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의 포트폴리오는 〈생쇼〉라는 사진 작업에서 시작하는데, ‘생쇼’는 최근 작업까지 일관된 최윤의 작업정신이다. 〈생쇼〉말고도 최윤의 작업은 대체로 ‘생쇼’같다. 경멸의 대상이지만 재미있고,
부조리하지만 볼만한 해프닝이랄까, 생생하고도 한심한 어떤 사건들이 최윤의 작업에서 주로
연출되는 내용이다. 리얼하지만 결국은 쇼이며, 쇼의 수준에
도달해야만 리얼하게 상황을 묘사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요즘 말로
‘병맛’이라고도 할 수도 있겠는데, 그에 더해
뭔가 파괴력을 지닌 ‘병맛’이다.
〈생쇼, 파트1〉은 퍼포먼스와 연결된 사진 작업이다. 이 작업의 캡션에는, 대기시간이 10초로 설정된 ‘셀프-타이머’ 기능을 써 촬영하였다고 되어있다. 그러니까 작가 자신이자 사진 속 주인공이 카메라 앞에서 10초 동안 ‘생쇼’를 했을 거라는 상상을 관객에게 하도록 한다. 결과는 카메라 앞에서 안쓰럽게 애쓰는, 악취미 의상에다 연기력 떨어지는
배우지망생의 실패한 포트폴리오이다. 이러한 부질없는 행위의 의도된 실패의 즐거움 등이 최윤의 작업에서
중요하다. 그것을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청년실업률과 연결해 해석하든 전망 없는 미술학도의 위악적인 제스처로
해석하든, ‘맨 땅에 헤딩하는’ 것이야말로 최윤의 ‘생쇼 미학’의 핵심이라고 할만하다.
(약간 고승욱의 퍼포먼스 비디오 시리즈를 생각나게 한다.)
〈생쇼, 파트2〉는 경마장에서 찍은 사진과 소리로 이루어진 비디오이다. 같은 제목이지만, 이번에는 작가 자신하고는 무관한, 경마장의 이상하고도 황폐한 풍경을
보여준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 치고 열정이라고는 없어 보인다. 경마장은
요즘말로 ‘잉여’의 분위기가 넘치는 정체불명의 공간으로 묘사된다. 생생한 고화질 동영상은 물론 아니다. 대충 찍은 사진들이 옆으로
넘어가는 로우테크 장면전환은 이 비디오-장소의 ‘병맛’을 더욱 강조한다. 이것이 냉소적인 시선인지, 감정을 배제한 객관적인 기록인지도 애매하기 때문에, 열정적으로 경마
중계방송을 하는 목소리도 아주 공허하게 이미지 밖에서 떠돈다. 〈생쇼〉 연작은, 작가 개인이든 사회이든, 장엄한 경제성장이나 근면한 생산성의 이데올로기
등이 실패하는 장소를 보여준다.
이렇게 공허한 행위나 그 기록을 통해서, 특히
그런 행위의 날것 상태를 강조함으로서, 말해지지 않거나, 말하기
어려운 상황을 전달하는 것이 최윤의 방식이다. 퍼포먼스-비디오인
〈NNN〉이라는 작업도 미술학도, 또는 미술가 일반이 겪는
부조리한 상황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실기실로부터, 덕수궁과 광화문을 거쳐 청와대까지 100호 가량의 누드 그림 캔버스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는 것이 이 퍼포먼스-비디오이다. 쉽게
상상할 수 있다시피, 이 전형적인 아카데미 그림은, 서울의
대표적인 공간을 누비면서 미술가에게 체험되는 상반되는 두 개의 공간 – 미술과 현실, 실기실과 도시, 누드와 시선, 캔버스의
불편한 부피와 분주하게 이동하는 도시 공간 –을 분리시킨다. 이런
방식으로, 아카데믹한 미술교육은 풍자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가장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캔버스 누드화는 비로소 부조리한 현실상황에 대한 정확한 비유로서,
미술의 현실과 함께 서울의 현실을 드러내게 되기 때문이다. 누드화와 이순신 장군 동상의
대비라든가, 누드화를 접하는 청와대 경호실 경찰들의 안절부절 행동 속에서 비로소 미술도 현실도 살아
움직이게 된다.
이렇게 최윤이 연출하는 장면은, 자기 자신이, 또는 동세대의 부유하는 한 젊은이가, 또는 ‘잉여’가 마주치는 어떤 ‘파괴적인’ 상황이다. 어떤 파괴적인 상황이란,
〈마의 삼각지대〉처럼 말 그대로 서울에서 끊이지 않고 벌어지는 주거지역 철거의 현장일 수도 있고, 〈알려지지
않은 모임〉이나 〈인간변종〉처럼, 주민들이 임시변통으로 덧대고 고치고 재활용하는 공간 일수도있겠으며, 더 단순하게는 〈돌, 가위, 종이〉처럼
고속으로 달리는 열차일 수도, 〈국민 메니페스토〉처럼, 애국가
방송의 과도하게 숭고한 이미지일 수도 있다. 파괴적인 상황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일 수도 있고, 하나의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순간 이동하는 타임머신 같은 곳, 또는 환상과 실제가 공존하는 공간 등이기도 하다. 최윤의 작업에
수시로 나타나는, 이러한 일시적이고 즉흥적이며 한곳에 머물지 못하는 방식을 동시대의 웹서핑 문화에 서둘러
연결할 수도 있겠고, ‘포스트모더니즘’ 이래 환유가 지배하는
시대의 또 다른 재현방식으로 보아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최윤의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지배적 문화와 코드에 대한 반항이라는 점에서, 이미지 릴레이의 단순한 유희나, 변덕스러운 망각의 연속과는 전혀 다르다. 이미지에 구멍을 내거나, 돌을 던지거나, 또는 이미지를 벽으로 환원하는 등의 반도상적인 제스쳐는
오히려 애니미즘적 태도로, 사물이나 환경을 살아있는 활동이나 삶의 과정으로 ‘퍼포머티브’하게 전환하려는 거친 시도이다.
최윤의 묘사에 따르자면, 서울의 이화동에서
발견한 버려진 전선을 활용한 정원의 울타리, 깨진 병조각을 시멘트 덩어리에 박아 만든 주차방해물, 이런 저런 폐품을 끌어다 만든 배수구나 우체통, 침대 매트리스의
스프링을 개조해 만든 쇠창살 등은 창조적 파괴, 또는 파괴적 창조의 열린 공간, ‘변화하고 있는’ 발생중의 공간을 나타낸다. 최윤이 서울의 오래된 동네에서 배운 것은, 활기 잃은 미술관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이다. 폴 찬(Paul Chan)이 어디선가
말했던 것처럼,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쓸 수 있는 물건을 쓸 수 없는 물건으로 만들었다면, 주민들은 그 반대였던 것이다. 물론 최윤 역시 유용한 물건을 ‘공공미술’처럼 딱히 유용한 무엇으로 바꾸는 것은 아니다. 최윤 작업의 재미는, 오히려 물건들의 재활용과 ‘주민미학’적 콜라주가, 그녀의 손을 거치면서 어떤 엉뚱한 도약으로 이어지는
데 있다. 최윤의 작품 설명을 보면, 특정 지역의 역사나
특성에 대해서 논하는 등 처음에는 공공미술이나 도시의 예술 개입과 같은 프로젝트와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모임〉, 〈인간변종〉, 〈마의 삼각지대〉와
같은 최윤의 프로젝트는, 갑자기 태양계나 버뮤다 삼각지대, 유령의
공원, 요정의 숲와 같이 차원이 다른 공간, 또는 상상적인
공간으로 점프한다.
이런 상상적 공간으로의 순간이동은, 특히
〈인간변종〉이라는 작업에 쉽게 볼 수 있다. 사물을 뒤집어 쓴 인물들,
또는 사물들이 연극을 한다는 설정이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사실 나는 이런 다소 문학적인 표현방식 자체 보다, 최윤의 작업에서
보이는 사물 사이의 즉흥적인 교환가능성, 접착가능성과 ‘아무렇게나’ 되어도 좋다는, 좋은 의미의 순진성이랄까 정치적 정확성에 대한 도발적인
무관심에 매력을 느낀다. 이런 반미학적이고 자유주의적인 태도는, 서로
다른 작품에 같은 사물을 쓴다든가, 작품을 다른 작품에 아무렇지도 않게 재활용하는 것에서도 볼 수 있다. 위에 보이는 지구본은 다른 작품에도 등장하고, 〈Image Wall〉이란 그림-벽은 최윤이 여기 저기 써먹는 애용품이다. ‘써 먹는’ 것이야 말로, ‘주민미학’의 경제이며, 임시 시설이야말로 ‘전시회’의 ‘웰-디스플레이’에 상응한다. 같은 소재를 여기 저기 써먹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이 작품이고 어디까지가 다른 작품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이러한
희박한 ‘전작 oevre’ 관념, ‘작품’ 관념은, ‘내밀한
작가세계’를 추구하도록 끊임없이 강요당하는 (한국)미술의 일반적인 환경에 대한 정당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최윤의 최근 작업은, 미술과 사회의 여러
가지 불일치와 노는 것에서 미술과 사회의 스펙트럼을 더 풍부하게 나눠보고, 의식적으로 비판적인 이슈들을
제기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시민의 숲〉에서는 국가기념비들이 여기 저기 삽입되어있는 공공공간과 그곳을
점유하는 코스프레 매니아들의 완벽하게 비틀린 관계를 드러낸다. ‘시민의 숲’과 ‘요정의 숲’은 한
공간에서 완벽하게 ‘따로 또 같이’ 논다. 〈국민 메니페스토〉에서도 그렇다. 정부는 한류를 수출상품이나 국가
프로파간다의 하나로 이해하기 때문에, 케이팝은 사실 애국가하고 다를 바가 없다는 식이다. 정치적 정확성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지르는 것이 최윤 작업의 매력인데, 이렇게
교육적인 메시지를 담는 것이 그런 매력을 반감시키는 것은 아닐까? 마음이 약한 선생님들이나 그렇게 생각하라고
하자. 아직까지는 힘이 넘친다.
우리가 미술계에서 흔히 느끼는 문제 중에 하나는 담론상황의 임의성이다. 담론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고, 유사한 담론의 상태들이 역사
없이 이어진다. 미술사적인 줄기 속에서 자신의 작업을 반추해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거의 호사스러운
불만에 속한다. 사실 한국처럼 문화식민지이자 동시에 제국주의이며, 이
식민/제국성이 타의로 형성된 것이면서 동시에 자발적 내면화에 의한 것이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혼종, 급변, 정치의
코드화, 심미적 즉흥성, 형식적 모더니티 등등의 그 모든
괴리가 만들어내는, 일체 규범, 정체성, 이슈 등의 해체는 언어소통의 극단적인 곤란 속에 우리를 밀어 넣는다.
나는
최윤 세대의 작가가 각별히 겪고 있는 문제가, 무엇을 무엇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시대에 어떻게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것은 최윤
세대의 작가만이 겪는 문제는 전혀 아니지만, ‘민주화’ 이후
세대가 겪는 한국사회의 초현실성, 또는 ‘포스트모더니티’는 더욱 극단적이리라고 추측한다. 최윤에게 어떤 가능성을 느낀다면, 최윤이 그 갈등 속에 몸으로 뛰어든다는 점 때문이고, 담론상황의
임의성을 오히려 마구 드러냄으로서, 실제가 지닌 더 풍부한 에너지로 감상적인 예술담론을 파괴하는데 있는
것 같다. 말로 하는 게 어렵다면 몸으로 하는 것이 길이라는 듯이 말이다. 역시 한국에서는 족보 없는 미술이 미술사를 만든다.
/ 하이트 컬랙션 《미래가 끝났을때》 도록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