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llation view © Sunghyeop Seo

기념비는 어떤 인물이나 사건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공공 조형물이다. 대게는 국가의 역사적 성 취를 내세우는 용도의 표식이지만 반대로 지난 과오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반성이나 커다란 희생에 뒤따르는 추모의 의례에서도 중요한 상징으로 쓰인다. 기념비의 교훈은 그것이 딛고 선 과거의 성패와 상관없이 그것이 현재를 실패에서 구제할 때, 적어도 실패를 지연시킬 때 유의미하다. 즉, 기념비는 실패를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서성협의 〈기념비〉는 어떤 현재 위에 세워진 것일까?

높이 250cm에 달하는 조형물은 먹으로 칠한 합판을 주재료로 사용했고 그리스-로마 건축 양식 중 하나인 도리아식 기둥과 방파제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테트라포드를 연결해 만든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테트라포드의 형태를 따르지만 4개의 발끝에는 도리아식 기둥의 윗 부분을 변용하여 소리가 들고 나는 통로가 되게 했다. 이 기념비를 구성하는 두 사물은 작가에 의해 채택된 어떤 것의 전형으로써 둘은 기원, 특징, 용도 등에서 접점이 없으니 성질이 매우 다른 두 세계를 대표하는 격이다. 상이한 두 존재의 만남은 오해, 소외, 단절을 낳는데, 이것이 서성협의 〈기념비〉 아래 놓인 현실이다.

〈기념비〉 주변으로 흐르는 나지막한 내레이션 과 테트라포드의 상단 기둥에 쓰인 낯선 언어도 마찬가지다. 폴란드어로 쓰인 이야기는 서로 다른 문화권이 충돌했을 때 일어나는 오역의 에피소드,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허점 등으로 구 성되어있다. 작가와 가까운 사람들 간 미끄러지는 대화는 ‘피식’하고 헛웃음이 나는 것들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삶을 풍부하게 해줄 소소한 사건들은 〈기념비〉 안에서 말(내레이션)와 글(텍스트)로 발화되면서 사회적 범주에서 개개인의 위치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한다.

〈기념비〉는 그것의 모태가 된 두 사물에서 비켜서 기능을 상실한 채 궤도를 이탈해 부유하는 존재이다. 신전도 바다도 아닌 곳에 머물면서 무언가를 떠받칠 수도 없고 무언가를 막아낼 수도 없다. 이와 같은 ‘장소 없음(placelessness)’으로 인해 〈기념비〉는 사회에서 밀려나기 쉽 고, 인정받기 어렵다. 우리는 새로운 인간-비인간 구성원을 환대하고 포용하는 행위가 당연하다고 믿는 만큼 온전한 자리를 내어주는 것에 인색하다(난민과 관광객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보자. 급진적인 인물이나 하이브리드 사물에 느끼는 생경함도 여기에 해당한다). 현실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가 여전히 중요하며 타자의 인정이 나의 자리를 만드는 초석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기념비〉의 낯선 외양과 비켜나가는 대화법은 불온하고 위험하다. 익숙한 풍경에 균열을 내는 존재는 환영받기 어렵다. 이곳에 있을 권리를 주장하며 없는 자리를 만드는 용기,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드는 제스처. 〈기념비〉는 자유, 평등과 포용과 같은 개념들이 추 상적으로 되지 않게 막는 장치이자 헛된 선언으로 공기 중에 흩어지지 않도록 매달아 두는 닻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가 실패하지 않으려면 〈기념비〉와 같은 사물은 더 많아져야 한다. 〈기념비〉는 현실을 떠받치는 언어, 힘, 관계, 구조에 익숙해지면 안 된다고 자신의 존재를 통 해 증언한다. 그것이 주장하는 바는 당신의 권리를 더욱 단단하게 지켜 주겠다는 소리에 귀 기울일 때 누군가의 존재 자체가 거부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라는 것이다.

〈기념비〉는 ‘내 자리는 여기입니다’라고 단호하지만 부드럽게 말한다. 윽박지르고 화를 내지 않아도 제 존재를 내보인다. 〈기념비〉의 화법을 파악하기 위해 이것의 모태가 된 두 사물을 다시 들여다보려 한다. 기둥과 테트라포드는 안정적인 비례를 갖추고 있지만 단독으로 쓰이는 경우는 드물다. 이들은 전체의 부분이며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 닮은 꼴과 어깨를 맞대고 있어야 한다.

어떤 존재도 홀로 있을 수 없는 사물들의 상호의존성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이것이 서성협의 〈기념비〉가 다른 기념비와 다르게 오늘을 구제하는 전략이다. 내 자리를 만드는 주체는 내가 되어야만 하고, 누군가의 승인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는 점을 주지시키면서도 주변을 둘러본다. 때로는 나의 부족함도 내보이면서 그들에게 손을 내민다. 서양식 기둥과 테트라포드의 결합은 홀로 남겨진 자들의 연대이며 새로운 존재를 위한 환영의 인사이다.



참고문헌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 지성사, 2015
아즈마 히로키(안천 옮김), 『관광객의 철학』, 리시올, 2020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