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작업을 개별적으로 본다면, 각각의 영상이 초기 영화의 어법을 향해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예를 들어, 무성영화에서 도드라지는 신체의 움직임, 초기 애니메이션과 같은 단순한 선과 느릿하게 흘러가는 화면을 들 수 있다. 영화가
이미지로부터 분리되었던 시간대를 옛날 옛적이라 한다면, 한우리의 작업은 그 분열의 시간대로 돌아가는
궤적을 우화의 형식으로 꿰어내 본다. 그가 작업에서 시간을 항해하는 방식은, 우화의 형식을 통해 사물의 이야기를 경유하여 가깝고도 먼 세계를 현재로 불러 모으고 재조직해 보인다. 이렇게 작가가 앞서 소개한 세 작업을 전시로 구축하는 방식은 스크린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한우리의 전시에서 영상은 공감각적인 경험과 더 맞닿아 있다.
이
경험의 중심에는 한 대의 영사기가 자리한다. 영사기가 돌아가고 빛이 공간을 비추면, 영사기의 빛과 기계적 사운드는 디지털 상영에 적합하게 설계된 프로젝터의 비가시적인 기계성까지도 물질적 존재로
불러일으킨다. 영사기와 빔프로젝터에서 흘러나오는 작업은 각기 독립된 영상이나, 벽체에 투사된 빛의 신호와 사운드를 통해 전시장이라는 장소성을 확장된 프레임으로 머금는다. 또한, 영상의 사운드를 쓰는 방식에서도 빛을 조우하는 순간 묘하게
갈라지며, 감각의 분리와 만남을 공간적 경험으로 전한다.
여기서
한가지 특이사항은 영사기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영화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동시대 미술에서
영화가 전시장으로 들어오면서 포스트 시네마로서의 확장성을 도모해온 방향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소 엉뚱하기도
하지만 작가의 영화적 접근은 아마추어리즘에서 시작되었다. 영사기에 대한 관심이 수집하는 행위에서 시작됐다는
작가는 거의 10년간 수집하고 모으면서 취미광으로서 영사기를 만지다가 이를 주제로 작업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호기심에서 시작된 관심이 배움으로 이어진 것을, 이후
작업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확장한 것이다. 그의 작업에서 영사기는 영화의 역사와 서사를 아우르는 유물로서의
기계라기보다는 이미지의 세계를 새롭게 발견하게 하는 매개체라 할 수 있다. 자신에게 영향을 준 영사기를
새로운 이미지의 세계로 접속하는 동력으로 파악하고 나서, 이를 다른 가능성의 이미지를 추동하는 매개체로
삼은 셈이다. 필름이 돌아가는 순간, 이 기계가 비추는 것은
과거의 이미지가 아니다. 한 작업이 은유하듯 필름의 구멍은 묘하게 핸드폰의 맨질맨질한 물성과 중첩되었다
어긋나기도 하면서, 이미지의 시작이었던 영화의 물성과 이로부터 멀리 떨어져 보이는 비물질의 디지털 세계를
연결해 보인다.
그렇게
《실과 리와인더》에서 영사기가 부활시킨 이미지와
영사 기계의 관계는 세 작업을 분리된 조건이 아닌 하나의 시공간으로 공유하면서, 분리된 개별 작업의
시간을 어느 순간에는 서로 연결된 경험으로 전한다. 전시장은 움직이는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시간을 상영하는
커다란 프레임이 되어, 관객의 신체까지도 그 시간 속으로 끌어들인다.
시간의 분절 속에서 살아가는 동시대인에게 시간의 유기적 구조를 요구하기란 쉽지 않다. 조각나고
파편화된 시간을 상상하기가 더 쉬운 세상에서 시간의 흐름이란 무수한 분열로부터 지속되어오고 때문이다.
이미지는
현실 안에서 실시간으로 파편화된 모습으로, 마치 밈처럼 전체의 맥락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조각조각
분리되어 등장해오고 있는 세상이다. 한우리의 작업은 동시대인이 일상 속에서 이미지를 지각해온 방식을
되짚고, 분절된 시간과 이미지의 영역을 연결해보고자 한다. 그리고는
오늘날 이미지를 지각하는 분열된 시간성에 반기를 들어, 이미지에서 영화가 분리되던 때를 현재의 시간대로
데려오기를 시도한다. 이를 꿰어내는 실은 부재로부터 이미지를 만들어내 온 인류의 관심과 보살핌에 대한
알레고리로 볼 수 있다. 그렇게 실은 사물과 인간, 이미지와
기계, 기억과 현상을 엮어내는 궤적으로, 리와인더는 부재하는
것들을 기억하는 이미지의 작동 기제로서 또 등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