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세》 전시 전경 (서울대학교미술관, 2025) © 서울대학교

무기, 통제의 도구에서 사유의 대상으로

폴 비릴리오(Paul Virilio)는 현대 기술이 군사적 목적과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순수전쟁(pure war)” 개념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전쟁과 평화의 경계가 사라졌다고 보았다. 즉, 평화 시기조차 다음 전쟁을 준비하는 상태로 기능하며, 전쟁 상태가 지속된다는 것이다. 비릴리오는 기술 발전이 곧 군비(軍備) 경쟁과 맞닿아 있으며, 기술 그 자체가 인간을 상대로 수행되는 보이지 않는 전쟁이자 무기라고 분석했다. 교통수단, 통신, 영상 기술 등은 모두 군사적 목적에서 발전했으며, 이는 결국 사회의 구조와 질서를 군사 논리에 의해 재편하는 결과를 낳는다. 비릴리오는 이러한 기술-군사 복합체가 현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고, 이는 정치나 윤리보다 우선한다고 비판했다. 현대 기술은 더 이상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사회적·정치적·경제적 구조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무기적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대학교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무기세(武器世)》는 비릴리오의 이러한 통찰을 예술의 언어로 적합하게 풀어낸 듯하다. ‘무기세’는 인류세(Anthropocene)나 자본세(Capitalocene)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무기(Weapon)가 지배하는 시대를 의미한다. 기획자인 심상용은 무기가 현대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예술로 드러내면서 폭력의 질서에 균열을 내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 전시는 무기가 전쟁터의 총과 칼에서 벗어나 기업의 경쟁 논리, 미디어 소비 방식, 기술 발전의 흐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작품으로 보여준다.

전시는 세 개의 섹션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섹션 ‘무기화된 일상’은 무기가 일상의 질서 속에 스며든 방식을 탐구한다. 허보리의 설치 작품은 넥타이와 정장 옷감으로 만든 탱크와 총을 통해 자본주의와 군사 질서의 결합을 상징한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경제적 경쟁 구조가 군사적 질서와 다르지 않음을 드러낸다. 실제 갑옷을 입고 전장에 나가는 것과, 정장을 입고 일터로 나가는 것에 별 차이가 없는지도 모른다. 강홍구의 사진은 평범한 도시 풍경 속에 숨어 있는 군사적 흔적을 포착한다. 전투기가 하늘을 가로지르거나 바다에 군함이 정박해 있는 모습은 군사적 힘이 일상에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안성석의 사운드 설치 작업은 군대의 기상 알람 소리를 반복적으로 들려준다. 사진병으로서 동료들의 죽음을 목격한 경험을 바탕으로, 알람 소리를 통해 무고하게 희생된 군인을 기리는 작업이기도 하다.

두 번째 섹션 ‘스펙터클로서의 무기’는 무기가 미디어와 예술에서 어떻게 시각적으로 소비되는지를 탐구한다. 최재훈의 퍼포먼스 결과물은 반사되는 스테인리스 스틸 판에 총을 쏘아 실탄의 흔적을 남기는 장면을 통해 폭력의 자기파괴적 속성을 형상화한다. 관객은 자신의 얼굴이 실탄의 흔적 위에 겹쳐지는 모습을 보며 폭력이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역설을 경험한다. 온통 하얀 노영훈의 작품은 디즈니 캐릭터 형태의 방독면이나 풍선처럼 보이는 지뢰 등을 통해 폭력의 이미지가 오락으로 소비되는 현실을 풍자한다. 실제 2차대전 때 어린이용 방독면을 재현한 것인데, 전쟁의 공포가 영화, 게임, 뉴스에서 흥미로운 콘텐츠로 변질되며 폭력의 본질이 왜곡되는 현상을 다룬다. 이용백의 사진 작품은 평화로운 꽃밭에서 위장복을 입은 군인을 찍어, 안전하다고 느끼는 공간조차 군사적 질서에 의해 은밀히 통제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현대 사회에서 폭력이 일상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음을 시각화한다.

《무기세》 전시 전경 (서울대학교미술관, 2025) © 서울대학교

세 번째 섹션 ‘무기, 낯익은 미래’는 무기의 영향력이 환경과 기술의 영역으로 확장되면서 만들어질 미래를 경고한다. 하태범의 시리아 내전 현장의 처참함을 흰색 모형으로 재현한 사진에는 핏빛도 울부짖음도 없고 그저 적막한 폐허만이 보인다. 전쟁 현장을 시적인 풍경처럼 보이게 하여 전쟁 이미지가 미디어에서 어떻게 미화되고 소비되는지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실제 전쟁 사진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신, 한 단계 거른 형태로 재현함으로써 이미지 자체에 대한 메타적 성찰을 이끌어낸다. 오제성의 조각 작품은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의 아버지로 연결되는 기억을 표현하는데, 이 군상의 줄서기는 전쟁에 나가는 군인들이 일렬종대를 이룬 것 같아 흥미롭다. 방정아의 회화는 핵발전소와 좀비의 이미지를 결합해 기술과 폭력이 결합된 새로운 통제가 인류의 미래를 위협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실제 군사기밀 공간으로 지도에 없는 핵발전소와 좀비를 드러내고 있다.

《무기세》는 무기가 현대 사회에서 단순히 군사적 도구가 아니라 사회적 질서를 형성하고 강화하는 시스템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폭로한다. 무기는 전장의 총과 칼에 국한되지 않고 자본주의적 경쟁, 기술 발전, 미디어 소비 방식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허보리의 탱크는 군사 질서와 경제 질서가 맞닿아 있음을 보여주고, 노영훈의 방독면은 폭력의 이미지가 문화 상품으로 소비되는 방식을 드러낸다. 오제성의 폐허는 무기가 남긴 환경적 파괴의 실체를 가시화한다. 무기의 논리는 현대 사회에서 자본주의적 경쟁, 기술 발전, 권력 질서와 결합하며 결국 일상 속에 폭력적 질서를 내면화하게 만든다.

그러나 전시는 무기의 논리를 전복할 수 있는 예술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허보리의 탱크가 옷감으로 만들어졌듯이, 폭력의 도구는 상징의 차원에서 해체될 수 있다. 최재훈의 거울 퍼포먼스에서 폭력의 순환 구조가 드러나듯이, 예술은 폭력의 구조를 가시화하고 전복하는 힘을 가진다. 기획자 심상용은 무기 생산과 수출에 앞장서는 강대국이 현대미술 담론을 주도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예술이 단순히 무기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기적 사고방식에 균열을 낼 수 있음을 강조한다. 결국 전시는 무기적 질서를 넘어설 수 있는 예술의 힘을 제안한다. 관객은 이를 통해 인간성과 평화를 다시 상상하고 모색할 수 있는 계기를 얻는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