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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조각하는 인간 (《Passion. Connected.》 (아카이브 봄) 전시 서문)
2017
윤원화 | 시각문화 연구자

《Passion. Connected.》(아카이브 봄, 2017) 전시 전경
©서울시립미술관
조각은 회화와 더불어 미술의 고전적 형식으로 손꼽히지만, 설치 미술이나 건축 또는 조경의 일부가 아닌 단독적 대상으로서 조각이 존재할 여지는 의외로 협소하다. 회화는 동서를 막론하고 오래전부터 화가의 정신적 창조물로 그 자율성을 인정받았던 반면, 조각은 아직도 무언가의 기념비로서 재현 대상에 종속되거나 장소 만들기의 수단으로 쓰일 때가 많다. 또한 조각은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조건에 강하게 결부되어 있어서 관련 기술을 어느 정도 숙련하지 않으면 애초에
진입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렇게 기술적인 과업이기 때문에 물질의 생산과 처리에 관련된 산업적 기술이
분야 내로 침투하는 것을 차단하기도 어렵다.
그런 까닭에 조각의 곤경은 회화보다도 오히려 사진과 더
많은 유사성을 보인다. 분야 내에서 순수 계열과 실용 계열에 대한 관습적 구별이 존재하지만 그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 사회적으로 아직 그 쓸모가 완전히 소진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자율적 예술로서의
위상을 주장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점, 기계의 사용에 대한 불안이 종종 어떤 정신적 가치나 비숙련적
표현, 또는 우연적 효과에 대한 추구로 표출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진가가
사진 기계가 아니어야 하는 것처럼, 조각가는 조각 기계가 아니고자 한다. 하지만 어떻게? 조각가의 몸은 어떻게 해야 조각하는 기계로 환원되지
않을 수 있을까? 조각가의 사물은 어떻게 해야 기계로 만들어진 다른 수많은 사물들과 구별될 수 있을까?
문이삭은 스스로 기계가 된다 또는 기계로부터 배운다는 역설적 접근으로 이 곤란에 대응한다. 다만 스승을 기계처럼 본받는 제자가 아니라 스승을 서투르게 흉내내어 예기치 못한 사태를 개방하는 마법사의 제자와
같은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 문이삭의 합성수지 조각은 3D 모델링
소프트웨어와 컴퓨터로 통제되는 CNC 커팅 기계의 작동 방식을 모방하여 그와 다른 결과를 얻어내는 시행착오의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다.
작가는 컴퓨터 프로그램과 관련 장비들, 각종
플라스틱 소재들을 아주 능숙하게 다루지는 못하는 미숙련자의 위치에서 산업적 조각의 방법을 수작업으로 재연하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 속에서 무언가 쓸만한 것, 또는 어쩌면 아름다운 것을 찾아 다음 작업으로
되먹임한다. 그러니까 로봇 댄스를 추듯이 단순히 산업적 방식과 스타일을 차용하려는 것도 아니지만, 일방적으로 그래픽 툴과 산업 장비를 예술의 수단으로 전용하려는 것도 아니다.
작가는 무언가 찾고 있다. 재료와 도구를 다루고 형태를 만드는 고전적 방식을 벗어나되 자신의
눈과 손이 만족스러운 어떤 새로운 배치를 찾아서, 그는 자신의 몸을 기계에 맞추어 본다.
문이삭은 이 같은 작업 방식을 2016년
가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아시아 창작공간 네트워크 전시 《아시아 쿨라쿨라-링: 자기조직 하는 우주》에 참여한 공간 사일삼의 〈저-장소〉에서 처음
선보였다. 공산품으로 판매되는 육면체 형태의 스티로폼 소재(아이소핑크, 네오폴 등)에 3D 모델링
소프트웨어에서 제공하는 기본 형태들(원통, 토러스, 주전자 등)의 다중 시점 뷰 이미지를 임의로 투영하여 열선으로 깎아내고
채색 후 에폭시 코팅한 것으로, 작가는 이를 〈표준원형〉이라고 명명했다. 이 방법은 2017년 연초에 두산갤러리에서 열린 단체전 《사물들: 조각적 시도》에서 〈확장원형〉, 〈팔과 손〉, 〈세례요한의 두상〉이라는 일련의 작업으로 발전되었다.
이 작업들은
〈표준원형〉에서 테스트한 방법으로 어떻게 조각 작업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일종의 튜토리얼처럼 구성되었다. 그러니까
〈확장원형〉에서는 삼차원의 기본 형태들을 스크린 상에 보이는 대로 스크린 바깥의 스티로폼 덩어리에 적용하여 제3의
형태를 창출하는 커팅 방법을 연습한다. 이를 바탕으로 〈팔과 손〉에서는 인체의 손과 팔 부위처럼 좀
더 복잡한 형태에 도전해 본다. 인터넷에 유통되는 무료 3D 모델링
소스 중에서 다양한 손과 팔 형태를 수집하여 동일한 커팅 방식으로 가공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례요한의
두상〉에서는 여태까지 연습한 방법들을 총동원해서, 고전 회화에 표현된 세례요한의 두상 이미지를 삼차원
입체로 구성해 본다.
문이삭, 〈세례요한의
두상 6〉, 2016, 발포폴리스틸렌, 아이소핑크, 에폭시, 레진, 안료, 탈크, 32x43x37cm
©두산아트센터
이처럼
《사물들》의 작업들은 기계를 흉내내는 연습에서 출발하여 인체 표현과 미술사적 선례의 복습으로 나아감으로써 마치 고전적인 조각의 방법을 재발명하는
과정처럼 연출되었다. 그러나 작업 하나하나를 놓고 보면, 산업적
생산과 조각적 전통이라는 두 개의 참조점은 각각의 사물들에 이중으로 투영되어 있을 뿐 하나로 종합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세례요한의 두상〉을 보자. 작가는 이 작업에서 매끈한 에폭시 코팅으로 커팅된 단면을 강조하는
대신 다양한 소재를 혼합한 두터운 물질적 표면을 덧입히는 새로운 표면 처리 기법을 도입했다.
이 표면은
이차원 평면으로 가공되어 삼차원 형태 위에 씌워지는데, 그 과정에서 원래의 이미지와 형태는 자연스럽게
뒤틀리고 뭉개진다. 작가는 이를 3D 모델링 소프트웨어에서
삼차원 형태 위에 비트맵 이미지를 덧씌워 다양한 질감을 부여하는 매핑의 과정에 대응시킨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이 같은 처리 과정은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되지 않는 인체의 질감, 특히 목이 잘린 단면의 비정형성을 표현하기 위해 거의 불가피한 것이기도 했다.
잘린 머리는 이상화된 두상과 다르다. 그것은 인체의 형태에 익숙하지 않은 눈에 돌 덩어리와
크게 다를 것도 없는 울퉁불퉁한 덩어리일 뿐이다. 여기서 두텁게 처리된 표면은 그 덩어리에 ‘세례요한’의
피와 살, 그리고 어쩌면 영혼을 부여하는 수단이 된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될까? 아이소핑크와 레진이 우리 시대의 대리석과 브론즈가 되어 조각에 새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여기서
문제는 합성수지가 미적 매체로서 전통적인 조각의 소재만큼 잠재력이 있는가가 아니다. 오히려 진짜 문제는
조각가가 조각을 하기 위해 기계를 흉내내는 시대에 인체가 조각의 특권적 주체이자 대상으로서 제 위치를 지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인간 찬가를 부르짖던 지난 시대로부터 너무나 먼 곳에 있다.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 되었는가? 지금 조각가는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 이
두 개의 질문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적어도 평창 동계올림픽의 슬로건을 뜬금없이 제목으로 내세운 문이삭의
두번째 개인전 《Passion. Connected.》에서는 그렇다.
바야흐로
기계의 힘이 숭고하게 다가오던 19세기 말에 "더
빨리, 더 높이, 더 강하게" 움직이는 인체를 축복하고 한계에 도전하는 인간을 찬미했던 올림픽 정신은 21세기 초에 이르러 선뜻 믿기 힘든 것이 되었다. 약동하는 몸들은
조각나고 훼손된 인체의 파편이 되어 전시장에 흩어져 있다. 원래 각각의 작업은 올림픽과 관련된 특정한
인물로 구상되어, 이 인물들의 구체적 설정, 이들이 각각
어떤 장치를 사용하고 어떤 껍질을 걸치는가 하는 일종의 캐릭터 디자인이 동료 작가인 김웅현에게 외주로 맡겨졌다.
하지만 그 내역은 전시장에서 거의 알아볼 수 없이 축소되었다. 결과적으로 문이삭이 만든
사람 비슷한 것들은 그저 1번부터 10번까지 숫자가 매겨진
물질 덩어리 또는 쭈그러진 껍데기로서 아카이브 봄의 앙상한 공간을 채운다.
백색
전시장과 조각이라는 경건한 범주를 벗어난 이 사물들은 좀 더 플라스틱 같이 보인다. 반복해서 나타나는
손과 발의 파편들은 무엇도 움켜쥐지 못하고 어디로도 가지 못한다. 부분과 전체, 덩어리와 껍데기, 작업 재료와 작업 대상은 거의 아무런 필연성도
없이 교착되어 있다. 그것들은 스티로폼을 3D 모델링 데이터에
따라 CNC 조각기로 깎아서 에폭시 코팅하는 것이 백화점 쇼윈도 설치물에서 뮤직 비디오 세트의 소품에
이르기까지 한시적으로 필요한 장식적 덩어리를 빠르고 저렴하게 뽑아내는 방법으로 통용되는 현실 세계와 좀 더 가까이 있다. 문이삭의 작업들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또 부서지는 사물들의 순환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그런 순환의 세계를 함부로
부정하지도 못한다.
그는 다만 데이터와 플라스틱의 거의 자동화된 순환을 응시하고 그에 의식적으로 대응하면서, 거의 기생적으로 작동하는 또 다른 순환의 프로세스를 가동시킨다. 그것은
기계를 모방하지만 기계가 되지 못하는 작가 자신의 몸체에 의해 움직여지는 동시에 바로 그 몸체를 반영한다. 그러므로
바닥에 달라붙은 발들과 허공을 휘젓는 손들, 이 조각난 몸들이 무엇이 될 것인가는 결국 이 사물들의
창조자가 무엇이 되려고 하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더 빠르고 더 높고 더 강한 것이 아닌 다른 어떤
인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