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나오는 루소의 명쾌한 가정을 바탕으로 한다면, 태초로 경계를 둘러 친 자의 행위 이후, 인간에게는 영토의 안과 밖, 위와 아래 같은 방향이 설정되었고, 이 방향을 통해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매우 단순하되, 그렇기에
더욱 확고하게 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경계의 지리학이 인간 문명의 상태로 이행될 때, 영토의 경계 안은 우리로, 그 바깥은 그들로 지칭된다. 경계는 비단 대지뿐 아니라, 이 안의 우리도, 바깥의 그들도, 계급, 인종
또는 혈통으로 구분되면서 신체라는 영토를 생성한다. 땅과 신체의 영토에 생긴 경계는 선행된 경계에 이어
다음으로 좁혀지며 촘촘히 분화되다가, 급기야 개별자의 단위인 나와 너로 수렴된다. 또 온전한 주체라는 영토가 되기 위해서는 전제되고 성취되어야 할 보편에의 요구가 작용한다.
개별자의
영토는 내적인 것을 끊임없이 외화 하면서, 동시에 외적인 것을 내화 하는 작용을 반복해야 한다. 특수와 보편, 개별과 전체를 두고 벌이는 이 필연은 결국 어떤 중심을
향해 응집되는 힘의 작용과 관련이 있다. 이 힘은 빈번히 권력, 지배라고
불린다. 서성협의 작업은 중심으로 응집되는 힘의 작용이 미치지 않는 영토의 경계 위, 그 자체의 검은 표면을 횡단한다. 경계의 선은 누구의 것도, 모두의 것도 아닌 상태로, 중심을 향한 응집의 힘의 작용을 흐트러뜨린다. 그의 검은 경계 공간은 점이 연속으로 모여 된 선과 같이 넓이를 갖고 있지 않으며, 지리적 좌표의 내부와 외부 사이의 깊은 균열처럼 그어진다. 이 검은
공간은 너무나 명료하면서도 또한 투명하게 사라지는 단단한 유령과 같은 것이다.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고, 대지도 바다도 될 수 없는 테트라포드는 서성협의 작업에서 권력과 지배, 나와
너의 연속과 불연속의 틈새에서 겹겹이 엉킨 신기루처럼 자리잡고 있다. 그는 이 공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방파제의 장소는 특별합니다. 방파제가 만들어낸 바다와 물의 경계 공간은 매순간
변용합니다. 육지의 일부분이었다가 금세 바다가 됩니다. 바다였다가도
이내 물이 됩니다. 비어있지만 단단합니다. 단단하지만 순간적입니다. 순간적이지만 지속적입니다. 이 양가적 양태의 변용들이 경계 공간의
역량이 됩니다. 그래서 경계 공간은 혼종적입니다." - 서성협
작가노트 "왜 하필 방파제입니까?" 중에서.
서성협은 2023년 두번의 개인전 진행했는데, 수림미술관에서
열린 《잡종 예찬》과 공간 형에서의 《Mixed
Sublime》이 그것이다. 먼저 수림미술관의 거대한 홀에는 검은색의 테트라포드 구조물이
때로는 기념비적으로, 때로는 군집을 이룬 형태로 배치된다. 한편
관객은 이와 마주하기 앞서 소리 없이 도열한 거대한 현악기 군을 만나게 된다. 연주되지 않는 악기에
팽팽히 조율된 현의 긴장감은 관객 각자의 상상 속에서 공명하는 음색을 재촉하고, 건조한 단음의 파동이
되어 공기를 가른다. 이 파동은 또다른 음의 파동으로 우리를 이끌고,
그 끝에 거대한 테트라포드인 〈기념비 #01〉이 있다. 고대
그리스 신전의 도리아 주두를 얹고, 알 수 없는 알파벳 문자를 검은 몸체에 세긴 채 서 있는 이것은
유럽 문명의 기원인 그리스 건축 기둥처럼 솟구쳐 있지만 대지도 바다도 될 수 없는 경계 공간의 상징과 같다. 거기에서
폴란드어를 모르는 대다수의 한국 관객에게는 음성 혹은 읊조림일 뿐인 의미를 알 수 없는 한 남성의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한 문화의 가장 강력한 체계인 언어가 의미를 알 수 없는 음성이 될 때, 청각은
언어를 기호의 질료로부터 자유로운 파동으로 경험하게 된다.
특히
서성협의 작업에서 특정 문화, 기능, 의미로부터 탈주한 채, 경계 공간을 구성하는 테트라포드는 사이에 끼인 이중의 공간이면서, 안과
밖, 위와 아래, 좌와 우를 모두 가로지르는 다원의 공간이다. 그것은 문화의 기념비와 도상, 소리와 언어 사이의 범주와 규율을
검은 경계의 선 위로 흡수하여 혼융을 일으키는 장소이다. 따라서 그가 제안하는 경계 공간은 고유한 영토
안의 지배적 힘의 바깥에 존재하면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무엇에도 속할 수 있는 자유와 관계한다. 상징계적 언어체계의 의미망에서 유연하게 벗어날 수 있는 탈영토화 된 경계성은 상징계를 가능케하는 억압의 기저로부터
벗어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 그것은 체계 내부의 화석화된 용례로부터 미끄러지는 혼종적 기호를 기반으로
하고, 오랜 신화와 설화를 뒤섞어 배치하는 이종 교배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이렇게 구성된 경계의 공간에서 개별자는 특수와 보편의 선택적 작용과 문명의 범주에 대한 검열된 순혈주의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주체의 생동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지리적이고 물리적
조건을 넘어선 비공간,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탈공간과 같다. 상징계적
질서에서 이탈되는 상상계적 퇴행이 아닌, 상징계 내부에서 불현듯 출현하여 고정된 체계에 대한 해방의
실루엣이 되는 실재계의 위상학이 바로 경계의 공간이 생성되는 지점인 것이다. 하여 그 공간은 대지도, 바다도 될 수 있으며, 나도 너도 될 수 있다. 더욱이 그것은 서로 이어지며 연대할 때 더 넓은 경계 공간을 형성한다. 〈어떤
이어짐〉은 테트라포드의 군집으로 축조되어 쌓이고, 비가청 저주파의 소리를 발산한다. 그것은 중심이나 위계 없이 서로 겹치고 쌓이며 공동의 지리학을 만들고, 특정
의미로부터도 탈각한 존재들의 깊은 박동과 울림을 갖는다. 테트라포드가 이러한 공동의 지리학으로 이어질
때, 하여 특정한 장소가 아닌 혼종의 장소로 존재할 때, 경계
공간은 탈주의 맥박으로 고동 하는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서성협이 "혼종의 숭고함"(Mixed Sublime)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같은 실천으로서의 변화무쌍한 생명력과 연대감 때문일 것이다. 이는 〈하얀 도상을 위한 알코브〉에서 제안하고 있는 것과 같이, 모든
문명의 도상이 뒤섞이고 만나고 무엇이든 들어가 쓰여질 준비가 된 백색 연대의 '알코브'이다. 벽을 넘고 부수기 보다, 경계의
벽 자체에 깊이 도사리며 내부와 외부를 무화시키는 그 공간에서, 개별자는 타자라는 허구와 전체라는 피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닐까? 다시 한번 오래 전 루소의 이야기로 돌아가,
끊임없이 타인에게 묻고 검증받고자 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에게 질문하지 못하는 울타리의 기만과 외면의 일반화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울타리를 투명하게 횡단하는 개별자들의 생동감 넘치는 카니발을 서성협의 작업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혼종성의 탈영토화를 통해 조금씩 부식되어가는 낡은 관념과 규율이며,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며 울타리를 지워가는 태도와 관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