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무나 빨리 자신의 부모를 무시해 버린 한 아이를 상상한다. 아이는 겁에 질려 ‘완전히 혼자’가 되고, 그런 상태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소여나 대상들을 내던져 버리고 토해 버린다.” - 줄리아 크리스테바, 공포의 권력 27쪽
오늘날 동성애 작가가 자신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작업을 두고 비평적 글쓰기를 수행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은 과제이다. 동성애란 단어나 젠더의 개념이 어느 정도 일반화되어가는 현실에서 1970~80년대와 같은 논란이나 반향을 오늘날 일으키기는 어려운 것도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 굳이 비평의 어려움을 사회적 영역에서 찾는다면, 어떤 주제나 분야에서도 유독 속도전에 능숙한 한국사회의 특징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한국의 동성애는 충분히 다뤄진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시점에서 동성애 작가의 작업에 대한 비평적 글쓰기를 한다는 게 이렇게 빈곤하게 느껴질지는 나 자신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가능한 원인을 찾아보니, 듀킴의 작업은 유독 나에게 정동을 일으키지 않았다. 감정의 동요도 공감의 지점도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예컨대 펠릭스 곤잘레즈-토레스의 작업을 두고 니콜라 부리요는 시각이 아닌 공감을 통한 새로운 미학적 체제를 이끌어낸 작가로 정의내린 바 있다. 곤잘레즈-토레스의 작업은 성정체성의 차이를 넘어 보편적인 사랑의 감정과 조응한다. 이처럼 동성애의 자기 서사는 이른바 당사자성이란 ‘말하는 주체’가 자신의 언어를 구축하는 과정으로 인식된다. 듀킴 역시 이 과정을 수행하였댜. 그의 석사 논문은 거부할 수 없는 아버지라는 신적 대상과 기독교 교리의 억압과 유일한 구원자인 어머니와의 관계로 비롯된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자전적 연구논문이다. Dionysia, The true story of my relationship of my body, Doujin Kim, Master Thesis, Royal College of Art, 2015
논문은 자신이 겪은 형언하기 어려운 몸의 충동과 쾌감과 신앙 사이에서 겪는 갈등을 중세 성화와 성경의 일화들을 분석하면서 사적 경험과 신화적 서사를 교차시키면서 성과 속 사이의 어떤 공통분모를 발견한다. 그는 결론에서 부활한 예수야말로 마성스러운 마조히스트라고 해석한다. 위의 책, 91쪽
기독교의 부활 서사는 고통, 희생, 죽음, 부활, 영생은 곤잘레즈-토레스의 작업에서도 발견되는 부분이다. 자신이 머물렀던 침대를 통해 스스로의 부재를 포착한 사진, 포스터로 제작되어 여러 도시 곳곳의 빌보드에서 불쑥 튀어나온 작가의 두툼한 손은 부활 서사를 전유하는 장면이다. 2015년 이후 듀킴은 논문을 통해 밝힌 자신의 마조히즘 성향을 작업의 주요한 동력으로 삼는다. 인공성, 시뮬라크르, 정동의 부재, 유희성 등 하위문화적 코드는 마조히즘의 연극성과 맞닿아 있는 듯하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자신의 성정체성에 관한 일반적인 고민보다는 어떻게 자신의 성적 쾌락을 통하여 존재양식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에 더 가까웠다. 무엇보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기독교적 생활양식 탓에 나 이전에 나를 지배하는 아버지라는 상징으로 적지 않은 심리적 고통을 겪고 있는 작가의 상황을 이해하는 게 그의 작업을 해석하는 첫 번째 단서이다.
마조히즘
개인이 동성애자인 ‘나’를 발견하고 인정하는 과정이란 ‘성’을 중심에 놓고 자신을 해체하고 재구축하는 자기부정과 주체형성이 직조되는 역설의 시간이다. 작가는 이 과정을 두고 일반화된 퀴어 담론에서 볼 수 있는 사회적 타자로 고통을 크게 겪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그 대신 가족공동체를 지배하는 신앙에 의한 고통은 현재 진행형이다. 요컨대 이성애 사회에서 본인의 특이성은 유사여성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이 같은 경험을 거칠게 해석해보자면 듀킴은 사회적 관계에서 젠더 트러블을 겪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여성처럼 받아들여지면서 갈등을 덜 겪었던 것처럼 들린다. 일련의 회고는 자연/인공의 대립 상황이 논쟁보다는 자연스레 자신의 정체성으로 구축되었다는 것으로 들렸다. 작가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듀킴을 여장시켜 사진을 찍은 기억을 떠올렸다. 아직까지도 어머니가 애호하는 사진이라고 한다. 같은 책, 23쪽
듀킴이 성적 역할을 고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던 것은 젠더로서의 이른 경험 덕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성적 쾌락이 주는 충만함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에게 생물학적 신체와 성별의 차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가 성애에 있어서 중요한 건 바로 파트터와 함께 설정한 연극적 상황 안에서 희열을 만끽하는 마조히즘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마조히즘은 성과 사랑의 관계항을 벗어나 성행위를 하나의 연극적 상황으로 삼아 각자가 자신이 맡은 역할을 수행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마조히즘 실천에서 연극성은 단순히 고통을 인내한 후의 쾌감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건 그 과정일 텐데, 마조히즘 실천은 관계를 맺는 수행자들이 각각의 역할을 맡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역할은 일종의 권력구조를 생성하여 마치 자신이 절대자나 희생양이 되는 연극적 경험을 이끌어낸다. 이 연극구조가 마치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전형적인 위계질서를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피지배자가 지배자를 생산하는 주체라는 게 마조히즘의 전복성이라고 문화연구가 닉 맨스필드는 주장한다. 따라서 전시 《화형》이란 표제는 단순히 기독교 교리에 의하여 형벌을 받는 희생자라는 해석 이외에 형벌을 통하여 느끼는 반역적인 성적 충동과 쾌락을 전유할 뿐만 아니라 고통의 인내 이후 도래할 상상의 미래까지를 내포한다. 《화형》의 서사는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동성애 박해, 이를 저지하는 한국 민속신앙의 주술성의 개입, 중세 미술의 도상과 출처를 파악하기 어려운 부적이란 서로 다른 두 장르의 기호의 겨루기, 불의 의식으로 다시 태어난 똥꼬충 똥꼬충은 남성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용어로 영어로는 faggot이다. 여기서 똥꼬충은 당연히 자기비하적인 단어로 사용되었다. 듀킴은 본 전시에서 이처럼 비천한 존재가 순수한 존재로 승화하는 단계를 제시한다.
정동의 부재
이처럼 《화형》은 기독교 신화의 구조를 상당부분 거칠게 전유한다. 동성애를 행한 사람들을 ‘화형’에 처하는 중세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승화된 희생자를 연상시키는 장면은 무엇보다 붉은 기운으로 가득하다(환영, 2019). 듀킴은 이 장면을 순교의 프레임으로 해석한다. 제물이 된 희생자들은 항문신을 섬기는 퀴어들 여기에서의 퀴어는 LGBTQ로 통칭되는 약어를 넘어서 “퀴어가 어느 성적인 종족집단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대표하거나 사회의 관용을 청하며 스스로를 소수화하는 논리를 거부하며, 단지 ‘이성애적인 것’만이 아니라 차라리 모든 ‘정상적인 것’의 체제에 관한 철저한 저항을 지향한다고 쓴다.” 퀴어 이론, 슬픈 모국어 중에서 발췌, 문화와 사회(13), 2012. 11, 57~58쪽. 본 논문은 한국에서의 동성애 연구가 과연 앎과 삶의 의지 중에서 어디에 무게를 실고 있었는지를 되묻고 있다.
순교는 새로운 신앙의 탄생과 맞물린다. 다들 눈치를 챘다시피 이 종교는 듀킴이 허구로 만든 종교 허니허니듀(HoneyHoneyDew)로 골반과 항문을 형상으로 상징된다. 아버지를 거부하고 항문이라는 비인칭의 장기를 섬긴다는 설정은 매우 전복적인 아브젝시옹이다.
“아브젝시옹은 모든 종교의 구성물과 함께 한다. 그리고 그 구성물들이 와해되었을 때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져 다시 나타난다. 우리는 아브젝시옹의 여러 구성물들이 성스러운 것을 규정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공포의 권력, 동문선, 2001, 42쪽
아브젝시옹은 자신의 육체에서 미끄러져 육체의 상실에 이른다. 즉 성스러움이란 정화에 의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되는데, 바로 이 지점이 마조히즘 실천과 마주치는 부분이다.
“이른바 거세를 승인하는 과정에서 무엇보다 소중한 비대상으로서의 자신의 육체를 제공하는 자를 위해 자기 자신의 육체, 자신의 자아라는 순수한 상태로부터 전락하고 아브젝트해짐으로써 도착성이라는 샛길로부터 벗어난다. 분석 치료의 말기에 우리는 마조히즘의 고통과 환희로부터 그것을 볼 수 있다” 위의 책, 2001, 27쪽
듀킴의 작업에서 정동을 느낄 수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작업은 기호와 표면만으로 존재한다. 마조히즘 미학은 숭고와 만나는데 이성/감성으로 측정 불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동시대 미술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지루할 정도의 기계적인 반복과 재조합, 심리상태나 감정이 최대한 억제한 제작 과정 등으로 산출된 이미저리는 디지털 시각문화에 혼합되어 또 다른 숭고의 미학이 나타나는 즈음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듀킴의 작업을 페티시즘의 관점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할 포스터는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으로 초현실주의와 기계를 해석한 적이 있는데, 자본주의 체제는 생산물과 생산자가 서로 닮아가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페티시즘은 마조히즘의 존재양식이기도 하다. 그렇게 듀킴은 남/여성도 인간/사물/자연도 아닌 모든 이항대립의 경계에 위치한 퀴어의 세계를 상상한다. 듀킴은 이 유토피아를 Latrinxia로 부르고 행성의 이름은 목욕, 정화를 뜻하는 라틴어 lavatrina에서 유래한다. 이곳에서 똥꼬충은 성별을 넘은 무성 생물로 설정, 순수 상태이자 이상적 상태로 존재하며, 빛을 자양분으로 변이 번식한다. 똥꼬충은 성별과 성적 분열을 초월한 새로운 인간 유형이다.(듀킴의 글 Latrinxia: A New Utopia에서 발췌.)
듀킴의 상상하는 미래는 사회라는 구조가 부재하는 한편으로는 종교의 시뮬라크르만으로 이뤄진 세계이다. 모든 구조와 장기를 배제하고 표피만을 끌어온 세계가 무엇인지 잘 상상되지 않는다. 과연 비평적 기반이 부재한 파생실재(hyperreal)로만 이뤄진 세계를 통하여 작가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크리스테바는 문학의 시원을 향해 하강하는 글쓰기의 실천이 곧 말하는 주체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행위로 해석한다. 어쩌면 듀킴에게도 시원으로의 회귀 그리고 이상 세계의 설정은 단순히 도피 유토피아라는 결론이 아닐 것이다. 완성된 세계가 아닌 그 세계가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탐구하는 실천들, 크리스테바에게는 그것이 바로 글쓰기인데, 그래야만 여전히 차이를 생산하는 이분법적 문화의 관성을 벗어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