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프레임》과 《뉴 타입》. 화려한 수식어는 제거된 채 최소한의 골격만 남은 듯한 간결한 단어들이다. 이는 각각 작가 이윤성의 개인전 제목으로, 그의 작품을 감상하고 해석하도록 이끄는 첫 번째 단어기도 하다. 만일 그의 작업을 보지 못한 채 제목만 접한다면, 아마도 다음 같은 측면에서 그의 작업을 감상하고 해석하려고 할 것이다.
지난 개인전 제목인 《뉴 타입》은 어떤 새로운 유형이나 형태에 대한 질문에 작가의 관심이 드러난다고 추측할 수도 있고, 이번 전시 제목인 《뉴 프레임》이라는 단어에서는 회화의 기본 형식으로서의 '캔버스'나 '틀' 같은 구조의 문제를 떠올릴 수 있다. 그렇다면 두 번의 개인전을 거치면서 이 작가의 작업적 관심사가 내용적인 것에서 형식적인 것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과감히 유추해도 좋을까? 그런데 이 간결하고도 의미심장한 제목 사이의 연관성에 대하여 언급하기 전에, 꼭 짚어갈 수밖에 없는 그의 작업적 특징이 일단 이 글의 발목을 붙든다.
전시장에서 만나게 되는 이윤성의 작업은 시각적으로 매우 '일본만화 같다'. '일본만화 같은' 그 이미지는 관람객의 작품 감상에 매우 강력하게 개입하고 작용한다. 《뉴 프레임》, 《뉴 타입》이라는 전시 제목에서 시작된 어떤 연상들을 앞서거나 혹은 철저히 가려버릴 수도 있고, 아니면 아예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을 만큼 특정적이기 때문이다.(물론 《뉴 타입》이라는 말 역시 일본만화의 용어를 작가가 가져온 것이다.)
더러는 작가에 대한 몇몇 오해의 빌미가 될 수도 있다. '일본만화'를 참조하는 비슷한 세대의 한국작가들이 피해가기 힘든 한정된 해석의 틀을 떠올리자면 말이다. 그런데 이윤성의 작업에서 '일본만화 같은' 이미지는 다소 복잡하다. 그 복잡함을 이야기할 단서를 찾기 위해 다시 '제목'으로 되돌아간다. 다름 아닌 '작품'의 '제목'이다.
이번 전시작 제목은 ‘다나에’ 시리즈다. 잘 알려졌다시피 다나에는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이다. 그녀의 아버지인 아크리시오스 왕이 외손자가 자신을 살해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그녀를 지하 방 안에 가두지만, 황금비로 변신한 제우스에 의해 결국 아들 페르세우스를 낳는다. 다나에는 그리스 신화의 내용인 동시에 서양미술사 속에서 빈번히 그려진 보편적인 도상 중 하나이다. 즉 이윤성의 작업에서 '일본만화'라는 이미지 아래 숨어 있는 중요한 참조물로 '서양미술사'가 자리한다.
이미 앞서 작가는 비너스 여신상에서 영감을 얻은 ‘토르소’를 비롯해, ‘최후의 심판’, ‘라오콘’, ‘수태고지’ 같은 서양미술사의 도상들을 작업에 꾸준히 참조해 왔다. 신화나 성경 내용을 가장 중요한 소재로 다뤘던 서양미술사 속 작품들은 대부분 고유의 전형성, 즉 타입을 가진다. '고전'이나 '도상'이라는 말 속에는 이 전형성이라는 의미가 이미 내포된 셈이다. ‘다나에’ 역시 코레조, 티치아노 같은 르네상스 화가들부터 네덜란드 바로크 화가인 렘브란트, 그리고 1900년 이후 클림트까지, 수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려 왔다. 그들의 작품에서 되풀이되던 전형성이란, 하얀 천이 깔린 침대 위에 기대어 누워서 황금비로 변신한 제우스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다나에의 모습이다. 즉 다나에는 서양미술사 속에서 빈번히 묘사되어 온 '대상화된 누드의 전형' 중 하나다.
이윤성은 다나에의 전형성에 대하여 나름의 방식으로 두 번의 재해석을 거친다. 일본만화 같은 그림의 표현 방식이 그 첫 번째 재해석이라면, 늘 수동적으로 묘사됐던 다나에의 감정에 주목한 점은 바로 작가의 두 번째 재해석이다. 황금비를 접하는 순간 다나에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주체이자 성격을 지닌 존재로 묘사하기 위해 인물의 '표정'에 집중한 점이 그렇다. 웃고, 화를 내고, 조바심이 난 듯, 다양한 표정으로 발랄하게 그려진 다나에는 특정 캐릭터를 참조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 자신의 방식으로 인간의 감정과 표정을 분할하여 그려냈다.
이윤성의 작업에 대해, 서양미술사 속 도상의 전형성을 일본만화 형식으로 재해석한 재치 있는 방식이라고 일반화시켜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양미술사'와 '일본만화'라는 전혀 다른 문맥이 하나의 회화적 표면에서 교차되는 이 혼성의 장면은, 앞서 언급했듯이 단순히 재치 있는 이미지 처리 방식의 문제를 넘어 한층 복잡한 지점으로 나아간다. 바로 재해석을 위한 참조물로서 단순히 일본만화 '같은' 이미지를 넘어 일본만화의 '전형성'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윤성의 ‘다나에’는 미술사 속 수동적인 다나에와는 달리 다채로운 감정을 기반으로 한 표정을 주체적으로 표출하는 여성으로 거듭나지만, 일본만화 속 여성캐릭터가 지닌 전형적인 특징들, 과도하게 풍만한 신체로 여전히 남성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시각적 기표로 탈바꿈된다.
'일본풍의 만화'를 일컫는 '망가'를 인터넷사이트에서 검색하면, 이용자의 연령에 따라 제한된 정보를 제공하는 상황이 증명하듯, 일본만화 역시 남성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표현 방식을 하나의 '전형성'으로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한국에서 일본만화가 위치하는 특징 중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그린 '일본만화 같은' 표현은 정확히 일본만화적이지도 않다. 대상화된 시각을 걸러내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에 의해서, 혹은 그의 작품을 본 어느 일본만화 전문가(이자 오타쿠)의 언급처럼, 오히려 '일본만화의 영향 아래서 만들어진 한국 만화'에 가깝다. 선정성을 희석시키기 위해 한국에서 만들어진 또다른 전형성 말이다.
서양미술사 속 고전적 도상의 전형성과 일본만화의 전형성이 맞부딪히는 혼성의 장면. 거기에 '한국'에서 성장하며 '일본만화'라는 보편적인 시각적 환경의 영향을 받았던 '한국작가' 이윤성의 회화 속 이미지에서 전형적인 다나에라는 기의는 미끄러지면서 일본만화의 전형성으로 대체되고, 이는 또다시 이미지라는 기표에 고정되지 못한 채 한국적인 일본만화 표현이라는 상태로 대체되며 미끄러지는 복잡한 기표에 가깝다.
이것이 이윤성이 보여 주는 참조의 하이브리드 이미지다. 더욱 주목할 점은 작가가 이를 '프레임'의 문제로 확장시키며 한층 유희하고 있다는 점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전형성'의 문제는 참조의 내용적 측면(타입)에서 나아가 '프레임'을 재해석하는 작가의 중요한 개념적 틀이 되고 있는 듯 보인다. 이제, 글의 서두에서 꺼냈던 '전시 제목'에 대한 얘기로 다시 돌아갈 때다.
이번 전시에서 이윤성은 회화 프레임을 분할시키고, 전시장 벽을 다시 화면 삼아 재조합해 설치했다. 그가 직접 제작한 틀을 따라서 캔버스는 반듯한 사각형을 탈피한다. '변형 캔버스'가 1950년대 모더니즘 이 미술사 속에 등장했던 순간을 우리는 물론 알고 있다. 그렇다고 이윤성이 변형시킨 캔버스가 다시 한 번 서양미술사를 중요한 참조물로 소환시키고 있다고 말한다면, 다소 과한 시각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변형의 실제 참조는 다시 일본만화로 향하면서 《뉴 타입》에서의 질문들을 자연스레 연결시킨다. 예상대로 그의 캔버스 프레임은 만화책의 페이지를 구성하는 컷의 분할을 참조한 것으로, 하나로 모이기도 하고 혹은 다른 방향으로 분산되기도 하는 각기 컷이 가리키는 선들은 작가가 바라보는 다른 소실점을 이룬다.
이제 《뉴 프레임》展은 작가가 이제 일본만화 같은 얇고 표면적인 기표를 가지고 차츰 '회화'라는 거대한 질문을 탐색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전시로도 보인다. 더욱이 전시장에 ‘다나에’ 연작과 함께 소개된 작은 소품들은, 만화의 컷에서 풍경이나 감정의 뉘앙스를 표현하기 위해 관습적으로 사용되는 유형들을 별도로 그린 것이다. 만화적 장치의 전형성, 즉 만화의 도상들이 회화의 추상이라는 장르로 기묘하게 연결된다.
이처럼 이윤성의 작업에는 추상과 구상, 캔버스와 평면 같은 회화의 오랜 질문들이 일본만화라는 참조의 틀을 거치면서 드러나고 있다. 다양한 참조물들이 부딪히며 야기되는 혼성의 모습이 어떻게 내용과 형식의 문제로 두루 확장되어 갈지, 작가가 과연 그 다음 과정을 어떻게 전개시킬 것인지 궁금해진다. 이윤성의 다음 전시의 제목은 무엇일까?
작가는 대화 중에 자신의 전시제목들이 어찌 보면 "말장난 같다"고 지나치듯 말했다. 그런데 그 아무것도 아닌 듯 흘린 말이 계속 뇌리에 남는다. 말장난이야말로 한 가지 의미로 고정되지 못하는 가변적인 기표이자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혼성의 결정체, 바로 하이브리드의 한 모습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