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 이 사전은 필자의 자의적 해석에 근거하기에, 학술적인 인용에는 부적합할 수 있습니다.
1) 장식
2000년대 초 한국의 최신 가전 제품들에는 꽃무늬가 등장했다. 반짝이고 거대한 하이글로시 꽃들. 신혼부부나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DIY 인테리어가 유행했다. 대개 전월세 거주 형태를 갖는 젊은이들은
한두 해 뒤 집을 나가더라도 아깝지 않을 정도의 비용과 가성비로 심미적인 환경을 만들었고, 쉽게 붙일
수 있는 시트지, 벽지, 타일, 말하자면 ‘덧빵’의 신세계가
펼쳐졌다. 주거 공간 뿐 아니라, 카페와 같은 상업 공간, 지하철 화장실까지 여기저기 번식한 그래픽 시트지들은 대개 환상적이고 탁 트인 자연이나 풍경 사진을 담고 있다. 최윤은 그런 이미지들을 전시장에 들였다. 다이소에서 파는 빨간 장미
벽 스티커부터 해바라기 풍경 사진까지, 그것은 한국인들의 주술성 짙은 희망과 정념을 드러내지만 ‘취향’의 문제는 아니다.
벽 장식 인테리어 시트지는 무수히 복제되고 증식될 수 있는 디지털 이미지이자, 미터 단위로
주문 가능한 공산품 장식물이다. 콘크리트로 막힌 현실 공간에 자연의 판타지를 부여하는 이미지는 이내
곧 상투적인 가짜 이미지의 위상으로 전락한다. 최윤은 이 “진부한
상투성의 판타지”가 지니는 메커니즘을 관찰한다. 20세기
초, 철과 같은 날 것의 물성이 노출되는 것을 견디지 못한 유럽인들이 발전시킨 아르누보 양식처럼, 이 인테리어 시트지 또한 한국인의 문화적 동질성을 창출해내는 하나의 시대적 양식이다. 최윤이 다루는 시트지 이미지는 부수적인 것, 장식이면서 일련의 양식(mode), 구조다. 일상 어디에나 침투해있으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창문으로서 하나의 거대한 미디어다. 그 미디어가 지닌 광택에는 한국인들만이 지닌 특유의 전근대성이 묻어나온다.
2) 복제
최윤은 2015년 《굿-즈》에서 〈하나코 50〉이라는 가상-인물-액자 50개를 만들어 진열하고, 판매를 위한 광고방송을 전시장에 송출했다. 2017년 아트선재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는 《하나코, 윤윤최, 최윤 개인전》을 개최했다. 마치 세 인물처럼 들리는 이 이름들은
최윤의 복수적 아이덴티티를 구성한다. 그러나 그 구심점에 최윤이라는 실존인물이 자리하는 식은 아니다. 동명이인이 쓴 소설의 주인공, 홈페이지 도메인, 일본에서 살고있는 대략 1300명의 여성, 화장실 귀신이자, ‘셀피’로서, 하나코/윤윤최/최윤은
자가 복제, 자가 변형하는 이미지 그 자체, 혹은 일련번호가
붙은 사이보그적 입지를 감당한다. 가끔 최윤은 이들의 대리인으로 또 다른 가족을 찾아주기 위한 전시와
판촉에 나설 뿐이다.
하나코/윤윤최/최윤의 아이덴티티는 ‘거대한 뿌리’에서 번식한 각자의 가지 혹은 마디로서 현현하고, 시공을 초월한 유사 가족주의로서 동아시아를 상상해보게 만든다. 하나코/윤윤최/최윤은 단지 지형학적인 동아시아가 아니라, 지배와 선망, 식민과 오염의 시공을 횡단하는 혼혈적 ‘패턴’이자 ‘덩어리(mass)’로 진화한다. ‘김치오빠’,
‘홍콩할매’, ‘고려봉자’와 같이 시대와 장소를
달리해 발견된 명명들 속에 어루만져지거나 짓밟힌 하나코의 그림자들을 만날 수 있다. 최윤은 이러한 관계의
링크, 점핑, 재설정을 통해 이름과 이미지를 치환시키고 가지고
놀면서 일본, 홍콩, 대만,
중국, 북한을 잇는 정체성의 변종들을 증식시킨다. 그것은
적과 이웃, 순수와 불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힘들게
만드는 방향상실의 전략이다.
3) 갱신
갱신은 이미 있는 것을 고쳐 다시 새롭게 하는 행위다. 그 상태로는 존재 이유, 생명력, 유용성이 다했거나 다해가는 것들을 말이다. 최윤은 기괴한 형체로 과거 퍼포먼스 도구나 파편들을 덕지덕지 붙이고 있는 자신의 입체 조형물들을 ‘플라스틱 화석’ 내지 ‘갱신물’이라 부른다. 이들은 “버려도
다시 남고, 보내도 돌아와 서서히 몸속에 스며들고 달라붙어 몸집을 불린다. 그 잡종의 몸이 모여 군집을 이루고 마음이 가는 풍경을 만든다.” 2020 두산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마음이 가는 길》에서 이 ‘갱신물’들은 그야말로
거대한 군집의 형태로, 미노타우르스의 미로 혹은 총천연색 종말을 연출했다.
이런 형상들로 비추어볼 때, 최윤에게 있어서 ‘갱신’이란 오히려 거의 썩어가기 직전의 찌꺼기들을 다시 재조합하는 ‘부활’에 가깝다. 그런데 최윤은 이를
‘renewal’이라 부르기보다 ‘update’라고 부른다. 마치 이들이 영원히 썩지 않을 것들을 전제하는 듯. 이 찌꺼기들은
도심 도처에 널려 있는데, 최윤의 눈에는 이들의 상태는 다시 누군가에게 호출되기를 기다리는 컴퓨터 저장
파일 ‘캐시’와 같다. 재검색되지
않는 한 네트워크 어딘가에 묻혀 잊혀질 것들. 이들의 유용성, 생명력은
어디에 있는가? 스티로폼, 우레탄, 에폭시, 라텍스, 고무, PVC로 맞붙은 얼굴 없는 괴물, 쓰레기로 버려질 운명을 거부하는
이들이 ‘갱신’하려는 상태는 무엇인가? 〈호러 에로 천박 주문〉에 따르면, 이들의 목표는 척추동물이 되는
것이다. 왜 하필 척추동물인가? 말하자면, 이것들은 움직임보다는 형체를 이루는 것, 발기하는 것, 몸집을 불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인가. ‘갱신의 판’은 버려진 사물들의 구제라기보다, 삐걱거리고 헛발질하는, 자멸을 모르는 인간들의 정념, 언어의 군집화를 연상시킨다. 그것은 웃기고 귀엽고 가련하면서도 끔찍한 현재의 평행세계다.
4) 코리안 호러
최윤의 작업에서 ‘공포’라는 요소가 처음 등장하는
국면은 〈벽 스티커-스스로 접착할 수 있는 벽장식〉(2014)에서다. 생기있고 화사한 공간을 연출해준다는 빨간 꽃 벽 스티커들은 그야말로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2018년 최윤은 〈공포물 연작〉에서 체리색 몰딩, 꽃무늬 벽지와
같이 값싸고 촌스러움을 상징하는 한국형 인테리어 요소들을 미장아빔의 구조로 보여주었다. ‘공포의 천장
야광별’처럼 인터넷에서 ‘공포’로 지칭되는 것들은 유행에 뒤떨어지면서 일시방편적인 삶의 방식을 끔찍하게 여기는 집단적 혐오와 자조의 정서다. 최윤은 이러한 ‘공포’라는
말의 기표를 만지작거리며, 거기에서 떨어져 카펫 밑으로 숨겨버린 진짜 공포의 정체를 질문한다. “정작 공포인 것은 ‘공포’에
빗대어 자기를 비웃는 집단이다. 그리고 ‘공포’를 하찮게 축소하여 이용하는 심리다. 반대로 조그마한 것에 ‘공포’를 느끼게 하는 사회다.”
철 지나고 ‘구린’ 것들에 대한 공포는 ‘할머니’라는 기표에서도 현현한다.
일찍이 박찬경은 《귀신, 간첩, 할머니》(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4)이란 키워드를 한국의 ‘기이한 근대성’으로
묶어낸 바 있다. 앞선 세대가 주목한 할머니가 근대화에서 누락된 존재들, 불신으로 타자화된 객체들의 형상이었다면, 최윤의 ‘할머니’는 한밤중 《마음이 가는 길》 전시장에 등장한 시끄러운 귀신들이다. 디지털 세계가 현실 세계를 뒤덮는 오늘날, 디지털 세계에서 가장
비가시화되는 존재는 아마도 할머니일 것이다. 사실 최윤의 작업에서 ‘할머니’는 나이든 여성 인물이라기보다 ‘할머니 같음’이다. 최윤이 줍는 현실 세계의 ‘찌꺼기’들은 동묘시장이나 광장시장과 같은 할머니스러움의 영토를 형성한다. 가장
전근대적 존재이면서 현실의 틈새에 박혀있는 가장 끈질기고 유연한 존재, 어떤 여성도 원치 않는 명칭으로서의
할머니. 그것은 세계 최고수준의 성형술을 자랑하며 영원한 젊음을 약속하는 K뷰티가 가장 감추고자 하는 거울 이미지다.
5) 게시
“마음이 간다”는 말은 “눈길이 간다”는 말과 아주 가깝다. 최윤은 현대 사회의 시각적 요소들을 ‘보기(see)’보다 ‘보이기(show)’의 측면에서 주목한다. 말하자면 능동적 행위(look)가 아니라, 오히려 보이는 것들(view)에 애착을 둔다. 거리나 지하철과 같은 장소의 게시판, 전광판, 전단지, 쇼윈도
장식물 등은 사물인터넷과 5G 네트워크 시대에 누구에겐 그저 발에 밟히는 쓰레기이고, 누구에겐 여전히 영향력있는 메시지가 된다. 풀HD 평면 디스플레이라는 스크린 장치의 기호가 매일 갱신되는 시대, 최윤은
그 기호에 붙어있는 미디어의 물질성과 메시지의 역학을 주시한다. 그것은 ‘스크린-도어’라는 용어처럼
바깥을 향한 창문이면서 투명하게 닫히는 가림막이다. 열림과 닫힘을 반복하는 이것 앞에서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현대적 미디어의 디스플레이는 그 물리적 지지체, 물질성을
이미지에 접착시켜 최대한 투명하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매체는 보이지 않는 것이 된다. 반대로 최윤은 그 매체의 투명함에 기포를 만들거나 불려서 불투명하게 만든다.
그것은 무한 소비와 가속 성장과 공모하고 있는 미디어 이데올로기를 들추는 작업이면서 이 속도 뒤에 신속하게 버려지는 것들을 넝마주이처럼
주워 담는 작업이다. 바닥글, 스마트폰 모형폰, 인사봇… 2000년대 우리에게 행운을 손짓하고 약속하고 쇠락해버린
메시지의 몸들. 최윤은 아래를 보고 걷거나 뒤로 걸으며 2000년대
홍보 사회의 물질화된 ‘목소리’들의 파편을 주워모은다. 거기에는 서울의 디지털 모더니티가 재빠르게 끓였다가 식혀버린 시간의 침전물이 꾸물꾸물 살아남아 있다.
/금천예술공장 결과보고집 발췌,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