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정, 〈야생종〉, 2020,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스테레오), 혼합매체, 22분 ©송민정

최근 미술계에서 과학기술이라는 키워드가 유독 뜨겁게 떠오르고 있다. 21세기 이후로 미술계는 과학기술에 대해 꾸준히 논의해 왔지만, 코로나 19로 한층 더 앞당겨진 온라인 시대는 미술계의 담론 역시 가속화시켰다. 그리고 많은 예술가들은 첨단 기술이 파도처럼 급격히 밀려오는 현 세태를 마냥 긍정적으로 포용하지 않는다. 이는 기술이 빠르게 발전할수록 뒤처지는 우리의 의식 구조를 자정하기 위함일 것이다.

목욕탕에서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재탄생한 행화탕에서 진행 중인 《가상 정거장》 역시 기술의 발전이 불러온 변화에 주목한다. 김성희 예술감독이 기획한 이 프로젝트에는 김지선, 김나희, 리미니 프로토콜&토마스 멜레, 헬렌 노울즈, 더블럭키 프로덕션, 티파니 리, 서현석, 윤태웅, 이웅철, 김보용, 송민정 작가가 참여하였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공예술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으며 오는 3월 21일까지 진행된다.

전시실을 둘러보기에 앞서 서문을 먼저 훑어보자.
 
“신체, 시간, 공간, 도시, 공동체 등 오늘날 예술과 비평적 사유의 중요한 화두가 되는 개념들은 근대에 태어났다. 그리고 기술의 급격한 발달에 따라 파격적으로 변신해간다. 주체가 안주했던 사유와 관계의 생태계가 파괴되고 새로운 정보의 망이 신체와 욕망을 대체한다. 시공간의 감각은 파편화되어 납작한 정보로 환전된다. 정보는 자본이다. 자본의 속도감 속에 침잠된 공공 영역에서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예술이 공공 영역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공공의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는 공공의 광장을 열고 다양한 예술가들의 관점과 의제를 제시하여 세계를 더욱 날카롭고 비평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단초들을 제안하는 것이 아닐까?

《가상 정거장》은 근대의 폐허 위에서 테크놀로지를 바라본다. 기술이 태동시킨 변화의 궤적과 결들,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신화의 뒤쪽에서 새로운 감각의 씨앗들을 주시해본다.”
- 《가상 정거장》 서문
 

즉 《가상 정거장》은 근대에 탄생한 여러 비평적 개념에 드리워진 정보기술의 영향력을 돌아보며, 예리한 시선으로 사회 현상을 살피는 계기를 예술로써 마련하고자 한다. 그 유형은 영상 작업과 공연, 공유회나 VR 등으로 다양했으나 이 글에서는 행화탕에서 상시 감상할 수 있는 영상 작업 중 세 가지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기름창고’에서는 송민정 작가의 〈야생종(WildSeed)〉이 전시된다. 영상의 주인공은 육신을 빼앗겨 유령처럼 세상을 떠도는 남성, ‘김기철’이다. 그는 절단기에 손가락이 잘려나간 채 중국의 한 섬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이 소식을 그의 딸에게 전하는 경찰관은 업무가 번거로워진다는 이유로 시신 송환을 꺼리거나 보이스피싱이 아니라고 짜증을 내는 등 유가족에게 사망 소식을 전하는 태도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무덤덤하다.

그리고 남자가 남긴 메모의 내용과 함께 그의 죽음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국적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그와 함께 일한 한 중국 여성은 그를 ‘생선 악취가 나는 남자’였다고 말할 뿐이다. 그녀는 남겨진 사람들이 죽은 자에 대해 떠드는 이야기들은, 당사자가 없는 곳에서 말을 덧붙이며 점점 거창해지는 모습이 마치 소설 같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김기철에 대한 정보가 만일 자신의 안위에 영향을 미친다면 아무런 진술도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고인의 SNS 계정에 남겨진 정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는 상담원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추가 요금을 내면 김기철의 계정을 고인 계정으로 전환해 정보를 보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딸은 고민해 보고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하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전화를 건 상담원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데이터가 손실되어 복원이 어렵다고 밝힌다. 결국 김기철의 정보는 삭제 처리된다.

즉 김기철은 정보 조작으로 신체를 빼앗긴 인물이다. 그는 이 세상에서 죽은 자도 산 자도 아니다. 그를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정보는 온라인상에서 완전히 삭제되었고, 생전에 그와 관계를 맺었던 인물도 그에 대한 증언을 거부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정보의 위협성을 실감하게 한다. ‘스릴러 드라마’ 장르의 영상물임에도 그 본질적인 의미는 우리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간편함을 위해 정보를 손쉽게 타인에게 넘긴다. 그러나 간편함을 얻기 위해서는 언제나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공인인증서와 비밀번호 하나면 인터넷상에서 나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세상이고, 그 정보가 누군가의 손에 넘어간다면 누구든 나를 사칭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정보권력을 독점한 소수가 마음만 먹으면 우리의 일상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물리적인 실체보다도 무형의 정보가 우리를 더 효과적으로 증명하는 시대에서, 우리는 정보기술의 발전을 마냥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
 
무형의 데이터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게 된 오늘날, 가장 큰 위기를 맞이한 것은 우리의 신체일 듯하다. 온라인 소통이 신체적 교감을 대체하면서 우리의 공감각이 맞게 되는 결과는 둘 중 하나다. 무뎌지거나, 혹은 반대로 예민해질 것이다. 이때 동시대의 예술가들은 저마다의 감각을 예리하게 날 세워 반응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현재의 상황에 민감히 반응하게 한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