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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코드가 몸을 얻을 때: 전략으로서의 뒤집기와 다르게 만들기
2021
문혜진
구자명, 〈PBB〉, 2018,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서버컴퓨터, LCD, 감염된 하드디스크, 모뎀, LAN, 의자, 가변크기, 《PBB》 전시 전경(가변크기, 2018) ©구자명
볼수록
겉보기와 다르다. 작업을 반복적으로 접하면서 든 생각이다. 코드, 소프트웨어, 웹사이트, 프로그램
등의 소재를 택하고, 컴퓨터 장비, 금속 구조물, 3D 프린팅, 분자 모형 등 기계적· 과학적인 외형을 취하고 있기에, 작업은 외견상 건조하고 깔끔하며
차갑다. 그런데 이 같은 비물질적이고 비유기적이며 무생물인 소재에 형태를 부여하는 방식과 계기, 결과는 물질 적이고 유기적인 생물체의 속성과 긴밀히 연결된다. 이
글은 작가가 코드에 몸을 왜 부여하려 하며, 어떤 전략을 취하고, 그러한
이종 접합이 어떤 의미로 귀결되는가에 대한 짧은 고찰이다.
추상적인
프로그램을 가시화하는 기획이 처음 구체화된 작업은 〈PPB(Phoenix Phenotype Breeding)〉(2018)다. 〈PPB〉는
디자인 툴 소프트웨어의 매체 특정성에 형태를 부여하려 한 시도였다. 2D 모니터 상에서 실제에 가깝게
사물의 양감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위, 앞, 뒤, 원근 투영 등 각기 다른 각도의 뷰포트로 보이는 이미지들을 조합해 입체의 형상을 상상해야 한다.1) 이 과정은 평면과 입체 사이를 끊임없이 왕복하며 자신의 감각을 재동기화하는 훈련을 요한다. 디자이너는 부피가 존재하지 않는 2D 평면상에서 3D의 환영을 소환하기 위해, 본디
3D에 길들여진 자신의 육안을 원근감이 없는 납작한 세계의 시선에 적응시키고 그러면서도 편평한 세계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디자이너로 일하며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된 그래픽 툴의 법칙을 실물 세계의 전시장에 전사한 것이
〈PPB〉다. 작가는 “전시장의
창을 디자인 툴의 대지(artboard)로 상정하고 창에 전사한 레이아웃을 전시장 내부에 압출시키는” 방식으로 전시를 설계했다.2) 금속 프레임으로 둘러싸인 전면 창의
외곽선은 입구의 발광체로 일차 전사되고 이후 안쪽의 금속 구조물로 이차 복제된다. 전시명인 ‘PPB(Phoenix Phenotype Breeding)’가 전면 유리창과 내부 발광 구조물의 표면에 이어지며
중첩된 모습은 유리창 표면의 2D 레이아웃이 3D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형태를 얻는 과정을 연상케 한다.
이
작업에서 비물질 소프트웨어는 이중적으로 몸과 결부된다. 일차적으로 형태와 물성이 없는 소프트웨어의 작동
원리가 실물 세계에 적용되면서 이미지는 문자 그대로 사물이 된다. 하 지만 이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디자이너(작가)의 몸이 소프트웨어와 조응하며 발생하는 감각
비율의 변화다. 육필 원고 시대와 타자기 시대, 노트북 시대의
글쓰기가 착상과 집필의 감각에 있어 동일한 글쓰기로 간주될 수 없듯이, 특정 미디어를 이용하면서 인간의
감각은 미디어 와 뒤얽혀 재조정된다.3) 구자명의 작업은 표면상 소프트웨어의 방식으로 사고하고 설계하기를
꾀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의도하는 것은 물리적 육체의 제거라기보다 동시대 미디어 환경에서 재조율된 새로운
혼종의 감각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감각의 근원인 육체는 겉보기와 달리 실상 구자명의 작업을 지탱하는
근간이다. 작가로서 그의 관심사가 인간의 개입 없이 자체적으로 운용되는 알고리즘의 적용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접하는 디지털 이미지를 생성하는 미디어 주체로서의 소프트웨어의 구조를 ‘인간’인 우리가 감지하게 만드는 데 있기 때문이다.
구자명, 〈웹사이트 구조의 편집 방법 개발〉, 2020, html,
Javascript, IP주소, 분자모형, 하부장, 서버컴퓨터, 라우터, LAN, 가변크기, 《웹사이트 구조의 편집 방법 개발》 전시 전경(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020) ©구자명
〈PPB〉 이후 구자명의 행보는 그의 작업을 지탱하는 두 축인 소프트웨어와 육체 사이의 거리를 더 벌리며 접속의
이질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PPB〉가 라이노(RHINO)나 3Ds Max 같은
3D 컴퓨터 그래픽 프로그램의 작동 방식을 형상화했다면, 〈웹사이트 구조의 편집 방법 개발〉(2020)은 웹사이트의 속성을 결정하는 코드들의 구성을 분석해 웹사이트의 형태를 감각하게 만든다.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프로젝트 《소프트웨어의 성장과 형태에 대해》(인천아트플랫폼 G3 전시실, 인천, 2021)는
그보다 더 작은 단위인 특정 소스 코드가 수정되는 과정을 가시화한다. 그래픽 툴의 작동 원리에서 그것이
만들어내는 가상공간의 설계도로, 설계도에서 이를 구성하는 단위 요소의 형성 과정으로 전개되는 작업의
방향은, 화합물에서 분자로, 분자에서 원자로 이행하는 것처럼
소프트웨어 탐구가 매체의 구조를 보다 근본적으로 탐색하는 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흥미로운 점은
소재의 추상성이 강화되고 있지만 작업의 외형은 도리어 물성이 증강되는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술계의
주요 웹사이트 6개의 구조를 형상화한 〈웹사이트 구조의 편집방법 개발〉은 추상에서 구상까지 조각의 단계별
이행 실험한 것처럼 선에서 덩어리 사이의 3D 프린팅의 여러 출력 양상을 선보인다. 더욱이 《소프트웨어의 성장과 형태에 대해》에 소개된 신작 〈Soft
Muscle〉(2021)은 그야 말로 강렬한 규모와 압도적 물성을 현시한다. 오픈 소스 커뮤니티에서 개발자들이 버그를 고치며 코드를 완성하는 과정을 근육의 생장에 비유해 코드의 성장 과정을
가시화한 〈Soft Muscle〉은 3D 프린팅 위에 카본(CFRP) 성형을 하거나 수전사 필름을 입혀 단단하고 질긴 근섬유의 속성을 효과적으로 물화한다. 실제로 카본 섬유는 고출력을 내는 머슬카의 외장 인 테리어로 많이 쓰이는 재료로, 섬유의 직조나 표면 질감이 근육질의 남성이나 강력한 기계를 떠올리게 한다. 거대한
크기에 인공적 질감의 기괴한 검정 덩어리들은 기묘한 그로테스크의 감각을 뿜어낸다. 이것이 실재하지 않는
비물질 코드의 형성을 형상화한 것임을 떠올리면 피부에 와 닿는 물성의 강도와 손에 잡히지 않는 코드의 추상성 사이의 괴리는 더욱 커진다.
본디
그 자체로 완전한 부호인 코드에 굳이 몸을 부여하는 것은 구체적 형상이 없으면 감지하지 못하는 인간인 우리의 인지 방식 때문이다. 추상을 구상화하는 것은 무기질이 유기체가 되는 것처럼 모종의 생물학적 유비를 연상케 한다. 구자명 역시 소프트웨어의 형상화에 유기화학이나 생물학의 개념을 다수 끌어왔다.
웹사이트 소스에서 기준이 되는 태그를 선별하는 것을 유전자 가위에 비유하기도 하고, 웹사이트
코드의 구조에 형태를 부여할 때 분자 구조 시각화 방식을 차용하기도 하며, 전시의 제목을 생물학의 고전에서
빌어오기도 했다.4) 하지만 유기적 비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역전사의 개념일 것이다. 그는 스스로 물질대사를 할 수 없어 숙주 세포에 기생하는 바이러스의 증식 원리에서 대안적 가능성을 착안한다. 바이러스 중 일부는 일반적 전사의 방향과 달리 RNA에서 DNA를 만들어 숙주의 유전자에 삽입한다. 바이러스 DNA가 삽입된 숙주의 DNA는 본래의 결과와는 다른 변이를 발생시킨다.
구자명은 차이를 발생시키는 역전사를 기존과는 다른 대안적 가능성에 대한 모색으로 바라본다. 플라톤 이 래 이미지는 실제 세계 다음에 존재하는 부차적인 대상이었다. 그러나
포토샵과 일러스트, 라이노가 이미지에서 사물을 뽑아내는 오늘날, 실제는
이미지 이후에 도래하는 무언가가 되었다. 이렇듯 가치 체계가 전도되는 상황에서 구자명이 코드에 몸을
부여하는 행위는 소프트웨어가 문화의 구성 요소가 되는 모든 것의 본질을 변화시키는 동시대 미디어 패러다임의 대전 환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5) 소프트웨어의 형상화는 오늘날 동시대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미디어의 존재를 상기시키기도 하고, 장치 및 프로그램과 동기화하지 않을 수 없는 동시대 인간의 혼종 감각을 가리키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구자명이 꿈꾸고 있는 것은 실물 중심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조형 언어 및 전시 공간을 프로그램이라는
비물질 객체의 언어로 역전사해 생각해 보지 못한 새로운 변이형들을 창출할 가능성일 것이다. 그 돌연변이들의
건강한 창발을 기대한다.
1)
구자명, 「구자명 작가 & 백지홍
평론가 토크」, 『웹사이트 구조의 편집 방법 개발』 전시 도록 (윌링앤
딜링, 서울, 2020), 43쪽.
2)
위의 글, 44쪽.
3)
이러한 생각은 기본적으로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의 미디어
개념을 연상시키지만, 구자명의 입장은 미디어를 인간 감각 확장으로 보는 매클루언의 인간중심적인 관점보다는
상대적으로 객체 지향적이다.
4)
‘소프트웨어의 성장과 형태에 대해(On Growth and Form of
Software)’라는 전시명은 생물체의 형태학적 발생을 체계화한 다아시 웬트워스 톰슨(D’Arch
Wentworth Thompson)의 책 『성장과 형태에 대해(On Growth and Form)』(1917)에서 따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