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코, 윤윤최, 최윤 개인전》 전시 전경(아트선재센터, 2017) ©최윤

최윤이 탐사하는 현대 민속문화의 영토는 평범한 현실이 꿈 세계로 직접 연결된 것 같아서 매우 친숙해 보이면서도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요소들은 흔히 ‘통속적인 것’으로 식별되지만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의미에서 대중적인 것은 아니다. 이른바 민중의 이름으로 기념되는 생생한 삶의 흔적도 아니고 이국적인 관광지로 재개발된 과거의 기념품도 아니다. 그보다는 아무것도 아닌 다수의 무리에 속한다는 의미에서 저속한 것에 가깝다.

그것은 아무도 오래 쳐다보고 싶어하지 않는 진부한 것, 그럼에도 우리가 눈을 돌린 채 그것의 재생산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유행병 같은 것이다. 피상적인 수준에서 방치되고 소모되고 또 계속 공급되면서 세계의 살을 이루는 특징 없는 것들을 작가는 집요하게 전시장으로 가지고 들어온다. 그래서 전시장에서 보이는 것들은 대체로 어디선가 본 것들이다. 그러나 너무 자주 대충 보았던 탓에 어디서 보았다거나 누구의 것이라고 정확히 지목하지는 못한다. 그 사이에 족보 없는 이름과 원본 없는 이미지와 영혼 없는 목소리는 한데 뒤엉켜 불어난다.

원한다면 이것을 동시대 세계의 진경산수로 바라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 풍경은 그것을 관조하는 시각적 주체의 눈앞에 고분고분하게 정렬하지 않는다. 수집 가치가 없는 기호들이 채집되고 복제되고 꾹꾹 뭉쳐져서 전시장을 점령한 모습은 흡사 무대와 객석의 구별이 없는 극장 같다. 세트와 소품과 배우와 호객꾼을 분간하기 어려운 이 극장에 최윤은 기꺼이 자기의 이름과 얼굴과 기타 파생 데이터를 팔아 넘겼다. 《하나코, 윤윤최, 최윤 개인전》(2017)에서 작가는 ‘최윤’이라는 흔한 이름을 찢어질 정도로 잡아 늘였을 때 길바닥을 굴러다니고 스크린에 출몰하고 풍문으로 떠도는 온갖 잡다한 것들을 얼마나 끌어안을 수 있는지, 또 그들 사이로 얼마나 자기를 조각조각내서 던져 버릴 수 있는지 시험하는 듯이 보였다. 그것은 무당의 기예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아주 이상한 탈출 마술이기도 했다.

작가는 부분적 대상으로 절단되고 증식됨으로써 모든 곳에 흔적을 남기고 행방불명되었다. 남은 것은 작가의 부산물 또는 그가 자신을 던져 넣은 세계의 찌꺼기들로 이루어진 퍼석퍼석한 동굴이었다. 이 공간에 무엇이 드나들 수 있는가? 물론 관객이 있다. 그들은 전시장에 있는 모든 것을 미술 작품으로 보고 그것들의 창조자로 연결된 실마리를 찾는다. 그러나 최윤의 작업을 창조한 자 또는 그 작업에 책임이 있는 자를 찾는다는 것은 한낱 관객이 감당할 수 없는 존재를 불러내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최윤이 가시화하는 민속문화는 어떤 견고한 이름 또는 이름 없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그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 것들, 있으나마나한 이름을 돌려쓰면서 고유명사의 폐쇄적 논리를 내파시키는 것들에 귀속되기 때문이다.

최윤의 작업은 이 불운하고 불길한 자들을 호출하는 동시에 스스로 이들의 운명을 체화한다. 오늘날 전시장에 놓이는 많은 사물들은 더 이상 자기가 특별한 대상이라고 주장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전시의 구성에 맞춰 일회용으로 조성되고 전시가 종료되면 해체된다. 최윤은 그런 부스러기들을 또 다른 작업 또는 전시장의 지킴이로 탈바꿈하는 일종의 재활용 사업에 매진했다. 그러나 ‘척추동물’이라는 이름을 부여 받은 이 찌꺼기 조각 연작은 《마음이 가는 길》(2020)에서 “척추동물들이 더는 갈 곳이 없습니다.”라는 간판을 목에 걸고 무관심하게 도움을 구걸했다.

상품의 순환을 초월하지도 완주하지도 못하는 악성 재고로서, 이 사물들, 동물들, 또는 그저 물질화된 기호들은 전시장을 미래의 자연사박물관(인간 분과, 21세기 섹션)으로 변모시키며 그들 자신의 아이러니한 불멸을 점쳤다. 이처럼 온전하게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것들의 집회 장소로서 전시장에 대한 관심은 최윤의 최근 작업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는 팬데믹으로 인해 전시장의 작동 방식과 존재 이유가 근본적으로 의문에 붙여진 것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작가가 미술 제도 자체를 현대 민속문화의 일부로서 참여 관찰할 기회가 늘어난 탓이기도 할 것이다. 전시를 열기 어려운 현실적 조건과 전시를 계속 돌려야 한다는 제도적 명령 사이에서, 《막다른 길 걷기》(2020)의 전시장은 3D 그래픽의 동물들이 의아한 눈길로 전시물들을 관조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합성적 무대로 변모한다.

여기에 무슨 볼 것이 있는가? 〈둠즈데이 비디오〉(2020)는 각자의 위치에 고립된 존재들을 끌어당기고 다시 흩뿌리는 시청각적 소용돌이로 이 질문에 답한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를 볼 것이다.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 관람시간을 넘긴 전시장을 점거하고 서로를 찾는다. 시공간을 일그러뜨리는 어둠 속의 술래잡기가 끝나고 나면 당신의 손에는 무엇이 쥐여 있을 것이며 그 손은 누구에게 붙어 있을 것인가?


/ MMCA 젊은모색 도록에서 발췌, 2021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