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잭 번햄(Jack Bernham)은 『아트포럼 Artforum』에
발표한 "시스템 미학"(System
Esthetics)에서 이제 예술은 대상-기원(object-oriented)에서부터
시스템-기원(system-oriented)의 문화로 변화하고
있으며, 이 변화는 사물로부터가 아닌 사물이 되는 방식으로부터 나타날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또한 현대의 예술이 지닌 특수한 기능은 물질적 지속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그들의 환경적 요소 사이의 관계에 자리하는 것이며, 기술과 과학적 정 보의 사용에 관한 극히 민감한 판단 요구가 문자 그대로의 예술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1 그리고 50여년이 지난 지금 번햄의 몇 가지 예측은 이미 만연한
현실이 되었다. 이것은 사물을 바탕으로 한 세계의 구조에서 비가시적 정보의 흐름과 기술의 첨단화가 세계
구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바로 오늘의 세계를 말한다.
구자명의
작업은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내용의 측면이 아니라 오늘의 매체 환경 속에서 미디 어 자체의 문제를 조형적 어휘로 구사해 왔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로 운영되는 정보화 기술의 바탕 위에서, 그는
소프트웨어가 작동하는 방식을 가시화하기 위한 새로운 하드웨어를 구축한다. 그의 작업에서 하드웨어는 프로그램이나
정보가 작동하기 위한 기계 장비가 아닌, 프로그램과 정보 자체가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제시하기 위한 프레임이다.
그는 시스템에 기원으로
둔 이것을 일종의 '몸'으로 상정하는데, 이는 흔히 사용하는 소프트웨어를 가능케 하는 코드의 흐름을 독해하면서 발견하는 형태들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그의 작품은 일종의 '몸'이지만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소프트웨어, 즉 코드의 흐름을 물질적으로
표면화한 것이다. 이것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많은 것을 차지하는 기호화(記號化)된 매체 환경에 대한 미적인 복호화 (復號化)라고 할 수 있다. 이
바탕에는 소프트웨어가 지배하는 세계의 형태란 무엇이며, 이를 통 한 우리의 삶의 형태란 무엇인가에 대해
미술이라는 '몸'을 빌어 성찰하려는 태도가 있다.
레프
마노비치(Lev Manovich)는 『소프트웨어가 명령한다
Software Takes Command 』에서 소프트웨어를 "다른 무엇"(something else)이라고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모든 " 문화적 소프트웨어"(cultural
software)는 훨씬 큰 소프트웨어 유니버스의 가시적 부분일 뿐이라 고 지적한다. 2 또한
오늘날 "문화"를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와
동시대 사회의 모든 시스템 및 그 처리를 운용하는 소프트웨어는 소비자가 사용하는 "가시적인
것" (visible software)뿐 아니라 "
회색 소프트웨어"(grey software) 또한 고려되어야 하다고 말한다. 나아가 우리의 사회는 "소프트웨어 사회"로, 우리의 문화는
"소프트웨어 문화"로 규정될 수 있는데,
오늘의 소프트웨어는 "문화"를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와 많은 비물질적 구조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3
보들레르
식의 현대성의 개념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전제 하에, "소프트웨어 사회"를 형성하는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상태가 미술의 문제의식이 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지만, 이에
대한 언급은 여전히 '대상-기원'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구자명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소프트웨어를 구성하는 코드의 상태로 파고들어 이를 미술로 체현하는 '시스템-기원'의 방식과 이로서 도출되는 형태이다. 또한 그는 정보의 코딩을 물질적으로 가시화하기 위한 하드웨어의 틀로 공학적이며 생물학적 모델을 차용한다. 2018년 〈피닉스 피노타입 브리딩〉(PPB)에서 디지털 옥외 광고판의
하드웨어 플레이 시스템을 차용하고, 컴퓨터에 침투했으나 발현되지 않고 있는 바이러스 잠복기의 기이한
시/공간적 휴지 상태를 건축의 경량 철골 구조로 치환하여 특유의 '내부'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 이래, 그는 기술 내부에서 일어나는 정보의
저장과 흐름을 표면화하기 위해 애초 가려진 내부에 존재하도록 규정된 체계를 외양화 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2020년의
개인전 《웹사이트 구조의 편집 방법 개발》에서는 미술관의 웹사이트가 운용되는 코드와 HTML을 분석하여
생명공학, 분자생물학, 그리고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체계를
혼용한 구조화를 시도한다. 이 작업은 코로나 팬데믹 시기 웹에서 전시를 보는 일상, 말하자면 매체 공간에서 작품을 경험하는 것이 보편화된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된다. 미술관 웹사이트의 HTML을 분자구조에 대입하여 도출한 형태는 3D 프린트 되어 거대 서버의 배치 방식과 유사하게 제시된다. 그는
웹사이트의 코드화된 공간구조가 미술을 경험하게 만드는 일종의 새로운 '실제'임을 제안한다. 그러나 이 실제는 재현적 메시지의 상태로 제안되는
것이 아니라, 기술 언어의 형태와 구조의 속성을 통해 현현한다.
이듬해인 2021년의 개인전 《소프트웨어의 성장과 형태에 대해》에서는 소프트웨어 소스 코드가 개발자 커뮤니티 상의 토론을
거치며 변화하고 개선되는 과정을 목격하면서, 코드를 생명체의 근육 다발 구조의 형태로 생성과 성장하는
형태로 인용하고, 이를 근육의 생성과 가장 유사한 산업 재료인 탄소 섬유를 이용해 형상화한 작업을 보여준다. 이는 소스 코드의 비물질적이고 비가시적 상태를 조형화하여 "소프트웨어
문화"가 형성되는 방식을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상태로 우리 앞에 펼치는 일이다.
그리고 2023년 자동차의 모노코크 형태와 그 소재인 알루미늄을
이용하여 제작한 〈요기요식과 배민호〉에 대해 그는 "(...) 이동과 관련된 어플리케이션 안에서
몇 가지 코드의 도식을 골조 삼아, (...) 소프트웨어를 조각으로 들여온 것은 정보를 입자로 불러온다면
장소 안에 붙잡아 둘 구실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구자명은 경량 철골, 탄소 섬유,
알루미늄과 같은 소재를 이용하고 건축 골조나 근섬유구조, 자동차의 모노코크 형태를 빌어
소프트웨어의 존재 방식을 구현하여 소프트웨어의 무게를 만들어내는 대신, 기술적 상태를 형상화하기 위
해 일어나기 쉬운 '의인화'의 문제에 빠지지 않는다. 그가 펼쳐 놓는 낯선 형상과 체계는 결국 기 술의 동적 깜박임을 손실이나 손상 없이 드러낸 결과인 것이다.
우리가
자연계의 존재 방식을 모두 인식할 수 없듯이, 또한 그 존재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특정한 연구와 학문이
필요하듯이, 인간이 만들어낸 정보의 형태와 환경은 그 기능을 형성하기 위해 특정한 논리와 체계가 필요하다. 이것은 정보의 단위로 압축되어 회로에 흐르고 저장되기 위해 코딩의 방식을 갖고 있으며, 이것이 소프트웨어의 기능과 형상의 기술적 본질로 선행한다. 사용하고
있는 소프트웨어가 그 기능을 통해 사용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기술공학적 어휘를 통한 실현이 전제되어야 하고, 이는 자연계 못지않게 인간의 삶에 개입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속성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 구자명은 오늘의 사회, 정치, 문화를
지탱하는 매체환경의 근본 요소인 기술 언어를 미술로 매개한다. 이는 매체가 조성한 가시적 환경의 이면에
대한 독해를 통해 정보 사회의 '테크네'가 수행하는 우리의
환경과 삶을 미술이라는 '테크네'로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우리가 아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오늘의 지배 원리에 대한 천착에 다름 아니다.
1
Jack Burnham, “System Esthetics,” Artforum, September 1968; 31.
2
Lev Manovich, Software Takes Command (NY, London: Bloomsbury Academic, 2013),
7.
3
ibid, 21,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