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과 리와인더》 전시 전경(아트스페이스 보안, 2022) ©보안1942

한우리의 개인전 《실과 리와인더》를 보고나서 뇌리에 남은 잔상을 더듬어보자 전시장에서의 작업이 동시적으로 떠오른다. 이상한 일이다. 10분, 5분, 3분 남짓한 집중하기 좋은 짧은 분량의 영상들이었다. 어둑어둑한 조도의 전시장에는 두 개의 프로젝터가 벽을 향하고, 금속 재질의 벽체 뒤에는 오래된 영사기에서 빛이 서서히 새어 나온다. 앞선 작업은 〈투명한 감각〉(2022)과 〈얇고 깊은〉(2022)이며, 영사기에서 상영되는 작업이 〈베르팅커〉(2022)이다. 전시장에서 영사기와 프로젝터는 필름과 디지털 상영을 구분하고 분리하기보다는, 이미지를 생성하는 시간의 흐름으로 연결해 나간다. 이 빛에 이끌리듯 관객은 스크린 앞을 머물다 전시장을 배회하다 서서히 사라지고 또 등장한다.

이 글은 필자에게 남겨진 전시 사후의 기억을 붙잡는 것으로, 한우리가 작업에서 탐구하고 있는 이미지와 시간의 관계를 다룬다.

시에서 두 작업은 서사 구조를 기반으로 한다. 〈투명한 감각〉은 서정적인 영상과 사운드로 공간에 공감각적인 심상을 부여하는 작업이다. 우화의 형식을 차용한 영상은 피리 부는 사람에 매혹돼 사라진 마을의 아이들을 기억하는 세 친구의 이야기를 다룬다. 앞을 볼 수 없는 친구,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친구, 보고 들을 수 있으나 움직일 수 없는 친구. 이 세 사람은 사물을 덧대는 과정에 미숙하나마 서로의 눈과 귀, 손을 함께 보탬으로써, 이미지를 재생시키는 아날로그 장치를 만들어낸다. 이 장치는 사라진 사람들을 기억하는 기계로, 필름보관소의 문을 기억하고 필름을 리와인드 하는 순간을 기억함으로써 이미지를 불러 모은다.

사라짐에 대한 기억을 더 먼 과거로 이끄는 여정은 영사기로 상영되는 〈베르팅커〉를 통한다. 옛날 옛적으로 시작하는 이 작업은 별자리 중 유일한 곤충자리라 하는 파리자리의 신화에 영감을 받은 것으로, 장소와 사물을 실로 묶어 시간을 만들던 베리팅거의 이야기를 3D 애니메이션으로 되살려낸다. 베르팅거의 능력에 매혹된 인간이 이를 마구잡이로 포획하면서 시간의 어긋남은 커지고, 이야기는 베르팅거를 다시 소환하고자 하는 현시점에서의 소망을 담는다. 영상의 마지막에서 필름 위에 그려진 물줄기 같은 형형색색의 드로잉은 시간의 궤적에 대한 미완의 상상력을 향한다.

한편, 〈얇고 깊은〉은 앞선 두 작업과는 영상의 전개 방식에서 다소 다른 형식을 갖는다. 여기서는 다른 작업에서 골조가 된 내러티브의 서사 구조가 빠지고 화면에서의 연속된 이미지들이 중심이 된다. 스크린을 구성하는 사물은 필름으로, 아날로그 시대의 필름의 물성과 디지털 시대의 매끈한 비물질성을 연결하는 매개물로서 등장한다. 필름을 화면 가득한 프레임으로 다루는 영상은 필름에 난 구멍을 통해 흔들리는 풍경을 보여주다가, 디지털 세계를 떠도는 가상의 감각으로 구현된 영사기의 부품 이미지를 다루기도 한다.

시간의 전개 속에서 분해되고 해체될 수밖에 없는 비영속적인 사물의 삶은 이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의 손과 집단지식을 통해 잃어버린 부분을 점차 되찾아 나간다. 표류하는 이미지들은 영사기, 필름, 스마트폰의 물질적 감각을 오가며 분리된 물성의 세계를 이미지이자 동시에 사물이 함의하고 있는 세계의 시간대로 연장되어 나간다. 선명하고 잔상이 없는 최근의 영상과 이와 반대되는 과거의 필름 영상이 지닌 미학적 구조가 조우하는 구성이다.

《실과 리와인더》 전시 전경(아트스페이스 보안, 2022) ©보안1942

위 작업을 개별적으로 본다면, 각각의 영상이 초기 영화의 어법을 향해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예를 들어, 무성영화에서 도드라지는 신체의 움직임, 초기 애니메이션과 같은 단순한 선과 느릿하게 흘러가는 화면을 들 수 있다. 영화가 이미지로부터 분리되었던 시간대를 옛날 옛적이라 한다면, 한우리의 작업은 그 분열의 시간대로 돌아가는 궤적을 우화의 형식으로 꿰어내 본다. 그가 작업에서 시간을 항해하는 방식은, 우화의 형식을 통해 사물의 이야기를 경유하여 가깝고도 먼 세계를 현재로 불러 모으고 재조직해 보인다. 이렇게 작가가 앞서 소개한 세 작업을 전시로 구축하는 방식은 스크린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한우리의 전시에서 영상은 공감각적인 경험과 더 맞닿아 있다.

이 경험의 중심에는 한 대의 영사기가 자리한다. 영사기가 돌아가고 빛이 공간을 비추면, 영사기의 빛과 기계적 사운드는 디지털 상영에 적합하게 설계된 프로젝터의 비가시적인 기계성까지도 물질적 존재로 불러일으킨다. 영사기와 빔프로젝터에서 흘러나오는 작업은 각기 독립된 영상이나, 벽체에 투사된 빛의 신호와 사운드를 통해 전시장이라는 장소성을 확장된 프레임으로 머금는다. 또한, 영상의 사운드를 쓰는 방식에서도 빛을 조우하는 순간 묘하게 갈라지며, 감각의 분리와 만남을 공간적 경험으로 전한다.

여기서 한가지 특이사항은 영사기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영화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동시대 미술에서 영화가 전시장으로 들어오면서 포스트 시네마로서의 확장성을 도모해온 방향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소 엉뚱하기도 하지만 작가의 영화적 접근은 아마추어리즘에서 시작되었다. 영사기에 대한 관심이 수집하는 행위에서 시작됐다는 작가는 거의 10년간 수집하고 모으면서 취미광으로서 영사기를 만지다가 이를 주제로 작업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호기심에서 시작된 관심이 배움으로 이어진 것을, 이후 작업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확장한 것이다. 그의 작업에서 영사기는 영화의 역사와 서사를 아우르는 유물로서의 기계라기보다는 이미지의 세계를 새롭게 발견하게 하는 매개체라 할 수 있다. 자신에게 영향을 준 영사기를 새로운 이미지의 세계로 접속하는 동력으로 파악하고 나서, 이를 다른 가능성의 이미지를 추동하는 매개체로 삼은 셈이다. 필름이 돌아가는 순간, 이 기계가 비추는 것은 과거의 이미지가 아니다. 한 작업이 은유하듯 필름의 구멍은 묘하게 핸드폰의 맨질맨질한 물성과 중첩되었다 어긋나기도 하면서, 이미지의 시작이었던 영화의 물성과 이로부터 멀리 떨어져 보이는 비물질의 디지털 세계를 연결해 보인다.

그렇게 《실과 리와인더》에서 영사기가 부활시킨 이미지와 영사 기계의 관계는 세 작업을 분리된 조건이 아닌 하나의 시공간으로 공유하면서, 분리된 개별 작업의 시간을 어느 순간에는 서로 연결된 경험으로 전한다. 전시장은 움직이는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시간을 상영하는 커다란 프레임이 되어, 관객의 신체까지도 그 시간 속으로 끌어들인다. 시간의 분절 속에서 살아가는 동시대인에게 시간의 유기적 구조를 요구하기란 쉽지 않다. 조각나고 파편화된 시간을 상상하기가 더 쉬운 세상에서 시간의 흐름이란 무수한 분열로부터 지속되어오고 때문이다.

이미지는 현실 안에서 실시간으로 파편화된 모습으로, 마치 밈처럼 전체의 맥락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조각조각 분리되어 등장해오고 있는 세상이다. 한우리의 작업은 동시대인이 일상 속에서 이미지를 지각해온 방식을 되짚고, 분절된 시간과 이미지의 영역을 연결해보고자 한다. 그리고는 오늘날 이미지를 지각하는 분열된 시간성에 반기를 들어, 이미지에서 영화가 분리되던 때를 현재의 시간대로 데려오기를 시도한다. 이를 꿰어내는 실은 부재로부터 이미지를 만들어내 온 인류의 관심과 보살핌에 대한 알레고리로 볼 수 있다. 그렇게 실은 사물과 인간, 이미지와 기계, 기억과 현상을 엮어내는 궤적으로, 리와인더는 부재하는 것들을 기억하는 이미지의 작동 기제로서 또 등장할 것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