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하고
둘러대면서 순간을 생성하라!
우리
모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다양한 관계와 상황, 환경이라는 무대 위에서 매번 다른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지금, 당신이 전시장에 서서,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 인양하고 있는 것처럼요. 이건 제가 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 사회 심리학자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의 말이에요. 인간은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자신의 설정, 외모, 태도를 바꿔가면서 각 각의 관계에게 적절한 인상을 형성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해요. 이를 ‘상황 정의(The
Definition the Situation)’라고 부르죠. 150 년도 넘은 이 사회심리학
이론을 언급하는 것은 “진짜” 자아란 허상에 불구하고 상황에
따른 “상황적” 자아들만 존재한다는 통찰 력을 보여주고 있어서에요.
일터에서, 학교에서, 집에서
수행되는 사회적 역할에서부터 연인, 가족, 친구, 동료, 지인 등 내밀한 감정적인 영역에서 이르기까지 우리의 모습은
어떤 상황이나 관계에 따라 알게 모르게 다변화한다는 것이죠. 이런 관점에서 저는 작가의 시도가 일차적으로는 (고프먼의 책 부제이기도 한) ‘일상이라는 무대에서 우리가 어떻게
연기하는가’를 〈클럽 리얼리티〉를 통해서 전략적으로 제시하려는 것은 아닌가 되묻게 돼요. 여기서는 프리랜서 CF작가, 누드모델, 대학 5학년, 이자카야
알바생, 고 등학생 등 가상의 정체성을 (스스로) 설정하고 새로운 아이덴티티로 낯선 상황들을 매주 마주하게 돼요. 평상시라면
본능적으로 작동할 자아 연출이 이곳에서는 매 순간 무너짐으로써 오히려 인지하게 되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관계
혹은 상황 안에서 삐그덕거 리며 대응하고 틈을 메꿔나가며 미끄러지는 모습의 자기들이 출현하는 과정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사회 안에서 매 순간 반응하며
연기하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랄까요. 어떤 참여자는 “사실은
나의 삶 전체가 가짜인데, 나를 그대로 표현하면 될 텐데 그게 왜 어려운지...”라는 자조 섞인 글을 일기장에 적었더군요.
그런데
작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차원 더 나아가는 듯합니다. 10주간의 에피소드는 매회 특별한 상황을
제시하는데요. ‘마시다 만 술병들’ 에피소드를 그 예로 들어보죠. 숨기고 싶은 기억을 쪽지에 적고 제비뽑기 한 후 다른 사람의 기억을 마치 본인이 겪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골자예요. 쪽지에 적힌 몇 가지 단서를 갖고 즉흥적으로 상상해서 둘러대야 하는 것이죠. 기억이란 앞서 지아의 리얼리티쇼 에피소드처럼 왜곡되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가상의 ‘나’가 만들어낸 기억이라는 전제가 붙습니다. 그리고 타인의 상상을 통해 재구성되는 과정을 다시 거치게 되는 거죠. ‘과거의
경험(사실) → 왜곡된 기억 → 가상의 정체성에 의한 변주 → 타인의 상상으로 재구성’ 단계를 거치면서, 본질은 사라지고 그럴듯하게 둘러대는 상황만이 남게
되는거죠! 작가의 말로 대체하자면 “모든 데이터들은 손실되고
휘발되는” 것이죠. 재밌지 않나요? 결국 애초의 사실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 단서들을 이어가며
허우적거리고 재조직하려고 연기하는 과정에서 생성되고 창발하는 순간들의 번뜩임만이 중요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작가의 의도는 정체성이나 기억이라는 본질 자체가 아니라, 이것을 순간마다 다르게 창발시키는 관계들의
지형도를 포착하는 것에 있다고 봅니다. 〈클럽 리얼리티〉와 상호참조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Rabbit Hole 2052〉(2022)의 경우 '프리퀄'이 라는 설정을 갖고 있죠.
다시 말해, 본 편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상상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클럽 리얼리티〉 역시 다섯 개의 코드와 600여 장의 현장 사진과 400페이지가량의 증언록, 200여 장의 그림과 인터뷰 등 무수한
기록으로만 존재하죠. 그 파편화된 증거로 구현된 전시장에서 우리는 〈클럽 리얼리티〉의 본질을 찾으려고
애쓰지만 무위로 그치며, ‘순간들’을 따라서 어렴풋이 유추해
볼 따름인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