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nsung Lee, Head of Medusa – Pink, 2022 © Yunsung Lee

… 자네가 선택하는 토르소는 매끄럽고 부드럽고 충실한, 그 위에 피가 흘러내릴 때 무엇보다도 미묘한 곡선을 그리면서 흘러내리는 풋풋한 토르소구나. 흘러내리는 피에 가장 아름다운 문양—이를테면 들판을 뚫고 지나가는 평범한 개울이나, 재단된 나이 든 거목이 보여주는 나이테와 같은—을 만들어 주는 토르소구나. 틀림없지 않은가? … 1) (미시마 유키오, 《가면의 고백》, 1949 中)


작품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간 이윤성의 회화 작업에서 ‘토르소’는 중심적인 소재로 다뤄져 왔다. 인체의 일부만 남은 조각을 보고 아름다움을 봤다고 작가가 설명한 적도 있다2). 2011년부터 2023년 현재까지 이어진 〈Torso〉 시리즈를 보고 작가의 관심사를 캔버스 화면에 옮겼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는 여기서 난관에 부딪힌다. 그가 그린 토르소는 토르소와 다르기 때문이다. 이윤성의 회화에 있고 토르소에 없는 것은 바로 피와 빛이다. 주로 단일한 소재로 된 입체인 토르소는 돌이라는 재료와 시간이 지나온 유물이라는 점에서 빛도 피도 나지 않는 물건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비교했을 때 이윤성의 회화에는 토르소에 없던 피와 빛이 주위를 둘러싼다. 과연 토르소에 대한 시선은 어떻게 회화에서 빛과 피로 나타났을까? 오히려 회화 작업이기 때문에 빛과 피를 그릴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돌이라는 매체가 빛과 피를 담기는 어렵다. 돌에서 빛은 자발적으로 낼 수 없는 것이며, 피는 인물의 표정이나 행동으로 표출해야 비로소 신체에 (핏기로) 담길 수 있는 것이다. 한편 회화에서 빛과 피는 물감의 물성과 재현을 통해서/아울러서 가시화할 수 있다. 토르소에 없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각에 직접 나타나지 않는 빛과 피는 회화의 형식을 통해서 끄집어낼 수 있다.

이윤성의 회화에서 빛과 피는 캔버스의 하얀 색 배경을 덮을 정도로 퍼져 있다. 회화에서 빛과 피의 분출은 하얀색 배경마저도 잠식하는데, 이는 오히려 하얀 캔버스를 토르소로 이해한 태도라 할 수 있다. 2015년에 열린 개인전 《NU-FRAME》(두산갤러리 서울)을 보면 전시장에 작품 ‘Danae cut-in’(2015) 시리즈와 이에 상응하는 윤곽선이 전시장 벽면에 보인다. 캔버스에 인물상이 그려져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윤곽선 안에는 비어 있다. 그 형태는 작가가 관심을 보내는 토르소와 형태적으로 유사할 뿐만 아니라 작가가 관심을 가져온 만화의 특성과도 호응한다.

캔버스에 그려진 〈Danae cut-in〉과 이에 상응하는 윤곽선은 일반적인 정방형 캔버스가 아닌, 변형된 캔버스들이다. 이미 지적된 것처럼 이 모양은 만화의 컷을 연상시키는데3), 앞서 서술한 토르소에 대한 사고 접근에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작품은 소위 말하는 형태가 잡힌 캔버스(shaped canvass)가 아닌, 토르소와 같이 전체 중 일부 손실된 캔버스라 할 수 있다.

이는 만화가 전체 서사의 일부를 작은 네모 안에 클로즈업과 같은 효과를 살리면서 표정이나 감정을 담는다는 성격을 내적으로 공유한 결과이다. 주로 풍경이나 장면으로 그려지는 안정된 구도와 달리, 만화적 기법은 ‘컷’에 기반한다. 컷(cut)이라는 말 그대로 이 네모 안에는 서사와 장면, 감정이 토막 난 형태로 의미가 극대화한다. 일본어로 컷을 말할 때 쓰이는 ‘코마(コマ)’라는 단어가 ‘구분’ 즉 ‘일단 끊어지는 곳’이라는 의미와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이윤성의 회화 작업에서 캔버스를 절단면 삼아 전개된다. 말하자면 절단면은 그림으로 표현된 인물의 신체이기 이전에, 캔버스를 다루는 만화적 기법이 토르소의 불완전성과 공명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토르소에 없던 피와 빛은 회화 작업에서, 그 하얀 캔버스를 빽빽이 메울 정도로 퍼져 있다. 인물의 절단면에서 나온 피와 빛은 조각에서 볼 수 없는, 회화 특유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토르소를 보는 우리의 시선을 가시화한다고도 할 수 있다. 전체상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여기는 시각에서 보면 일부가 손실된 토르소라는 물건은 시대에 뒤떨어진, 불완전하고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토르소는 그 결손의 형태임에도 조명을 받았고, 극히 일부만 남았는데도 사실적인, 마치 실제 인물과 같은 핏기를 들여다볼 수 있다. 작가가 토르소에 보낸 시선은 회화 작업에 단순히 가지고 온 모티프에 그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토르소라는 얼굴도 없는 일북 결손된 덩어리가 우리에게 보내는 시선을 받아서 작가는 이를 만화적 기법에 찾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토르소는 한때 인간(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보이지 않은 눈으로 시선을 보내는 만큼 존재감을 가진, 살아 있는 것이다. 그 시선을 받고 작가가 본 아름다움은 조각 아닌 회화로, 그 캔버스 공간을 향해, 빛과 핏기를 가시적으로 담게 된다. 토르소의 연장선상에서 〈Head of Medusa〉의 일련의 작품은 접근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인용한 작가의 말은 비단 토르소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작가가 고대 그리스 조각에 본 시선은 다나에뿐만 아니라 메두사의 머리로도 향한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메두사는 보는 사람을 돌로 만드는 힘을 지닌 존재이다. 이 신화에 착안해서 만든 조각들도 몇 있지만, 여기서는 서사에 주목하고자 한다. 신화에서 이 존재는 머리를 절단되었는데, 루벤스나 카라바지오의 회화 작품에도 그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시리즈 중 두 작업으로 구성된 〈Head of Medusa - Pink〉(2022)에 그려진 메두사의 모습은 작가가 토르소에 존재감을 들여다본 것의 연장선상에서 시선을 다루는 작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회화 작업에서 메두사는 눈을 뜬 모습과 눈을 감은 모습으로 각각 표현되어 있다. 메두사를 우리가 직시하는 일, 그것은 그가 살아 있지만 눈을 뜨지 않을 때와 그가 머리만 남겨 눈을 떴을 때 가능하다.

〈Torso〉가 침묵하는 덩어리에 시선을 받았다면, 〈Head of Medusa - Pink〉는 차단된 채 시선을 주고받는다. 메두사를 만났을 때 우리는 눈을 감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처럼, 눈을 감은 모습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 메두사에게 우리가 보내는 시선이 되며, 우리가 그의 눈을 직시할 때는 죽어서 절단된 머리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요컨대 감은 눈에 (보는 사람과 메두사의) 살아 있음과 뜬 눈에 (보는 사람과 메두사의) 죽음이 교차한다. 이윤성의 작품은 지난 세기의 인물 조각에 보낸 작가의 관심이 단순히 회화로 치환된 것이 아니다. 작가에게 평면은 신체 일부와 시선이 절단 또는 차단된 곳에서 보는 일=시선을 보내는 일을 다루는 공간이다.

1) 三島由紀夫, 《仮面の告白》, 新潮文庫, 1950, p.140 (미시마 유키오, 《가면의 고백》, 일본어 원문에서, 번역은 필자에 의함)
2) 인스타그램 게시물, https://www.instagram.com/p/CqZUBx2PnSY/?igshid=MzRlODBiNWFlZA==
3) 임근준 ‘이윤성의 회화에 관한 비평적 메모’, 정현’구조의 단면’ 등을 참고하기 바란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