것이다.”  (그레이코드, 지인, 작가 노트) 


작가 그레이코드, 지인 ©그레이코드, 지인. 사진: 이화림.

그레이코드, 지인은 조태복(GRAYCODE, b. 1984)과 정진희(jiiiiin, b. 1988)로 구성된 개별 전자음악가이자 아티스트 그룹이다. 개인전으로는 《∆W》(송은, 서울, 2023), 《Data Composition》(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서울, 2021), 《Time in Ignorance, ∆T≤720》(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서울, 2020), 《10^-33cm》(독일 한국문화원 갤러리 담담, 베를린, 2019), 《#inlcude red》(인천아트플랫폼, 인천, 2016)이 있다.
 
또한 이들은 《협업의 기술》(인천아트플랫폼, 인천, 2024-2025), 《사라졌다 나타나는》(경기도미술관, 안산, 2024), 《랜덤 액세스 프로젝트 3.0》(백남준아트센터, 용인, 2023), 《오프사이트》(아트선재센터, 서울, 2023)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2021년 개인전 《Data Composition》으로 출판한 서적은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주최하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선정되었으며, 2018년 독일 카를스루에 예술과 미디어 센터(ZKM) 헤르츠랩과 남서독일방송국(SWR) 주최 ‘기기-헤르츠 어워드’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