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나영, 〈For the Fist Bump I〉, 2021, 파라핀, 철제 원형 파이프, LED 램프, 폴리스티렌 블록, 페인트 ©강나영

지난 4월 푸른지대창작샘터에서 했던 강나영 작가와 아티스트 토크를 마무리하며 그 날 제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복기해보면, 선명하진 않지만 이것이었을 겁니다. “강나영 작가는 신체의 물질성 자체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체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을 때 느끼는 복잡한 심리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아요. 또한 신체의 기능을 대체하는데 사용되는 기계 장치들의 형태로 인해 환기되는 사유와 감각을 드러내고요. 이러한 관심에서 제 연구 주제와도 접점이 있어서 앞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저는 이 지면을 제가 했던 마지막 말을 이어갈 수 있는 기회로 삼을까 합니다.

그래서, 별 도리 없게도, 아마도 이 글의 독자는 단 한 사람- 강나영 작가가 될 것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둡니다. 비평 프로그램으로 만난 큐레이터의 글인데 독자가 유일하게도 작가 본인일 것이라니, 퍽 이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저는 강나영 작가의 예술에 대해서, 작업의 형식과 방법에 관해서, 그 가치와 해석에 관해서 다른 누군가에게 설명해주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글은 여타의 비평 작업이 흔히 실천하는, 어떤 구체적인 작업이 이중으로, 중복해서, 몇 겹씩 포개어 표상하고 있는 층위들 저 편의 관념적인 것을 발굴해내는 담론적 작업이기를 거부합니다. 오히려 이 글은 작가의 신체와 작가가 마주하고 있는 세계 사이를 담론-물질적인 방식으로 엮어 보기를 희망하는, 그런 글입니다. 그래서 작품을 평할 때와 같은 신중함이나 조심성은 내려 놓고, 대신 복잡한 연상 과정을 여과없이 쫓으며, 과하다 싶을 정도의 인용과 소란스러운 상상력을 거칠게 이어 붙이는, 시끄럽게 채근하며 다그치는 제언이 될 것입니다.

저는 요즘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을 길잡이 삼으며, 포스트휴머니즘의 여러 갈래 중에서도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예상하겠지만, ‘포스트휴먼’ 혹은 ‘포스트휴머니즘'을 말하는 학자들의 관점과 전망이 결코 단일하지만은 않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서구 근대의 ‘인간’ 개념을, 다시 말해 ‘휴머니즘’과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의 논의들 위에서 포스트휴먼 연구자로서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고 있죠. 강나영 작가와 ‘신체’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면 좋을지 생각을 좀 해보았는데요. 이른바 2세대 인지과학으로 불리는 ‘체화된 인지’에서의 ‘발제주의(enactivism)’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면 좋을 것 같아요. 1

20세기 중후반에 마음과 인지에 대해 경험적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학제적 활동으로 인지과학이라는 분야가 급부상했어요.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같은 책을 보시면, 당시 마음에 관한 연구가 학제적 활동이자 융합 연구로서 어떻게 대단한 선구적 모범을 보였는지 금방 눈치챌 수 있을 거에요. 인지과학은 소위 ‘과학적으로’ 보이지 않는 실체인 마음을 탐구하기 위한 학문이었답니다. 이때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가진 연구자들은 마음에 관해 해명하기 위해 ‘표상(representation)’과 ‘계산(computation)’이라는 공통적인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에요. 우리의 사고 과정도 마치 형식 논리 체계와 같으며, 구문적 규칙에 따라 기호들을 조작하는 계산과정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저로썬 도무지 동의할 수 없는 생각인데요. 흔히 이런 전통적인 인지과학을 ‘계산주의적 인지과학’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러한 발상은 인공지능 연구에도 적용되어,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 수 있다는 원대한 포부 아래 우리의 의식은 근본적으로 계산과 그 메커니즘이 유사하다며 주장하는 것이에요. 문제가 되는 지점은 이러한 발상이 인지과학을 탈신체화된 경향으로 밀고 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한 반대 의견이 90년대부터 나오기 시작했어요. 캐런 바라드 같은 경우는 표상주의는 인식 주체와 세계를 분리하고, 표상이 그 사이를 매개한다고 보는 전제라며 비판하고, 이것은 주체와 대상 세계가 현상 차원에서는 분리되지 않는데, 선험적으로 독립적인 것인양 분리시킨다고 지적했어요. 저도 표상주의는 물질을 문화나 역사 같은 외재적 요소에 의해 각인될 수 있는 수동적인 대상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에 문제적이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잠시 푸코와 버틀러의 주장을 떠올려 볼까요. 담론 권력이 인식 가능한, 의미 있는 몸(bodies that matter)를 만든다던 그들의 주장을요. 담론의 수행성을 예리하게 포착한 점은 맞지만, 이러한 주장은 자칫 구체적인 물질화 혹은 신체화 과정을 놓치게 되면서, 추상적인 담론이 물질/신체에 ‘기입’된다거나 ‘각인’된다는 식으로 파악하게 되는 오류를 낳습니다. 그래서 바라드는 푸코와 버틀러가 구체적인 물질화 과정을 다루지 않으면서, 담론과 물질의 관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겁니다. 이에 반표상주의를 핵심 기조로 하며 대안적으로 제시된 개념이 바로 ‘발제주의’인데요. 이 개념을 말할 때 저는 프란시스코 바렐라와 그의 제자들이 함께 쓴 <몸의 인지과학>을 떠올립니다. 바렐라와 동료들은 전통적인 계산주의적, 표상주의적 인지과학을 반대하고, 나아가 인지란 결코 미리 주어진 세계에 대한 미리 주어진 마음의 표상이 아니라 세계 내 존재가 수행하는 다양한 행위들의 역사에 기초해 있는, 마음과 세계의 “발제”(enactment)라는 확신을 강조하기 위해 발제적(enactive)라는 용어를 제안했기 때문입니다.(바렐라 등, 42) 그렇다면 어떻게해서 환경 속에 놓인 개체의 특정한 행동들이 특정한 뉴런들 간의 구조적 연합을 연속적으로 발생시키는걸까요? 그것에 대한 메커니즘은 신경과학 개념인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로 흘러 가게 되면 너무 복잡해지니, 여기서 잠시 이야기의 방향을 바로 잡아야겠네요. 제가 전하려고 하는 말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신경과학 분야의 개념까지 살필 필요는 없겠죠. 만약 우리가 지금 마주보고 대화하고 있었다면, 저는 잠시 커피를 입에 가져갔을 것 같습니다.

미학자 이토 아사는 우리가 경험을 통해 획득하는 신체의 규칙을 궁극의 로컬 룰(local rule)과 같은 것이라고 언설합니다. 그리고 이런 신체의 로컬 룰은 말 그대로 그 사람 신체의 로컬리티, 즉 고유성을 만든다고 말합니다.(아사, 2020:15) 앞서 제가 실컷 이야기한 인지과학의 영역은 과연 이런 고유성을 온전히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연구’라던가, ‘말을 더듬는 사람의 연구’ 같은 것은 과학의 영역에서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방법론으로 다룰 수 있겠지요. 그러나 구체적인 ‘A씨의 연구’와 같은 이야기는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할 것입니다.(아사, 17) 이토 아사의 저서 은 인지과학과 같은 과학 분야에서의 성과로는 결코 그 서사가 불충분한, 신체의 ‘압도적인 고유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쓴 글들의 모음입니다. 이 책에는 열두 명의 장애인이 회고하는 고유한 신체의 기억이 쓰여 있는데요. 이들은 의학적 또는 사회적으로 시각 장애, 팔다리 절단, 마비, 말더듬, 이분척추증(CIDP)라는 장애를 갖고 있습니다. 아사는 열두 명 각각의 개별적인 신체의 고유성을 드러내기 위해 그들의 기억이 형성하는 신체의 일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풀어냅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아사가 만난 사람들 중 니시지마 레나 씨 같은 경우요. 레나 씨는 전맹인데도 대화를 나누면서 메모하는 습관이 있다고 해요.

후천적 장애인인 레나씨는 장애가 없었던 시절의 메모하는 습관을 맹인이 된 지 10년이 지나서도 갖고 있는 것이죠. 아사는 후천적 장애인이 비장애인의 기억이 새겨진 몸으로 살아가는 일을 서술하며, ‘다중 인격’이 아니라 ‘다중 신체’(아사, 20)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러한 ‘몸의 복수화’는 선천적 장애인인 간바라 게타 씨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었는데요. 이분척추증이 있는 겐타씨는 상반신은 건강한 사람처럼 움직일 수 있지만 감각이 없는 하반신은 움직일 수 없다고 합니다. 겐타씨는 위와 아래로 나뉘어 전혀 다른 유형을 지닌 두 개의 몸으로 살아가는 또 다른 몸의 복수화를 겪고 있는 것이죠.(아사, 21) 얼마 전에 저는 SF소설가 김초엽 작가의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요. 이 날, 김초엽 작가는 촉감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했습니다. 작가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은, 촉감이 곧장 기분과 연동된다고 해요. 나무 소재의 질감을 만질 때는 기분이 나른해지거나, 유리를 만질 때는 기분이 날카로워지는 것처럼요. 이런 현상은 타인의 신체와 접촉할 때도 벌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특정한 사람과의 접촉이 의도하거나 예상하지 못한 기분을 불러오는 일도 발생하게 되죠. 접촉만으로 기분이 좌우된다니, 상상만해도 일상이 힘들 것 같아요. 다행히 이 사람은 자신의 신체를 다룰 수 있는 고유한 방법을 개발해 냈다고 합니다. 그것은 만졌을 때 자신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물질을 펜던트로 제작하여 목걸이로 걸고 다니는 것이라고 해요. 일상적인 접촉에서 급격한 기분 변화가 발생하더라도, 목에 걸린 펜던트를 만지면서 기분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거죠. 어때요, 이것도 아사가 말하는 궁극의 로컬 룰의 또 다른 사례가 될 수 있겠지요. 저는 강나영 작가의 작업 for the fist bump를 보면서도 주먹을 맞부딪히는 인사법이 그 신체만의 로컬 룰을 형성해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강나영, 〈3년의 합 For the Fist Bump II〉(세부 이미지), 2022, 파라핀, 철제 원형 파이프, LED 램프, 폴리스티렌 블록, 페인트, 플라스터, 260x250x300(h)cm ©강나영

기분을 좋아지게 만드는 펜던트와 같이, 신체의 궁극적인 로컬 룰은 ‘장치’와 함께 형성되기도 합니다. 보다 전문적인 용어로는 ‘프로스테시스’(prosthesis, 인공기관)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 단어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는데요. 흥미롭게도 본래의 의미는 “단어의 시작에 한 음절을 덧붙이다"였다고 해요. 영어로 사용되면서 “신체 일부를 잃었을 경우 인공적인 것으로 대신하다"라는 의미로 의학에서 사용되게 되었고요. ‘음절의 덧붙임’이 곧장 ‘신체의 덧붙임’의 은유로 옮아온 것이 재미있습니다. 어쨌든 프로스테시스 담론은 이제 의학 분야뿐 아니라 여러 학제적 연구로도 확장되어서, 프로스테시스 미학(prosthesis aesthetics), 프로스테시스 서벌턴(prosthesis subaltern)과 같은 키워드로 분류되는 연구들이 쏟아지고 있어요.(전혜숙, 2015:17) 프로스테시스를 논할 때마다 제 머릿 속에 떠오르는 설화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요. 에두아르도 콘의 놀라운 저작 <숲은 생각한다>에서 저자는 스핑크스의 유명한 질문을 다시 묻습니다.

“아침에는 네 발, 점심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인가?” 네, 잘 알고 계시듯이, 오이디푸스는 이 물음에 “인간”이라고 답을 하고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죠. 콘은 이 질문의 답이 진실로 인간이라면, 이 답은 오히려 우리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상기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콘은 이렇게 씁니다: “우리의 네 발 달린 동물성과 우리를 특징짓는 이족보행의 인간성이라는 두 가지 유산을 상기할 뿐만 아니라, 유한한 삶을 더듬거리며 헤쳐가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내고 우리 자신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온갖 종류의 ‘지팡이’들을 떠올리게 된다.”(콘, 2018:19) 근대적 사유에서 지팡이는 사물이고, 대상이며, 도구이고, 바깥임이 틀림없었죠. 하지만 이 스핑크스의 질문과 오이디푸스의 답 안에서 세 발로 걷는 인간의 ‘인간임’은 지팡이를 포함합니다. 이런 식으로 포스트휴먼적 사유의 자장 안에서 지팡이는 다른 개념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담론적 차원의 이야기 말고, 다른 방식으로 이 프로테시스와 신체의 관계를 말하고 싶어집니다. 앞서 언급했던 발제적 신체의 관점에서는 어떨까요. 지팡이라는 물질성과 신체의 경험으로 인해 체화되고 형성되는 마음의 발제는 어떻게 서사화될 수 있을까요.

신경가소성의 메카니즘까지 분석해낸다고 하더라도, 어쩐지 불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갑갑함 때문에 아사는 직접 만나서 그들의 가장 내밀하고 섬세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겠죠. 그래서 저는 요즘 인류학적 혹은 민속지적이라고 불리는 연구 방법에 부쩍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건을 뭉퉁그리고, 기억을 보편화하고, 경험을 추상화하는 방식의 서사가 아니라, 경험과 사건으로 구성된 기억이 형성해가는 신체의 로컬 룰을 생생하게 말하고 싶거든요. 아사는 프롤로그의 마지막에서 이런 문장을 씁니다. “날짜가 있는 사건이 어느새 날짜를 상실하다가 결국은 로컬 룰을 통해 몸의 고유성을 형성하는 과정, 경험이 기억과 ‘더불어 존재하면서도 더불어 존재하지 않는’ 과정, 즉 몸이 만들어지는 열하나의 서사를 이제부터 풀어갈까 합니다.”(아사, 22) 날짜가 있는 사건이 어느새 날짜를 상실한다…는 말의 의미를, 강나영 작가는 누구보다 잘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이 문장을 다시 읽을 때, 누구보다도 강나영 작가를 겹쳐 보게 되라고요. 오늘도 주먹 인사를 나누고 있을 당신을요.

자, 이제 과학기술학(STS)과 장애학 이야기로 넘어가볼까 합니다. 과학기술학은 과학과 기술, 사회, 문화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상호 관련된 복합적 맥락의 총체로 봅니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우리는 “그거 참 과학적이다”과 같은 수사를 자주 사용하잖아요. 서로 다른 의견들이 충돌했을 때, “과학적”이라고 여겨지는 생각에 높은 가치가 매겨지죠. 흔히 과학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며 탈맥락적인 진실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과학기술학 연구자들은 이러한 통념을 깨뜨리며 기술 지식의 생산에 관여하는 권력을 드러내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한때 저는 페미니스트 STS 학자들의 저작들을 풍부하게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요. 페미니스트 STS 연구 저작들을 읽으며 저는 제 인생이, 관점이, 생각이 송두리째 바뀌는 경험을 하기도 했답니다. 도나 해러웨이, 산드라 하딩, 캐롤린 머천트를 위시한 여성 과학기술학 연구자들과, 앞서 언급했던 캐런 바라드도 그렇고, 신체화가 말소되는 경향을 경계하며 사이버네틱스 이론을 재구성한 캐서린 헤일즈도, 모두 이 페미니스트 STS의 계보 위에 서 있죠. 처음에는 물론, “왜 여성 과학자는 남성 과학자에 비해 월등히 그 수가 적을까?”와 같은 여성의 과학계 내에서의 사회적 성취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서 시작했지만, 점차 젠더 위계가 기술의 지식의 형성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낱낱히 파헤치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페미니즘 STS를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인종, 젠더, 장애 이슈로도 사유의 폭을 넓히게 됩니다. 장애학의 관점에서 과학기술학을 연구하게 되면, 그동안 비장애 중심주의적으로, 다시 말해 장애를 교정과 치료의 대상으로 지식이 형성된 의학사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되요. 더 나아가 장애중심적 과학기술을 상상할 수도 있겠죠. 이를테면, 주디 와이즈먼은 〈테크노페미니즘〉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사회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회적인 것만큼이나 기술적인 것에 의해 속박당해 왔음을 지적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인지를 담론적인 차원으로만 고려해온 지식사를 비판하고 발제적 인지주의를 주장한 바렐라와 동료들하고도 연결되겠지요. 저는 사회는 그 자체로 물질 대상과 기술 인공물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와이즈먼의 주장(와이즈먼, 2009:66)과 물질 대상과 기술 인공물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는 과학기술학자들의 주장이 상호복합적으로 얽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계를 담론적 차원으로만 논하는 것도, 물질적 작용으로만 이해하는 것도, 모두 지양해야 합니다. 이 둘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구성되고 형성되어 온 복합적인 행위자들의 행위성들을 모두 고려해야겠지요. 그동안 장애라는 개념을 구성해 온 언어-담론적 인식론의 문제와 동시에 프로스테시스를 비롯한 비인간 사물들의 행위성을 포함한 논의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에 대해서는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 이론에서 힌트를 얻을 수도 있겠지요.

김초엽과 김원영이 함께 쓴 〈사이보그가 되다〉에서 김초엽은 “크립 테크노사이언스”라는 개념을 소개합니다. ‘크립’에 대응하는 한국어 표현은 ‘불구’라고 김초엽은 설명하고 있는데요. 장애인을 비하해왔던 용어를 전유함으로써 지칭의 권력을 탈환한다는 의미에서 채택된 용어라고 해요.(김초엽, 2021:185) 크립 테크노사이언스는 지난 날 비장애인 전문가들이 생산한 지식의 결과물을 장애인들이 일방적으로 수용(김초엽, 186)하게 되는 구조에 저항하고, 장애인들이 자신의 구체적인 장애 경험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일상의 기술을 재구성하고, 세계를 개편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에 주목합니다.(김초엽, 188) 따라서 이들의 선언은 문서화된 담론 이상으로 아주 구체적인 실천을 담보로 합니다. 특정한 A의 신체에서 발생하는 프로스테시스 기술의 서사를 비장애중심적, 탈정치적으로 보지 않고, 장애 정치의 도구로 재개념화하려는 시도인 것이죠. 그렇다면, 여기에 시각성은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요.

다른 어떤 감각들 보다도 월등하게 강력한 시각이라는 감각에 겹쳐져 있는 전 인류의 문화적 유산을, 조금 비약해보자면 비장애-남성-중심적 리터러시로 응축되어 있는 이미지의 헤게모니를 우리는 어떻게 결코 순진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것을 전유할 수 있을까요. 이런 생각의 연쇄에 몰두하다보면, 부지런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할 일이 너무나 많아요. 엉덩이를 들썩이며 제 자신을 채근하게 됩니다. 제 이런 마음은 강나영 작가의 작업과 그 날 나눈 이야기로부터 기인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터진 둑에서 물이 쏟아지듯 너무 많은 말을 꺼내놓은 것에 양해를 구해봅니다. 제 말들에 잠식당하진 않을까 걱정돼 며칠 고민도 했지만, 부디 제 말들의 실타래 가운데서 의미있는 몇 가닥을 집어들어 주기를 바라며, 저의 제언은 여기서 마치려고 합니다. 언젠가 전시장에서건, 사석에서건, 또한 그 방식이 이미지던, 물질이던, 말이던 무엇이던 간에 강나영 작가의 응답을 기다릴게요. 거기에 또 제 나름의 방식으로 화답하고 응답하며 우리만의 룰을 형성해 가길 기대하며…


 
፠이 글에서 언급된 텍스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레고리 베이트슨, 박대식 역, 《마음의 생태학》, 책세상, 2006.
김초엽·김원영, 《사이보그가 되다》, 사계절, 2021.
미셸 푸코, 정일준 역, 《미셸 푸코의 권력이론》, 새물결, 1994.
브뤼노 라투르, 《인간·사물·동맹》, 이음, 2010.
에두아르도 콘, 《숲은 생각한다》, 사월의책, 2018.
이토 아사, 김경원 역, 《기억하는 몸》, 현암사, 2020.
전혜숙, 《포스트휴먼 시대의 미술》, 아카넷, 2015.
주디 와이즈먼, 박진희·이현숙 역, 《테크노 페미니즘》, 궁리, 2009.
주디스 버틀러, 김윤상 역,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인간사랑, 2003.
캐서린 헤일즈, 허진 역,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 열린책들, 2013.
프란시스코 바렐라·에반 톰슨·엘리노어 로쉬, 석봉래 역, 《몸의 인지과학》, 김영사, 2013.
Karen Barad, “Agential Realism”, Meeting the Universe Halfway, Duke University Press, 2007.


 
1 전통적인 계산주의적 인지과학과 2세대 인지과학의 맥락과 차이를 짚는데에는 나소영의 미발표 글 <신경인지적 차원에서 담론 실천의 물질화 과정을 전경화하기 – 발제적(enactive) 신체화의 관점에서>에 빚을 지고 있음을 밝힌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