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협의
작업에는 짧은 기간 동안 상대적으로 많은 양의 텍스트가 생산되었다. 그의 작업이 지닌 조형성과 그것의
기반을 이루는 몇 개의 개념적 꼭지는 꽤 긴밀하게 맞물리며 고유의 시각 언어로서 설득력 있게 제시되어 왔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작업의 형식과 그 완성도는 스케일과 맞물리며 흥미로운 시각성을 획득했고, 조각적 형태는 때때로 퍼포먼스와의 접점을 통해 모종의 청각적 인상, 혹은
경험으로 확장되어 고정된 형식 넘어 독자적인 이미지적 가능성으로 이어져 왔다. 대체로 그의 작업에 대한
요약은 이러하다. 기념비를 환기하는 수직적이고 거대한 형상성과 특정 소리와 연동하는 조형성, 더 나아가 실제로 작품을 작동시켜 만들어내는 사운드,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가 작업을 통해 말하는 ‘위상’, 그리고 ‘혼종성’과 다시 또 연동한다는 것이다.
우선 이 ‘위상’은 그가 견지해 온 작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서성협은 줄곧 서로 다른 매체들이 엮이는 지점을 고민하고, 이를 뒤섞는 방법론을 ‘위상학적’이라
명명하며, 그로부터 파생된 감각을 ‘위상감각’이라 정의한다. 주지하다시피 위상이란 개념은 구조적 또는 상징적 위치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즉, 특정 문화적, 사회적 맥락 내에서 개인이나 집단간의 관계, 혹은 개념과 사상의
인식과 위치를 논하는데 유용하다. 위상은 곧 ‘관계’를 전제하며, 이 관계는 ‘상태’를 수반하고, 이 상태를 지탱하는 기준을 살피게 함으로 단순한 물리적
위치를 넘어선 사회, 문화적 관계와 역동성 사유하게 한다.
작가는 작업에서 여러 항을 뒤섞고, 교차시킴으로 위상의 전복과 변환을 꾀한다. 이를테면,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시각과 청각, 더 나아가 전시적 구조 안에서 퍼포머와
관객 사이의 위상을 섞어버리는 식이다. 지난 개인전 《위상감각을 위한 퍼포먼스》 (2021, This is not a church, 서울)에서 그는
악기를 만들었다. 더 정확히는 그는 동양적 사운드를 내는 악기에 서양식 장식을 덧대어 놓았다. 악기란 의도한 소리를 내기 위해 형태와 형식을 지닌다. 이런 면에서
장식은 매우 부차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연주자가 부재한
상황에서 장식을 통해 존재감을 뽐내는 이 조각들은 애초에 소리를 내기 위해 존재하기보다는 마치 그럴싸한 목제 가구⑴ 처럼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소리병풍’ 연작의 경우 어둡게 색을 머금은 채 직립한 몇 개의 판재 조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다시 또 여타의 다른 작업 – 〈당산기둥〉 (2021), 〈소리액자〉 (2020) 등 – 과 연동하며 그 자체로 모종의 시공간적 풍경을
구축한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퍼포먼스는 이 멈춰 선 풍경을
무대로 전유, 재활성화하며, 여기에 다른 차원의 서사-소리를 부여한다. 배경에 선 ‘병풍’은 이내 이 무대의 주인공이 되고, 배경은 곧 전경으로 풍경을 생동하게
한다.
이제 그가 조직한 퍼포먼스로 시선을 돌려보자. 전시장은 소리로 진동하기 시작한다. 정지된 조각은 악기로 기능하며 다시금 생명을 얻는다. 시각 체계는
형태와 개념을 토대로 대상을 명징하게 식별, 구분, 명명할
수 있기에 서구의 합리적 근대성을 구축하는데 가장 적화된 감각이었다 할 수 있다. 반면 청각은 시각에
비해 대상을 분명하게 규정할 수 없지만, 시각성이 지닌 일방향적 프레임 너머를 감각하게 함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 가닿을 수 있도록 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미지의
정밀함을 지니지 못한 청각적 경험은 오히려 화각 너머의 환경, 상황,
문맥을 감지하게 함으로 고정된 인식 체계, 그 프레임 바깥의 확장된 서사를 이끌어내는 잠재력을
지닌다.
서성협의 작업은 이로써 시각 중심으로 이루어진 체계와 조건,
양식을 뒤흔드는 동시에 시공을 울리는 새로운 감각으로 시각적 환영이 사라진 자리를 대체한다. 여기에
더해 소리의 성격을 살펴보자면, 연주하는 음악은 다분히도 동양적인 소리에 근거하고 있다. 작가의 작업에서 사운드를 위시한 동양은 서양을 뒤덮고, 전통은 현대를
찢고 돌출한다. 이렇듯 그가 직조한 청각적 경험은 시각적 현상-대상
주변을 부유하며 해석의 경로를 다각화하고, 특정 고정관념으로부터 거리를 둔다. 이제 눈앞의 이 환경은 청각에서 비롯된 새로운 조건과 그 위에 설립된 ‘혼성’적 풍경이 된다. 이 감각이 혼재된,
혼성으로 충동하는 공간에서 우리는 기존의 질서나 체계로부터 벗어나 우리가 발 딛고선 좌표를 새롭게 되뇌어야 한다.
한편 최근의 전시 《잡종예찬》 (2023, 김희수아트센터,
서울)을 본다면, 여전히 그가 병풍이나 테트라포드
등에서 형태를 차용하고 있으므로 작업이 동일한 위치, 즉 배경이나 경계면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지난 작업에서의 사운드적 가능성은
배제함으로 오히려 관객의 상상적 가능성을 극대화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즉, 퍼포먼스를 통해 오브제를 연주하던 행위가 사라짐으로 보는 이는 표피적 장식성의 틈새에서 독해의 가능성을 찾아내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되는 것이다. 어찌 보면 과거와는 다르게 시각 매체의 시지각적 속성에 오히려 집중하는
것으로도 보이기에 이미 정립한 고유의 언어를 허무하게 내려놓은 것으로도 비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역시 여러 조형 언어적 실험 속에서 때로는 과거의 작업을 복기하게 하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고유의 혼성적 서사를 획득, 연장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공간에 존재감 있게 들어선 테트라포드 형태의 조각(〈기념비 #01〉 (2022))은 마치 기념비처럼 보인다. 우뚝 솟은 형식, 검은색으로 뒤덮인 육중한 몸체는 개인의 유한한
삶을 초월한 존재처럼 서있다. 심지어 금칠로 수놓아진 도상과 텍스트는 기념비(처럼 보이는) 조각에 상징성을 더한다. 독해하기 어려운 문자는 이 오브제에 신비로운 아우라를 추가한다. 하지만, 이 텍스트가 작가 개인의 내밀한 사적 경험에 기반한 것이며, 이를
그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폴란드어로 번역한 것이라는 알게 되는 순간 기념비가 지닌 위용은 붕괴한다. 지식과
권력을 통해 구축된 공식사, 그 영웅적 서사에서 소거된 미시사는 오히려 이 기념비적 제스처에 힘입어
역설적인 위상을 획득하며, 그 자체로 역전과 전도를 이끄는 힘을 지니게 된다. 또 다른 기념비(〈기념비 #02〉 (2023))에 새겨진 도상들도 마찬가지이다. 동, 서양의 삽화, 백과사전의 도판 등에서 발췌된 이것들은 기존의 문맥으로부터
이탈하여 무작위적 질서 위에 놓인 서사 없는 이미지로 강등된다.
화려하고 분명한 도상인 만큼 관객은
의미에 파고들려 하지만, 작가가 도용한 이미지는 상징적 가치로부터 탈구되어 전복과 전치의 가능성을 지닌
이미지로 거듭날 뿐이다. 또한, 그의 작업에서 악기적 요소는
사라졌지만, 청각적 경험에 기반한 상상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현을
몸체에 지닌 형상, 얇게 곧추선 스피커로 대체된 작은 병풍 형식의 오브제는 그 형식적 단서를 통해 일관된
기대 – 연주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음계 등 – 를 이끌어내고
있다. 관객은 이 시각적 증거물과 울림 없는 몸짓 사이에서 오히려 상상을 퍼포밍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떠올려보면 작가는 전작에서도 퍼포먼스가 일어나지 않는 상황에서 관객과 반응하는 조각 오브제를
실험해 왔다.
서성협은 작품에 심어놓은 센서가 관객의 움직임에 반응하도록, 때로는 악기만이 놓인 무대 위를 하염없이 거닐기를 요구하며 관객 스스로 공간 자체를 연주하고 움직이는 퍼포머가
되길 기대했다. 발생하는 소리를 들으며, 혹은 소리에 대한
상념을 관객 스스로 추적하고 떠올리며, 주어진 환경을 사건적으로 변모시켜야 할 책무가 부과된 것이다. 《잡종예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관객은 조각과 악기, 관조와 연주의 틈새에서 같은 장소의 다른 시간, 또는 같은 시간의
다른 장소를 떠올리며 때로는 연결되고 때로는 흩어지며, 그곳에 발 딛고선 모든 존재들의 위치에 대한
감각을 새롭게 자각해야만 한다.
오늘날의 공동체는 어떠한 질서 위에 구축된 개념인가. 공통된 정체성과 소속감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민족’이나
‘우리’와 같은 개념은 얼마나 허구적인가. 서성협이
그려내는 혼종적 풍경은 ‘우리’라는 이름이 허가하던 순종의
대응이다. 이는 지금까지의 체계를 유지해 온 순수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이다. 그는 위계로 구조화된 체계 바깥과 하단부를 살피고, 소위 비순수하다고
여겨진 것들에 초점을 돌리며, 의도적으로 뒤섞이고 혼합된 형식들을 통해 비판 없이 지속해 온 인식론적
체계와 서사에 균열을 발생시킨다. 작가는 말한다. “섞인
상태로 재현하는 방식을 통해 순종화되는 정제 과정에서 제거된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복원”하고자 한다고. 그러므로 그에게 혼종은 순종이 만들어온 서사와 위계, 그 표준화와
규제의 역사와 그렇게 당도한 오늘을 비판적으로 사유하게 하는 일이다.
----------------------------
⑴ 작가가 어떤 미술 교육을 받았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과거 가구디자이너로서 활동했던 서성협의 배경을 떠올려보자면, 그의
작업의 외형적 구조가 가구의 조형과도 일견 닮아있음은 꽤나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작가에 따라 순수미술과는
궤적을 달리하는 배경을 감추는 경우가 더러 있긴 하지만, 서성협의 경우에는 그간 습득한 기술을 자신만의
제작 방법론으로 매우 적절하게 흡수했을뿐더러 더 나아가 이를 다시 개념 작동을 위한 조형 언어에 적극 도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