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는
현실을 재현하기보다, 그 미끄러짐과 붙잡히지 않음을 드러내는 데 관심을 둔다. 그의 작업은 리얼을 교란하고 비틀며, 관객으로 하여금 새로운 현실의
층위를 조각하게 만든다. 이때 박관우가 현실을 미끄러뜨리는 도구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어떤 순간에는 VR이고, 다른
순간에는 AI, 혹은 퍼포먼스가 된다. 때문에 박관우를 특정한
매체로 범주화하기는 어렵고, 오히려 이 점이야말로 동시대 예술가로서 그의 실천이 가지는 강점이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박관우를 '비(非)매체적 예술가'로 읽어야만
할까? 이 글은 그의 최신작인 〈인간의 대화 6〉(2025)과 ‘인간의 대화’ 시리즈, 그리고 〈도슨트 프로그램〉(2025)을 중심으로, 박관우 작업의 '기술적 토대
(technical support)'를 크라우스의 매체 이론과 연결하여, 그가 실재의 미끄러짐을
어떻게 직조하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I don’t know why it works… but it does.” — 오류로
작동하는 시스템
유튜브에
떠도는 한 밈(meme) 영상이 있다. 화면 속 개발자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코드를 바라보다가 이렇게 중 얼거린다. “I don’t know why it works…
but it does.(왜 그런지 나도 모르겠지만…이거 작동하고 있어)” 그는 코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프로그램은 어떻게든 결과를
내고 있고, 그 앞에서 그는 말을 잃는다. 그의 ‘인간의 대화’ 시리즈를 보고 있으면 이 밈이 떠오른다. 인간과 AI의 말이 뒤섞이고, 누가
말했는지도, 왜 그런 말이 나왔는 지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대화는 작동하고, 감정은 전달된다. 밈과 그의 작품 사이
다른 점이 있다면, 밈 속 개발자는 도달하고자 하는 결과를 상정하고 코드를 설계하지만, 박관우의 설계는 처음부터 의도를 배제한 채로 알고리즘을 짰다는 지점일 것이다.
프롬프트는 본래 ‘의도된 입력값’을 통해 ‘예측 가능한 출력값’을 얻으려는 구조다. 그러나 박관우의 작업에서 그 출력은 어긋나거나, 도달하지 않거나, 혹은 지나치게 도달한다. 박관우 작가의 작품은 작동한다. 하지만 그것은 통제된 실행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성과 의미의 불안정성을
포함한 작동이다. 그는 “삶에 덧대어진 장치들”을 통해 “뚜렷하게 보이는 것들을 흐리게 만들고, 멀쩡해 보이는 것들에 균열을 내며, 오류를 발생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고 설명한다. 관객은 그 안에서 정해진 답을 받아들이는
관람자에 머물지 않고, 실행과 오류를 감내해야 하는 코드가 된다.
비디오와
나르시시즘 — 거울 앞에 선 자아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는 「비디오: 나르시시즘의
미학 (Video: The Aesthetics of Narcissism)」 (1976)에서 1970년대 비디오 아트의 본질을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폐쇄적 회로, 즉 나르시시즘적 구조로 규정하며, 이를 라캉의
상상계 개념과 연결시켰다. 그는 비디오의 매체특정성을 테이프 릴이나 렌즈와 같은 물리적 조건보다는 심리적
조건으로 분석하며, 외부 대상(타자)에 대한 주의를 철회하고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되돌리는 나르시시즘 적 자기반영적 특징을 비디오의 매체적 핵심조건으로
보았다. 반복적으로 화면의 중앙-이자 나 자신-을 가리키는 비디오 영상, 비토 아콘치(Vito Acconci)의 〈중심(Centers)〉(1971)과 같은 작업은 이러한 자기 응시 구조의 전형이다.
박관우의
‘인간의 대화’ 시리즈는 이러한 구조를 재현하면서도 그 구조의
경계를 해체하거나, 또는 극대화하여 드러내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인간의
대화 1〉(2018)은 인공지능 챗봇 간의 대화 내용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문장을 두 명의 인간 배우들이 주고받는 형식으로 구성된다. 스크린에 등장하는 두 명의 배우는
서로 간단한 인사부터 시작해 약 7분가량 다양한 대화를 주고받는다. 이들이
말하는 대화에서 말은 오가지만, 어느 부분이 인간의 것인지, 어느
부분이 AI의 것인지 구분되지 않으며 대화는 성립하지만, ‘이해’는 발생하지 않는다. 관객은 대화가
'작동'하고 '감정'이 전달되더라도, 그 주체가 인간인지 AI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인간의
대화2〉(2018)는 이 구조를 시각적으로 더욱 분명히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 한 인물은 챗봇으로 구성된 대본을 읽어나간다. 이 인물이
등장하는 스크린(비디오)는 거울에 밀착된 상태로 설치되어
있고, 영상의 자막은 좌우 반전된 채 제시된다. 관객은 오직
거울을 통해서만 인물의 모습을 확인하고, 자막 또한 거울을 통해서만
'정상 적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자막은
과연 똑바른 것일까? 자막은 문법적으로 이해 가능하지만, 그
말의 주체는 불분명하고, 말이 발화되는 맥락은 지워져 있다. 여기서
말은 소통이 아니라 오류와 반향으로만 구성된 언어기계가 된다. 라캉이 말한 ‘거울 단계’는 유아가 외적 이미지(거울
속 자기 형상)를 동일시하면서 자아를 ‘통합된 전 체’로 인식하는 시점이지만, 이 통합은 본래부터 허구적이다. 박관우의 〈인간의 대화2〉에서 보여지는 거울 속 상(이 미지)은 자아를 고정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언어적 지연과 반전 구조를 통해 주체의 분열성과 언어의 미끄러짐을 드러낸다. 즉, 이곳에 남는 것은 통합된 자아가 아니라, 언어와 주체가 어긋나며
끝없이 재조합되는 불완전한 재 현의 장면이다.
〈인간의
대화 5〉(2024)는 이러한 어긋남을 ‘감정’의 층위로 확장한다. 이
작품은 심리극의 형태로, 미국의 심리학 자 아서 아론(Arthur
Aron)이 제안한 '사랑에 빠지기 위한 36개의
질문' 중 일부를 차용한다. ‘사랑에 빠지기 위한 36 개의 질문’은 감정의 밀도를 높이는 장치이지만, 인간 참여자(인터프리터)의
즉흥적인 답변과 인공지능(AI)이 생성한 답변이 혼합되어 제시되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이 인간의
것인지, AI의 것인지는 마찬가지도 구분되지 않는다. 영상에
등장하는 두 명의 인물은 멜린다, 맥신, 솔로몬 마르코니, 맥스, 바람과 함께 움직이는 자,
르네 등 여섯 개의 가설적인 정체성에 빙의하여 즉흥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이러한 설정은 작가의 이전 작품들('녹색등대(2022-2023)', '클럽 리얼리티(2022)')에서 임기응변을 통해 정체성이 생성되도록 만들어지는 구조를 차용한다. 자아는 프롬프트 기반의 즉흥극으로 조립되고, 주체는 더 이상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입력에 따라 구성되는 함수처럼 작동한다. 관객은 감정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보다, 그것이 어떻게 구성되었는가를 감각하게 된다.
〈인간의
대화6〉(2025)은 대화의 ‘조건’ 자체를 해체한다. 안개가
자욱한 방 안, 관객은 어디서 들려오는지도 모를 어설픈 피아노 소리를 듣게 된다. 흘러나오는 곡은 비치 보이즈(The Beach Boys)의 브라이언
윌슨(Brian Wilson)이 작곡한 “God Only Knows(오직
신만이 아신다)”. 반대편에서는 누군가가 그 가사를 더듬거리며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리지만, 피아노 연주와 노랫소리는 반복해서 맞닿았다가 어긋나기를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언어는 점차 제거되고, 감정과 의미를 구성하는 리듬은 점점 흐트러진다. 이는 ‘감정의 실패(failure
of affect)’가 구조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이며, 소통이 어긋나면서도 완전히 끊기지는
않는 미묘한 간극을 만들어낸다. 조앤 조나스(Joan Jonas)의
〈수직 롤(Vertical Roll)〉(1972)이 카메라와
모니터 간의 영상 신호를 탈동기화(de-synchronization)시켜 비디오라는 매체의 시간성과
기반을 드러냈듯, 박관우의 〈인간의 대화 6〉은 언어와 감정, 음성과 가사의 동기화를 해체함으로써 ‘대화가 불가능한 조건’을 청각적으로 드러낸다. 다만 이 비동기화는 완전한 해체가 아니다. 어느 순간 둘은 일치하고, 다시 엇갈리기를 반복한다
이러한
비동기화는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와 낸시 홀트(Nancy
Holt)의 실험적 비디오 작품 〈부메랑(Boomerang)〉(1974)에서의 불일치와도 유사해보인다. 말하고 듣는 주체의 시간성을
해체하는 이 작업에서 세라는 홀트에게 헤드셋을 씌운 채 그녀의 말을 녹음한 뒤, 그 사운드를 약간의
지연을 두고 다시 들려준다. 홀트는 자신의 목소리를 실시간으로 말하면서도 동시에 딜레이된 반향을 듣게
되고, 그로 인해 말하기와 듣기가 충돌하면서 언어적 혼란을 겪는다. 여기서
언어는 의미 전달의 도구라기보다, 자신의 목소리에 의해 자기 자신이 침식되는 경험을 만 들어낸다. 세라는 이를 통해 ‘말하기-듣기’라는 소통의 구조, 그리고 자아와 감각의 일치라는 환상을 무너뜨린다. 박관우의 〈인간의 대화 6〉은 이러한 구조를 감정의 층위로 전환하면서, 중요한 차이를 드러낸다. 이 작업에서 피아노 소리와 흥얼거리는 노랫말은
반복적으로 어긋나지만, 그 어긋남은 완전히 폐쇄된 것이 아니다. 두
요소는 간헐적으로, 스치듯 만나고 다시 멀어진다. 이 미묘한
리듬의 어긋남은 단지 동기화의 실패가 아니라, 소통이 불가능해 보이는 조건 속에서도 가능성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지점을 조형한다. 즉, 세라가 되돌아오는 사운드
지연을 통해 폐쇄적인 순환 구조를 드러낸다면, 박관우는 사운드와 가사의 어긋남 속에서 ‘불가능성 속의 가능성’을 감정의 리듬을 통해 어슴푸레하게 제시한
것이다.
크라우스는
나르시시즘 구조를 해체하는 예외적 사례로 피터 캠퍼스(Peter Campus)의 〈문(door)〉(1975)을 언급한다.
이 작품에서는 관객의 신체 이미지가 실시간으로 폐쇄회로 모니터에 투사되지만, 관람자는 그가
방을 떠날 때 또는 문턱에 멈춰있을 때만 이미지로 등록된다. 이는 자기 자신과의 지각적 충돌을 유도하여
모니터의 거울 반사를 절대적 타자, 즉 외부 세계로 치환하며, 자기
자신이 더 이상 그 표면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자각을 가능 하게 하는 구조다. 박관우의 〈도슨트 프로그램〉은
이러한 타자의 재도입을 제도적 관계 속에서 실험한다. 도슨트는 관객을 이름으로 부르고, 체온을 나누고, 거리감을 허문다.
관람자와 해설자 사이의 경계는 무너지고, 제도적 역할극을 통해 관계의 실재를 묻는 상황이
연출된다. 이는 “실재는 애초에 마주칠 수 없는 것이고,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저해상도로 현상(rendering)한
것이다”라는 작가의 언급과 맞닿는다.
‘인간의
대화’ 시리즈가 기계의 언어를 통해 대화의 실재를 묻는다면, 〈도슨트
프로그램〉은 제도적 관계를 통해 관 계의 실재를 묻는다. 두 작업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거울효과와 타자의
개입 그리고 관계를 통해 “실재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동일한
질문을 향한다. 우리는 여전히 응답하고 있고, 듣고 있으며, 이 구조 안에서 ‘대화’라고
믿고 싶은 무언가를 지속하고 있다.
감정과
실재에 대한 튜링 테스트
앨런튜링(Alan Turing)이 고안한 사고실험 튜링 테스트(Turing
Test)(1950)는 기계가 인간과 얼마나 유사하게 지능적인 행동을 보일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대화의 상대방이 인간인지 기계인지 구분할 수 없게 만드는 것에 중점을 둔다.
박관우 작가는 이 개념을 자신의 작업에 도입하고 탐구한다.
박관우가
참여한 전시 《튜링 테스트, AI의 사랑고백》(2022)에는
튜링테스트의 개념이 명시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이는 그가 튜링 테스트라는 개념을 자신의 작품의 주제로
직접 다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의 대화’ 시리즈, 특히 에서는 말은 오가지만, 어느 부분이 인간의 것인지, 어느 부분이 AI의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 강조되는데, 이는 튜링 테스트의 핵심 전제인 '구분 불가능성'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이다. 〈도슨트 프로그램〉(2024)에서는 도슨트가 사람의 행세를 하는 존재이며, 도슨트가 사람인지
아닌지는 영원히 밝혀지지 않는다는 설정이 있다.
이는 도슨트가 마치 튜링 테스트의 피실험자처럼 인간인지
아닌지 알 수 없게 설정되어 있음을 보여주며, 관객에게 "이
관계는 진짜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튜링테스트에
대한 반론으로 유명한 존 설(John Searle)의 중국어 방 논변(Chinese
Room Argument)(1980)은 기계가 단순히 규칙에 따라 기호를 조작하는 것(구문론)이 진정한 이해(의 미론)를
수반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는 박관우의 작업에서 '코드가
작동하는 방식'과 '진정한 이해'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긴밀히 연결된다. 서두에 언급했 듯이
박관우의 작업에서 코드는 왜 동작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도달했을 때, 또는 도달하지 못했을 때. 박관우의 코딩은 관객을 어떤 결과값으로 데려 다 놓을지 알 수 없다. 이는
시스템이 '작동'하고 '감정'이 전달될지라도, 그 이면에 '이해'가 부재하거나 미끄러질 수 있음을 시사하며 중국어 방 논변의 핵심을 건드리고 있다.
〈인간의
대화5〉는 응답자의 정체를 지운다는 점에서, '누가 말하는가'보다 '무엇이 말하는가'에
집중하게 한다. “정체성과 기억, 감정에 대한 응답은 인간의
것도, 기계의 것도 아니다. 자아는 프롬프트 기반의 즉흥극으로
조립된다"는 작가의 작품에 대한 설명은, 진정한
자아나 이해 없이 '프로그램'('프롬프트 기반의 즉흥극')에 따라 '출력'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존 설의 중국어 방 논변이 제기하는 '흉내
내기'와 '진정한 이해'의
차이에 대한 질문을 심화시킨다. “프롬프트에 의해 호출된 기억과 AI가
설계한 말로 구성된 응답은 과연 ‘진짜’일까? 감정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시뮬레이션된 감정의 장면화일 수도 있다”는 지적은 중국어 방 논변의 비판과 매우 유사한 질문을 환기시킨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그의 작업을 크라우스의 또 다른 논의로 확장해볼 수 있다. 『북해에서의 항해(A Voyage on the North Sea)』에서 크라우스는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의 매체(medium)개념이 가진
환원주의적 특성에 대해 지적하며, 매체의 의미가 특정한 재료나 형식이 아니라 그 매체의 기억과 역사, 그리고 시간성이 제공하는 ‘토 대(support)’의
조건에 있다고 보면서 기술적 토대(technicalsupport)를 개념화 시켰다.
그는
『언더블루컵(Under Blue Cup)』에서도 매체는 하나의 ‘기억
구조(memory structure)’이며, 그것이 이미지가
작동하는 조건, 즉 기술적 토대와 결합된다고 말한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박관우의 매체는 단순히 비디오, 또는 VR 이
아니라 ‘알고리즘과 코딩’ 자체일 수 있다. 그의 작업은 감각의 구조를 조작하고, 상호작용을 설계하는 기술적
구성물이다. 그가 사용하는 알고리즘, 음성 합성, 자막 처리, 프롬프트 체계 등은 단지 보조적 수단이 아니라, ‘기억의 매체이자 작동의 조건’으로서 기능한다.
앨런튜링의 '튜링테스트' 혹은 존설의 '중국어
방' 사고실험은 물리적 컴퓨터 없이도, 인간-비인간 간의 이해 가능 성, 그리고 의미 생성의 조건에 대한 기술철학적
물음을 던지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기계의 실존’보다 기계적 작동 방식에 대한 상상을 통해 인식론적 전환을 유도한다. 마찬가지로
박관우의 작업 역시 알고리즘이나 인터페이스 가 전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그 작동의 전제는 철저히
프로그램적이며 시스템적이다. 그는 ‘기계가 없어도 기계적으로
사유하는’ 예술을 실현한다. 이 지점이 많은 이들이 박관우를 ‘미디어 아티스트’(이 용어가 너무나 많은 미를 교집합으로 포괄하여
이미 오염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로 여기게 되는 특징점이며, 이는
물질성에 기반한 기술을 사용한 것을 ‘미디어 아트’로 읽는
것보다 더 옳은 용어의 사용일지 모른다.
박관우의
작업은 관객으로 하여금 일정한 입력값(prompt)에 대해 반응하게 하는 일종의 실험적 환경을 제공한다. 여기서 관객과 작품을 연동시키는 일종의 퍼포머, ‘인터프리터’가 등장하는데, ‘인터프리터’란
단지 작가의 코드를 수행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조건 안에서 오류와 반응을 수행하는 구조적 노드다. 다시 말해, 인터프리터는 기계일 수도, 인간일 수도 있으며, 중요한 것은 의미의 발생이 아니라 실행의 조건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박관우의 작업은 감정, 언어, 관계, 역할극
등을 입력값으로 삼고, 그로부터 생성되는 반응, 균열, 실패, 그리고 오작동을 ‘작동’이라 부를 수 있는 시스템 속에 배치한다.
그의
작업에서 인터페이스와 알고리즘은 단순히 결과를 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프롬프트’와 ‘응답’ 사이의 감각
적 조건을 조율하는 기억 구조이자 실행 구조다. 자막의 좌우 반전, 피아노와
가사의 어긋남, 감정 유도를 위한 주파수 설정, 오류를 포함한
인터프리터의 작동 등은 모두 의미와 감각이 작동하는 기술적 시뮬레이션의 조건으로 설계되어 있다. 그는
이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시스템을 설계하면서도, 동시에 작동 가능성만은 유지하는 알고리즘적
구조를 통해 ‘실재’의 인식 조건을 조정한다.
박관우의
예술은 프로그램(program), 프롬프트(prompt), 시스템(system)이라는 삼항 구조를 경유하여 작동한다. 그는 작품이 작동하는
방식, 작품 안에서 관계가 설정되는 방식, 감정이 유도되는
방식 모두를 프롬프트와 코드, 해석과 실패, 반응과 오작동이
상호 교차하는 망-즉, 알고리즘에 기반한 시스템-으로 설계한다. 결론적으로 박관우는 이러한 알고리즘 기반 시스템을
통해 ‘사고실험’이라는 매체적 조건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단지 비판적 주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을 그 구조 속에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사고실험을
현실화하며, 기술적 장치를 심리적·사회적 실험의 장으로 전환한다. 〈인간의 대화〉는 대화의 실재를, 〈도슨트 프로그램〉은 관계의 실재를
실험한다. 그리고 이 일련의 실험은 그의 ‘사고실험’이라는 매체 위에서만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박관우의 예술이 동시대의 ‘기술적 감각 조건’을 탐색하는
방식이며 감정의 리듬, 언어의 탈구, 관계의 어긋남은 모두 ‘작동하는 시스템’이라는 알고리즘적 매체의 내부에서 발생한 현상이다. 이는 프롬프트와 프로그램, 시스템이 예술의 구성 요소로 확장된 예로, 크라우스가 말한 ‘기억 구조로서의 매체’를 동시대적으로 구현하는 실천으로 읽힐 수 있다. 결국 ‘인간의 대화’ 시리즈와 〈도슨트 프로그램〉은 ‘감정과 실재에 대한 튜링 테스트’이며, 동시에 기술적 매체의 조건 아래에서 감각 가능한 실재(real)의
임계치를 탐색하는 작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