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욱, 〈The Night Watch, Jusanji〉, 2013, 잉크젯 프린트, 80 x 106 cm © 김신욱

밤이 되면 어둠이 찾아오고, 어둠과 함께 괴물이 온다. 그러나 괴물은 멀리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부에서 온다. 당신, 인간이 괴물의 집인 것이다. 괴물은 멈추지 않으며 잠들지 않는다. 괴물을 길들이지 못한다면 괴물은 내면에서 당신을 파괴할 것이다. 왜 괴물을 두려워할까? 그것은 혼란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괴물은 자리잡은 것을 불안하게 하고, 안정된 것을 흔든다. 괴물은 어둠 깊숙이 숨어 있어 쉽게 발견할 수 없다.

따라서 카메라는 빛을 통제하는 인간의 도구이다. 시간을 얼리는 작은 기계가 괴물을 길들이는 데 필요하다. 카메라의 언어가 빛이라고 여겨졌지만, 카메라의 언어는 어둠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카메라 내부에는 어둠의 흐름을 연결하는 회로가 있다. 카메라라는 단어의 기원은 암실을 의미하는 ‘camera obscura’에서 왔다. 따라서 카메라가 밤의 어둠 한가운데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카메라를 어둠 속에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근대에 카메라 자체가 괴물로 밝혀졌다. 사실 기술적으로 재현된 풍부한 이미지의 사회에서 카메라는 항상 괴물이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미 “괴물과 싸울 때 너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심연을 오래 바라보면, 심연 또한 너를 바라본다”고 경고하였다. 어둠의 괴물과 싸우다 보면 카메라가 괴물이 된다. 과거에는 어둠이 무지와 빈곤 속에 있었다. 요즘에는 빛의 한가운데에 어둠이 자리잡고 있다. 너무 밝은 빛은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카메라는 통제 하에 있어야 하고 따라서 사진가가 있다. 김신욱은 괴물 같은 어둠 속에서 혼란스런 장면에 개입한다. 그의 카메라는 어둠속에서 응시한다. 밝게 빛나는 나뭇가지와 줄기는 어둠의 지옥에 서서 지키고 있다. 그러나 이 빛은 인위적이다. 매우 밝아 보이는 것은 실제로는 노출 시간과 조리개의 play 이다. 이 빛의 양은 그날의 밝은 햇살에서 무시될 수 있다. 일부 사진에서는 어둠 그 자체가 인공적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 색이 섞인 도시의 빛으로 오염되었다. 가로등, 간판 및 실내 조명과 같은 복잡한 빛은 어둠이라고 할 수 없는 특정 색상에 치우친 어둠을 만든다. 요즘 순수한 어둠은 없다. 오염된 것은 단지 공기가 아니라 어둠이다. 그래서 사진가는 순수한 어둠을 추구하기 시작했지만 빛과 어둠의 뒤섞임에 휩쓸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밤과 어둠의 화가 렘브란트(Rembrandt)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의 유명한 작품 〈야경(프란스 반닝크 코크 대위)〉(1642)은 오랫동안 밤 풍경을 묘사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페인트를 걷어내보니, 그것은 낮을 표현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것은 어두운 안뜰에서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곳으로 나아가는 머스킷 총병들의 파티였다. 어두운 오해가 오랫동안 이 그림을 둘러싸왔다. 그는 인기 있는 화가이자 부자였지만, 사치스러웠고 그의 인생은 비참하게 끝났다. 마침내 그는 이름없는 무덤에 가난한 사람으로 묻혔다. 죽은 지 20년이 지난 지금, 그는 사라졌고 파괴되었다.

어둠의 사진가는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시각적 언어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둠의 사진가는 어둠의 언어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사진의 내용이 시각적 언어로 묘사된 것으로 생각해왔다. 내러티브 방식으로 인식되고 해석될 수 있는 것이 그 내용이라고 생각해왔다. 이론가와 비평가조차도 사진이 말하는 것을 읽으려고 한다. 이 순간부터 사진의 내용은 빛과 어둠의 투쟁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이 투쟁의 역사는 기술, 예술, 인문학 및 사회적 관행의 복잡한 라인을 따라 얽혀있다. 어둠의 시대는 토마스 에디슨(Thomas Edison)에 의해 1890년에 전구가 발명된 이래로 빛의 시대에 굴복하였다. 그러나 어둠은 LED 조명의 시대인 21세기에 여전히 배회하고 있다. 그래서 김신욱은 어둠의 괴물뿐 아니라 빛의 괴물도 길들인다.

그의 사진 속의 빛은 기계적으로는 재현할 수 없는 섬세한 방식으로 준비되고 실현되기 때문에 소중한 실재물이다. 그래서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유명한 글로 속단하기 전에 김신욱의 작품이 공개될 때까지 기다렸었어야 했다. 그는 전통적인 예술 작품의 아우라가 이미지 재현의 기술적 수단의 출현과 함께 파괴되었다고 했다. 그가 알아채지 못한 것은 이미지를 만드는 기술적 수단의 미묘한 배치는 재현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기술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상황은 벤야민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다.

끝없는 일련의 이미지(series of same images)를 만드는 기술적 재현은 없다. X선, 자외선 및 적외선을 사용해야만 탐지할 수 있는 미세한 차이들이 있다. 따라서 기술 재현성이라는 포괄적인 용어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주의해야 한다. 김신욱도 그렇다. 그의 사진은 신중한 발자국으로 제작되어 어둠 깊숙한 곳으로 인도한다. 그의 작품을 보는 사람 또한 조심해야 한다. 카메라 장치 덕분에 김신욱이 연출한 세부 사항들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21세기의 사진가에게는 20세기 초기의 사진가와는 다소 다른 임무가 주어진다. 그는 이미지 생성의 기술적 수단을 다른 존재론적 근거에 둔다. 그는 어둠의 소리를 듣는다. 그는 누구도 완전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객관적 세계의 이야기를 듣는다. 오랫동안 인간은 그것을 무의미하고 불길하며 어둡다고/흐리다고 비하해왔다. 김신욱은 어둠의 미덕을 되살린다. 밝은 빛 아래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윤곽을 볼 수는 없을까?

조용하고 소음 없는 이 귀중한 보석의 미덕은 오랫동안 잊혀져 왔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잠들 수 있다. 그 때 우리 내부의 사이렌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것에서 평화를 찾을 수 있다. 김신욱의 사진은 어둠의 가치를 다시금 발견한다는 점에서 역사적이다. 그의 사진에서 몽유병자는 행복하다. 그는 목적지와 모든 경로를 알고 있고 우리는 그저 따라갈 뿐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