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논알고리즘 챌린지’에 관하여
2023년과 2024년에 걸쳐 세화미술관이 진행한 ‘논알고리즘 챌린지’는 비인간과 인간에 대한 색다르고 다양한 서사를 보여준다. 세화미술관은, 이 전시에 대해 “인공지능시대 인간과 비인간의 존재와 관계 속에서 ‘인간다움’에 대해 다각도로 사유하는 3부작 기획 프로젝트”라고 정의한다.
‘감각-신체-기억’이라는 주제로 연결되는 이 전시는 ‘감각’을 주제로 하는 1부 《귀맞춤》,
‘신체’에 집중하는 2부 《가장 깊은 것은 피부다》
그리고 ‘기억’을 다루는
3부 《4도씨(4℃)》로 구성된다.
세화미술관은 각 파트 별로 3명씩 총 9명의
신예 예술가를 초청하여 우리 시대의 화두인 인공지능 현상에 대해 비결정적 해석을 던진다. 이 전시의
핵심어는 제목 그대로 ‘논알고리즘’과 ‘챌린지’이다. 세화미술관
기획 글에 의하면, 이 ‘논알고리즘’은 곧 ‘비결정적 알고리즘(non-deterministic
algorithm)’을 의미한다. 이를 기반으로 전시 의도를 해석해 보자면, ‘논알고리즘 챌린지’는 ‘예술의
비결정론적 도전’을 의미할 수도 있고 혹은 ‘비결정론의 시대적
도전’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이는 비결정성으로서의 논알고리즘이
인간다움일 수도 있다는 가설이며, 최신 인공지능 기계들과 이 영역을 공유해 나가는 인간 자신에게 되묻는
탐색과 성찰의 제안이기도 하다.
알고리즘, 비결정 알고리즘, 그리고 비(非)알고리즘
이 전시에서 비(非)알고리즘은 비결정적
알고리즘 즉 비결정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비알고리즘과 비결정알고리즘은 개념상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컴퓨터과학 분야에서 알고리즘은 특정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설정한 유한개의 절차(process), 명령(instruction) 및 규칙(rule)의 집합(set)을 의미한다. 컴퓨터과학은 알고리즘을 여러 범주로 구분하고 있으며, 그 범주 중에서
알고리즘을 결정적 알고리즘(deterministic algorithm)과 비결정적 알고리즘(non-deterministic algorithm)으로도 분류하기도 한다.
단순히 말해, 결정적 알고리즘은 일반적으로 수학함수와 유사하며, 동일한 입력에 대해 동일한 절차로 동일한 결과를 산출하는 알고리즘이다. 예를
들어 ‘y = x+1’이라는 1차 함수는 결정적 알고리즘에
해당한다. 따라서 결정된 절차를 통해 결정된(예측 가능한) 결과를 얻을 수 있으므로 결정론 (determinism)에 해당한다. 이와 달리 비결정적 알고리즘은 동일한 입력에 대해 매번 다른 절차로 모두 다른 결과를 산출한다. 동일한 입력(선택)을
하더라도 비결정적 절차를 거쳐 비결정적 결과를 산출하기 때문에 비결정론(non-determinism)에
해당한다. 비결정적 알고리즘은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하기 어려운 문제에 대한 대안, 즉 ‘대략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경우 사용된다. 비결정적 알고리즘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사례를 찾기 어렵다. 가장 쉬운 사례를 논하자면, 알고리즘의 결괏값을 예측할 수 없도록
암호 및 보안 분야에서 사용하는 ‘확률적 알고리즘
(probabilistic algorithm)’이 그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비결정적 알고리즘은
인공지능, 기계 학습, 최적화 문제 등에 이용된다. 거칠게 해석하면 최근 인공지능 현상으로 크게 대두되는 챗지피티 등 대규모 언어 모델(LLM, large language model)도 비결정적 알고리즘의 속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이 전시의 핵심어인 논알고리즘을 직역하면 ‘비(非)알고리즘’이 된다. 논알고리즘에 대한 전시 기획 글과 다르게 비알고리즘과 비결정적 알고리즘은 개념상 차이가 있다. 비알고리즘은 알고리즘이 아닌 것을 사용하는 문제 해결 방식이며 비결정적 알고리즘은 비결정적이더라도 알고리즘을
사용한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이 둘은 차이를 가진다. 비알고리즘은 알고리즘 밖의 요소들, 즉 외부 상황이나 인간 직관과 영감, 우연과 확률 등을 통해 문제
해결에 도달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비알고리즘의 특징은
20세기를 거쳐 현재 근현대예술이 사용했던 예술적 실천과 유사하다. 무의식, 우연성과 불확정성, 소음, 그리고
관객 참여 등 동시대예술의 특징은 기존 예술 알고리즘에서 벗어난 새로운 예술이 지향하는 비알고리즘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전시는 근현대미술사 맥락의 연장선에 있으며, 더불어 최근 대두되는 인간화되고 자연화되는 기계
현상을 불확정적으로 인식함으로써 색다른 동시대성을 추구한다.
감각 - 신체 - 기억 : 디오니소스적
인간에 관한 이야기
‘감각-신체-기억’이라는 파트별 전시 주제의 선정과 구성의 흐름은 마치 ‘생명체’ 특히 ‘인간이 세계와 타자를 인식하는 과정’을 연상하게 한다. 이것은 인간이 감각기관을 통해 얻은 데이터(자극)를 뇌의 작용을 통해 인지(앎)하고 기억하며 인식(해석과 판단)하는
일련의 인식적 정신작용 과정과 닮았다. 전시 ‘논알고리즘
챌린지’를 구성하는 파트별 주제들의 공통점은 ‘몸’과 ‘정신’이라는 분리된
두 개념의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으로 귀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전시는 오히려 ‘살’과 ‘몸’을 통한 인간의 영혼에 주목한다. 어떤 측면에서 인간은 몸이 없다면 감각할 수도, 생각할 수도 그리고
기억할 수도 없는 존재자이기 때문이리라. 이 전시는 더 나아가 ‘살’과 ‘몸’으 로 대표되는
인간적인 비합리성과 비결정성을 지향한다. 그것은 비알고리즘적이기에 이성에 의해
종합된 형식지(explicit knowledge)로 드러나지 못하고 암묵지(implicit knowledge) 영역을 부유한다. 이 암묵의 지식이란
곧 감(感)과 신체적 실행의 반복을 통해 종합된 개인화된
지식이자 ‘살(la chair)’의 지식인 것이다. 이는 비결정적이다.
따라서 이 전시는 디오니소스적이다. 인간의 비합리성과 비결정성은 곧 술과 춤의
신(神)
디오니소스가 상징하는 비알고리즘과 무질서 그리고 인간의 열정과 본능에 해당한다. 이러한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아직’ 기계가 가지지 못한 ‘어떤 것’을 의미하며, 기계가
가진 아폴로적 객관주의와 대치된다. 어쩌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결국 인간의 감정과 무의식 그리고 영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전시 핵심어 ‘논알고리즘’은 ‘비알고리즘(알고리즘이
아닌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이들의 도전, 즉 ‘비알고리즘’이라는 기치(旗幟) 아래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기계의 이성 작용과 그 현상에 대한 예술의 도전적 서사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 전시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이다.
파트2. 《가장 깊은 것은 피부다》: 살갗풍경
살갗은 나와 세계 사이의 최전선에 있으며, 경계이자 자아와 타자가 서로 교환하는
미디어이며 인터페이스이다. 인간은 살갗에 의해 세상을 이해하며 세상은 그 살갗을 통해 인간으로 진입한다.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그의 저서 『지각의 현상학』(1945)에서 “내부와 외부는 분리 불가능하다. 세계는 전적으로 안에 있고 나는
전적으로 나 밖에 있다.”라고 진술한다. 결국 인간과 세계는
살갗을 통해 서로 진동하고 공명하며, 인간은 살갗풍경(skinscape)을
그리면서 세계-내-존재(in-der-Welt-sein)한다. 여기에서 주관과 객관은 통합되며 몸과 정신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인간 신체는 가장 깊고 근원적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신체를 통해 세계와 조응(照應)하며 살갗풍경을 구성할 때, 살아있는
자신의 존재를 지각하며 성찰하게 된다. 《가장 깊은 것은 피부다》는 이성적이며 지혜로운 사유의 인간으로
대변되는 호모 사피엔스 대신 ‘살아있는’ 신체의 인간(homo corpus)에 주목한다.
한편,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은 1967년 “미디어는 마사지다.”라고 선언하며, 미디어와 감각의 관계를 규정지었다. 일반적으로 마사지는 피부와 근육을 규칙적인 반복 동작으로 자극하여 통증을 경감시키고 그 상태를 호전시킴으로써
심신 이완을 추구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즉 촉각적 접촉과 규칙적 반복 동작(진동)은 마사지의 핵심이다. 따라서 “미디어가 마사지다.”라는 언명은 곧 미디어는 곧 살(la chair)이자 촉각 그 자체이며 미디어가 가진 촉각적 특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왜 매클루언은 “미디어는 향수이다.” 혹은 “미디어는 노래다.”라고
은유하지 않은 것일까? 그것은 촉각이 인간의 근원적 감각이며 동시에 다른 감각을 통합하면서 인간 감각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감각기관은 살로 구성되어 있기에 촉각적이며 그래서 우리는 고통을 느낀다. 또한 “촉(觸)이 좋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한 감각기관이 보유한 감각 능력의 예민함을
넘어 예지력과 통찰력이 우수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촉은 하나의 감각이 아닌, 개별 감각을 통합하여 육감의 영역으로 승화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살갗풍경을 구성하는 핵심이 된다.
결국 미디어가 마사지인 이유는 미디어가 인간의 살 같은 역할을 해야 함에 있다. 이러한 매클루언의 마사지 개념은 메를로-퐁티의 신체와 지각의 개념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인간의 생물적 신체성은 아직 기계가 온전히 가지지 못한 인간의 마지막 보루일지도
모른다. 인간화되는 인공지능은 아직 이러한 인간의 살갗과 촉을 가지지 못해서일까? 미디어로서 인공지능 기계는 그것의 몸인 인터페이스를 통해 인간과 상호작용한다.
자연적 신체를 완전히 구축하지 못한 기계는 자신만의 살갗풍경을 그려내어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성찰적으로 인식하며 인간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가? 전시 《가장 깊은 것은 피부다》는 기계화되어 가는 인간과 인간화되어 가는 기계의 중첩 시대에
인간과 기계가 서로 점유해 가는 신체 현상에 대한 비결정론적 질문을 던진다. 이 전시에서 3인의 작가는 신체를 중심으로 각자의 비결정론적 살갗풍경을 전개한다.
정찬민
사진과 미디어아트를 전공한 정찬민은 신체의 움직임과 행동에 주목하고 기술과 결합한 21세기
인간 삶에 대한 비평적 미디어 작품을 창작해 왔다. 이동(移動)은 한 장소에서 다른 한 장소로 움직이는 것 이상의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할 때의 경로이다. 최신 기술과학(technoscience)은 이 경로를 시간 및 비용 대비 최적화시킨다. 최단
거리를 지향했던 인간은 이제 최소 시간과 동시성을 추구한다.
전 지구가 디지털 네트워크화된 현재, 인간에게 물리적 거리의 중요성은 희미해져
간다. 기계를 이용해 인간이 직접 이동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 인간이
직접 근육을 쓰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다. 온라인 상거래와 물류 운송 산업이 결합한 플랫폼 비즈니스에서
인간의 몸은 이미 소외되었다. 이에 정찬민은 21세기 고도화된
자본주의 기술 산업사회가 초래한 인간의 ‘신체 소외현상’을
진지하게 비평한다. 여기에 기계가 깊게 연관된다. 영어 단어 ‘기계(machine)’의 어원은 그리스어 ‘마그(magh)’에서 왔으며 그것은 ‘힘(power)’을 의미한다. 빌렘
플루서 (Vilém Flusser)에 의하면, 서양 맥락에서
기계는 힘과 깊게 관련된 개념으로, 자연을 속이는 장치이다. 그리스인들은
이를 ‘메코스(mechos)’라 불렀으며 이는 원래 지렛대(중력을 속이는)나 함정(인간과
동물을 속이는)을 의미했다고 한다. 기계를 제작하는 행위가
그리스어로 ‘테크네(techne, 기예)’이며, 이는 오늘날 ‘art(예술)’의 어원이라는 것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테크네가 고도로 진화한 테크놀로지(technology) 곧 기술은 기계를 제작하는 힘이며, 오늘날 기계는
기술에 의해 자연을 속일 뿐만 아니라 인간 신체를 철저히 속인다. 이렇게 정찬민은 21세기 기술과 기계가 초래하는 인간 신체에 대한 기만행위에 주목하며 자신의 소박한 기술로 자본화된 거대 기술
현상을 성찰하는 것이다.
작품 〈멀미로운 생활〉과 〈현상된 움직임 2024 버전〉은 이러한 맥락에서 펼쳐진
정찬민 특유의 살갗풍경이다. 여기서 작가는 본인 스스로 ‘이동기계’인 광역버스에 탑승하여 발생하는 자기의 신체 현상에 주목한다. 단편
영상 다큐멘터리 작품 〈멀미로운 생활〉에서 시간과 거리를 기만하는 기계인 버스를 인공위성 발사체 누리호와 대비하여 보여준다. 누리호가 중력을 기만하면서 탑승자에게 가하는 물리적 현상들을 광역버스에 탑승한 정찬민의 상황에 빗대어 서술하는
것이 흥미롭다.
이 작품에서 정찬민은 기계의 기만적 효율성에 대한 반대급부로 얻는 자동차 멀미증상이 우리가 매일 출퇴근 시간에서 겪는 신체
소외증상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기계에 의한 이동은 인간이 ‘슬기(도구적 이성)’를 이용한 이동 행위지만 진정한 ‘슬기로운 이동 생활’은 아니다. 이는
인간이 기계에 ‘취한’ 생활이다. 작품 〈현상된 움직임 2024 버전〉 역시 광역버스에 탑승한 정찬민이
출발지부터 목적지까지 이동하면서 획득한 자신의 정수리 기울기 데이터를 3차원 형상으로 육화시킨(physicalize) 작품이다. 자동이동기계 속에서 정찬민은 도착지까지
효율적 이동이라는 작용에 대한 반작용인 소음적 진동에 의해 끊임없이 흔들림을 당한다. 〈현상된 움직임 2024 버전〉에서 축적된 정수리 데이터가 보여주는 3차원 흔들림
형상은 마치 배배 꼬여 뒤틀린 신경질적 증세를 보여주는데, 이는 정찬민 신체가 반응하는 아우성이자 정찬민에
의해 ‘현상된(developed)’ 몸부림이다.
또 다른 작품 〈이동부피〉는 정찬민이 5일 동안 이동에 할애한 시간, 위치, 평균속력 정보를 종합한 이동량 변화를 다섯 개의 공기 조형물
부피 변화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동량이 많아지면 부피가 커지고 적어지면 부피가 작아진다. 적게 이동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21세기 한국. 한 인간의 이동량이 보여주는 부피 변화 패턴은 이동하면서
살아왔던 인간 신체의 본모습을 상기시킨다. 이동이 적어 쭈그러들어 버린 공기주머니(폐)들은 곧 정찬민이 근육으로 체험한 21세기 인간에 대한 살갗풍경이다.
인간 신체의 움직임과 행동에 대한 주제를 ‘이동’으로 좁히면서 정찬민 특유의 사유를 심화하였다는 점에서 이번 작품들은 의의를 가진다. 자신의 사유를 다양하게 형식화하기 위해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기계 설치, 실사
비디오 영상, 3차원 프린트와 3차원 컴퓨터 그래픽 영상
등 여러 매체와 질료를 사용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것은 정찬민에게 예술적 도전일 것이다. 그러나 작품들이 일관성 있게 가지는 사회 비평적 무게감과 다르게 형식적 측면에서 ‘정찬민다움’이 확연히 드러나지 않음을 느낀다. 이는 다양한 매체와 기술을 사용하려는 작가의 강박과 부담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작가가 지적했던 기술이 제공하는 기만적 효율에 정작 정찬민 자신이 사로잡힌 것이 아닐까? 예술 창작의 긴 여정에서 목적지를 위한 ‘효율적 이동’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창작에 대한 ‘비효율적 느림의 성찰’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