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을
좋아지게 만드는 펜던트와 같이, 신체의 궁극적인 로컬 룰은 ‘장치’와 함께 형성되기도 합니다. 보다 전문적인 용어로는 ‘프로스테시스’(prosthesis, 인공기관)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 단어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는데요. 흥미롭게도 본래의 의미는 “단어의 시작에 한 음절을 덧붙이다"였다고 해요. 영어로 사용되면서 “신체 일부를 잃었을 경우 인공적인 것으로 대신하다"라는
의미로 의학에서 사용되게 되었고요. ‘음절의 덧붙임’이 곧장 ‘신체의 덧붙임’의 은유로 옮아온 것이 재미있습니다. 어쨌든 프로스테시스 담론은 이제 의학 분야뿐 아니라 여러 학제적 연구로도 확장되어서, 프로스테시스 미학(prosthesis aesthetics), 프로스테시스
서벌턴(prosthesis subaltern)과 같은 키워드로 분류되는 연구들이 쏟아지고 있어요.(전혜숙, 2015:17) 프로스테시스를 논할 때마다 제 머릿 속에
떠오르는 설화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요. 에두아르도 콘의 놀라운 저작 <숲은 생각한다>에서 저자는 스핑크스의 유명한 질문을 다시
묻습니다.
“아침에는 네 발, 점심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인가?” 네, 잘 알고 계시듯이, 오이디푸스는 이 물음에 “인간”이라고 답을 하고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죠. 콘은 이 질문의 답이 진실로 인간이라면, 이 답은 오히려 우리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상기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콘은 이렇게 씁니다: “우리의 네 발 달린 동물성과 우리를 특징짓는
이족보행의 인간성이라는 두 가지 유산을 상기할 뿐만 아니라, 유한한 삶을 더듬거리며 헤쳐가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내고 우리 자신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온갖 종류의 ‘지팡이’들을
떠올리게 된다.”(콘, 2018:19) 근대적 사유에서 지팡이는
사물이고, 대상이며, 도구이고, 바깥임이 틀림없었죠. 하지만 이 스핑크스의 질문과 오이디푸스의 답
안에서 세 발로 걷는 인간의 ‘인간임’은 지팡이를 포함합니다. 이런 식으로 포스트휴먼적 사유의 자장 안에서 지팡이는 다른 개념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담론적 차원의 이야기 말고, 다른 방식으로 이
프로테시스와 신체의 관계를 말하고 싶어집니다. 앞서 언급했던 발제적 신체의 관점에서는 어떨까요. 지팡이라는 물질성과 신체의 경험으로 인해 체화되고 형성되는 마음의 발제는 어떻게 서사화될 수 있을까요.
신경가소성의 메카니즘까지 분석해낸다고 하더라도, 어쩐지 불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갑갑함 때문에 아사는 직접 만나서 그들의 가장 내밀하고 섬세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겠죠. 그래서 저는 요즘 인류학적 혹은 민속지적이라고 불리는 연구 방법에 부쩍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건을 뭉퉁그리고, 기억을 보편화하고, 경험을 추상화하는 방식의 서사가 아니라, 경험과 사건으로 구성된
기억이 형성해가는 신체의 로컬 룰을 생생하게 말하고 싶거든요. 아사는 프롤로그의 마지막에서 이런 문장을
씁니다. “날짜가 있는 사건이 어느새 날짜를 상실하다가 결국은 로컬 룰을 통해 몸의 고유성을 형성하는
과정, 경험이 기억과 ‘더불어 존재하면서도 더불어 존재하지
않는’ 과정, 즉 몸이 만들어지는 열하나의 서사를 이제부터
풀어갈까 합니다.”(아사, 22) 날짜가 있는 사건이 어느새
날짜를 상실한다…는 말의 의미를, 강나영 작가는 누구보다
잘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이 문장을 다시 읽을 때, 누구보다도 강나영 작가를 겹쳐 보게 되라고요. 오늘도 주먹 인사를
나누고 있을 당신을요.
자, 이제 과학기술학(STS)과 장애학 이야기로 넘어가볼까 합니다. 과학기술학은 과학과 기술, 사회,
문화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상호 관련된 복합적 맥락의 총체로 봅니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우리는 “그거 참 과학적이다”과 같은 수사를 자주 사용하잖아요. 서로 다른 의견들이 충돌했을 때, “과학적”이라고 여겨지는 생각에 높은 가치가 매겨지죠. 흔히 과학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며 탈맥락적인 진실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과학기술학 연구자들은 이러한
통념을 깨뜨리며 기술 지식의 생산에 관여하는 권력을 드러내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한때 저는 페미니스트 STS 학자들의 저작들을 풍부하게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요. 페미니스트 STS 연구 저작들을 읽으며 저는 제 인생이, 관점이, 생각이 송두리째 바뀌는 경험을 하기도 했답니다. 도나 해러웨이, 산드라 하딩, 캐롤린 머천트를 위시한 여성 과학기술학 연구자들과, 앞서 언급했던 캐런 바라드도 그렇고, 신체화가 말소되는 경향을 경계하며
사이버네틱스 이론을 재구성한 캐서린 헤일즈도, 모두 이 페미니스트
STS의 계보 위에 서 있죠. 처음에는 물론, “왜
여성 과학자는 남성 과학자에 비해 월등히 그 수가 적을까?”와 같은 여성의 과학계 내에서의 사회적 성취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서 시작했지만, 점차 젠더 위계가 기술의 지식의 형성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낱낱히
파헤치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페미니즘 STS를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인종, 젠더, 장애
이슈로도 사유의 폭을 넓히게 됩니다. 장애학의 관점에서 과학기술학을 연구하게 되면, 그동안 비장애 중심주의적으로, 다시 말해 장애를 교정과 치료의 대상으로
지식이 형성된 의학사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되요. 더 나아가 장애중심적 과학기술을 상상할 수도 있겠죠. 이를테면, 주디 와이즈먼은 〈테크노페미니즘〉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사회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회적인 것만큼이나 기술적인 것에 의해
속박당해 왔음을 지적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인지를 담론적인 차원으로만 고려해온 지식사를 비판하고 발제적
인지주의를 주장한 바렐라와 동료들하고도 연결되겠지요. 저는 사회는 그 자체로 물질 대상과 기술 인공물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와이즈먼의 주장(와이즈먼, 2009:66)과
물질 대상과 기술 인공물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는 과학기술학자들의 주장이 상호복합적으로 얽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계를 담론적 차원으로만 논하는 것도, 물질적 작용으로만 이해하는 것도, 모두 지양해야 합니다. 이 둘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구성되고 형성되어 온 복합적인 행위자들의 행위성들을 모두 고려해야겠지요. 그동안 장애라는 개념을 구성해
온 언어-담론적 인식론의 문제와 동시에 프로스테시스를 비롯한 비인간 사물들의 행위성을 포함한 논의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에 대해서는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
이론에서 힌트를 얻을 수도 있겠지요.
김초엽과
김원영이 함께 쓴 〈사이보그가 되다〉에서 김초엽은 “크립 테크노사이언스”라는 개념을 소개합니다. ‘크립’에
대응하는 한국어 표현은 ‘불구’라고 김초엽은 설명하고 있는데요. 장애인을 비하해왔던 용어를 전유함으로써 지칭의 권력을 탈환한다는 의미에서 채택된 용어라고 해요.(김초엽, 2021:185) 크립 테크노사이언스는 지난 날 비장애인
전문가들이 생산한 지식의 결과물을 장애인들이 일방적으로 수용(김초엽,
186)하게 되는 구조에 저항하고, 장애인들이 자신의 구체적인 장애 경험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일상의 기술을 재구성하고, 세계를 개편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에 주목합니다.(김초엽, 188) 따라서 이들의 선언은 문서화된 담론 이상으로 아주
구체적인 실천을 담보로 합니다. 특정한 A의 신체에서 발생하는
프로스테시스 기술의 서사를 비장애중심적, 탈정치적으로 보지 않고, 장애
정치의 도구로 재개념화하려는 시도인 것이죠. 그렇다면, 여기에
시각성은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요.
다른 어떤 감각들 보다도 월등하게 강력한 시각이라는 감각에 겹쳐져
있는 전 인류의 문화적 유산을, 조금 비약해보자면 비장애-남성-중심적 리터러시로 응축되어 있는 이미지의 헤게모니를 우리는 어떻게 결코 순진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것을 전유할
수 있을까요. 이런 생각의 연쇄에 몰두하다보면, 부지런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할 일이 너무나 많아요. 엉덩이를 들썩이며
제 자신을 채근하게 됩니다. 제 이런 마음은 강나영 작가의 작업과 그 날 나눈 이야기로부터 기인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터진 둑에서 물이 쏟아지듯 너무 많은 말을 꺼내놓은 것에 양해를 구해봅니다. 제 말들에 잠식당하진 않을까 걱정돼 며칠 고민도 했지만, 부디 제
말들의 실타래 가운데서 의미있는 몇 가닥을 집어들어 주기를 바라며, 저의 제언은 여기서 마치려고 합니다. 언젠가 전시장에서건, 사석에서건,
또한 그 방식이 이미지던, 물질이던, 말이던
무엇이던 간에 강나영 작가의 응답을 기다릴게요. 거기에 또 제 나름의 방식으로 화답하고 응답하며 우리만의
룰을 형성해 가길 기대하며…
፠이
글에서 언급된 텍스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레고리
베이트슨, 박대식 역, 《마음의 생태학》, 책세상, 2006.
김초엽·김원영, 《사이보그가 되다》, 사계절, 2021.
미셸
푸코, 정일준 역, 《미셸 푸코의 권력이론》, 새물결, 1994.
브뤼노
라투르, 《인간·사물·동맹》, 이음, 2010.
에두아르도
콘, 《숲은
생각한다》, 사월의책, 2018.
이토
아사, 김경원 역, 《기억하는 몸》, 현암사, 2020.
전혜숙, 《포스트휴먼
시대의 미술》, 아카넷, 2015.
주디
와이즈먼, 박진희·이현숙 역, 《테크노
페미니즘》, 궁리, 2009.
주디스
버틀러, 김윤상 역,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인간사랑, 2003.
캐서린
헤일즈, 허진 역,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 열린책들, 2013.
프란시스코
바렐라·에반 톰슨·엘리노어 로쉬, 석봉래 역, 《몸의 인지과학》, 김영사, 2013.
Karen
Barad, “Agential Realism”, Meeting the Universe Halfway, Duke University Press,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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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계산주의적 인지과학과 2세대 인지과학의 맥락과 차이를 짚는데에는 나소영의
미발표 글 <신경인지적 차원에서 담론 실천의 물질화 과정을 전경화하기 – 발제적(enactive) 신체화의 관점에서>에 빚을 지고 있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