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대팔경과 문자들》 전시 전경(홍티아트센터, 2024) ©홍티아트센터

문화적 習合의 진경과 문자-그림의 새로운 기호, 〈다대팔경과 문자들〉
 
지민석 작가의 〈다대팔경과 문자들〉 전시는 홍티아트센터 레지던시 3개월만의 성과라고 하기에는 굉장한 속도와 다작이 느껴진다. 이미 작가 자신의 체득된 세계가 다대포 일대의 자연 환경과 역사 및 전설의 내력 속으로 침투해 들어갔기에 가능한 작업이다. 일단 작가는 샤머니즘의 요체를 포스트-페티시즘의 세계로 수렴하고 있다. 어떤 무신도 라든가 어떤 무구 라든가 또한 어떤 부적이나 문자도 라든가 하는 일체의 기존 샤머니즘 코드에 대하여 작가는 그 코드 본래의 진하게 문화화 되어 있는 인장 印章 효과 랄까, 혹은 신인 神印 효과 랄까 하는 일종의 페티시한 성격을 새롭게 재문화화 시킨다. 인장 효과 혹은 신인 효과라는 것은 본래 샤머니즘이 노리는 주술적 결과이다. 페티시는 그 주술을 현실화하기 위하여 샤머니즘이 사용하는 여러 가지 물신주의적 접근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물신주의라는 것은 자본주의의 상품 교환에서 일어나는 화폐의 물신으로서 타파되어야 할 중요한 미신이다. 이 미신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경제동물의 종교와 다름없는데, 이것을 종교로 보냐 이데올로기로 보냐에 따라 화폐-페티시를 파괴할 수 있는지 여부가 결정된다. 사실 지금까지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로 보고 화폐에 대한 물신숭배 풍조에서 건져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하지만 언데드 상태에서 지속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화폐-페티시를 떨쳐버리지 못한 채, 지금까지 굴러가고 있다. 죽었지만 작동한다는 의미에서 이 페티시즘은 분명히 냉소적이며 믿지 않으면서 그 속물적 효과에 종속되어 있다.

지민석 작가의 다대포 일대의 풍경들을 자신이 마치 그 옛날 한자를 발명한 위대한 창제자 창힐 蒼頡처럼 문자도라는 얼개 속에 감아들이는 것은 소위 다대팔경이라는 그 동리의 절경들에 대한 상징적 산수화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 풍경 속에 깃든 텃대감, 지박령, 토호신들의 끈적끈적하면서도 단단한 세계를 녹여서 자신의 문자도 속에서 재문화화 하려고 시도한다. 이 재문화화 란 기존의 텃세 체계 속에서 기득권화 되고 현상유지화 된 영역들을 문화의 새로운 도장을 찍어서 신인 神印적인 새로운 영역으로 이동시키려는 것이다. 〈화엄경〉에서 이러한 신인적인 새로운 영역으로 가는 수행을 ‘해인삼매 海印三昧’라고 하는데, 출렁거리는 바다의 파도 하나하나마다 생명의 도장을 찍는 삼매경에 들 수 있다는 뜻이다.

일종의 해인삼매를 위한 밑밥으로 지민석 작가가 여러 무신도 배치 라든가 코카콜라 신령의 창안이라 든가 하는 작업들이 샤머니즘 코드로서 익숙한가 하면, 사실은 그 익숙함 속에서 삼매에 빠져드는 유인책이 깃들어 있다. 풍경 + 문자도 라는 얼개는 풍경을 물신화 하는 상징적 단위로 만드는 것이다. 부적이라 든가 하는 개인적 안심인명의 도구처럼 만들어졌는데, 굿으로 말하면 “부자들 더 부자 되게 해주는” 재수굿 혹은 “땅에 붙박혀서 터주대감으로 쪼그라든 것을 펴서 본래의 하늘 대감으로 되돌아가게 해주는” 대감굿을 위한 플랫폼이다. 지민석 작가의 의도는 단순히 다대포 일대의 명승고적들을 둘러보고 그에 합당한 기념비적인 그림이라 든가 샤머니즘적 재현이라 든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화폐-페티시에 대항할 만한 새로운 방편으로서의 페티시, 그럼으로써 페티시를 넘어서는 페티시로서의 포스트-페티시즘을 선양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어떤 대감이 내 대감이냐, 어떤 대감이 내 대감!
욕심도 많고 탐심도 많은 내 대감 아니던가
앞다리 선각에 뒷다리 후각 양지머리 걸안주는 엇다두고
이게 무어냐, 이걸 차렸다고 차렸느냐”

 

〈대감타령〉 중에서 페티시즘은 처음에 식탐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돈보따리 내놓으라는 윽박으로 이어진다. 이때 기브앤테이크의 교환거래를 하기 위한 협상을 하지 않고 사람들은 못 살고 못 먹고 못 입으며 질곡에 빠져 있음을 호소한다. 이때 대감신은 마음을 고쳐먹고 “작은 정성을 큰 정성으로 알고 내가 복도 빌어주고 명도 주마” 라고 회심한다. 화폐-페티시 앞에서 대감신은 재수와 복을 내놓으라는 부자들의 뻔한 개수작을 스스로 터줏대감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하늘 대감의 무한히 베푸는 권능으로의 귀환으로 응수한다. 그럼으로써 지역 토호들, 안 베푸는 자린고비 구두쇠들, 텃세로 똘똘 뭉친 터줏대감 유지들이 회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돈이 필요하느냐, 그럼 나에게 베풀어라. 나에게 천만금을 줘라, 그럼 억만금으로 베푸마” 이런 대감타령은 돈타령이다. 이 돈타령하는 기저에 깔린 화폐-페티시는 그 성격이 정반대로 돌변한다. 무한히 쏟아지는 금화의 빗속에서 부자가 개과천선하는 것, 영화 〈이반 대제〉에서 끝없이 푸대자루 속으로 들어가는 금화로 탐욕의 침을 흘리는 것 이렇게 두 갈래가 화폐-페티시의 잠재성 속에 한꺼번에 깃들어 있다.

지민석 작가는 이러한 양가적인 화폐-페티시를 탈코드화시키듯이 자신의 문자-그림을 그려간다. 사람이 질릴 정도의 풍요와 질릴 정도의 번영과 질릴 정도의 평화를 누리면 그 후에야 비로소 그러한 페티시 지향에서 자유로워진다는 샤머니즘의 숨겨진 면모가 그림 속에 한가득이다. 그러한 무량한 베품과 무량한 재복이 그 문자-그림의 기호 속에 어떻게 하여 담기는가 살펴보니, 작가는 태평양 양안 저편 멕시코 신화와 페요테 샤머니즘에 정통해 있다. 사막에서 선인장 神을 만나도 그대로 지나쳤다가 그 뒤에서 선인장을 채취한다는 〈돈후앙의 가르침〉의 교훈은 페요테가 아무리 필요해도 선인장 神의 앞전이 아니라 뒷전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민석 작가의 전시장 공간 허공을 고공침투 하듯이 가르는 영험스런 연출은 태평양 양안의 문화 즉 한국의 샤머니즘과 멕시코 신화 사이의 보이지 않는 터치들이 함께 하고 있다고 하겠다. 양안의 두 문화가 습합된 부분을 주목해보는 것이 긴요하다. 또한 작가는 인생에 파도가 커야 그 매머드급 파도의 크기를 따라 성장한다고 하는데, 이 작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상상초월의 파도를 타고 가는 풍운아적인 인생 스토리에서 이미 화폐-페티시를 뛰어넘는 재문화화의 기획, 기존의 문화적 코드를 플랫폼 삼아서 새로운 코테이션의 포스트-페티시즘이 가능하다는 것이 충분히 납득된다.

요컨대, “물신으로 물신을 넘어선다”라는 매우 위험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태평양 양안의 문화에서 특출나게 발견되는 명제가 지민석 작가의 작업 세계를 꿰뚫고 있으며, 특히 다대팔경처럼 관광지의 통속화된 랜드스케이프를 갖다가 터줏대감, 지박령, 토호신들이 시기 질투하는 영역을 뛰어넘어 해인삼매에 들게 한다는 것이 매우 고무적이다. 이런 방식으로 숭고미를 추구한다는 것은 포스트-페티시즘이 한국 사회에 샤머니즘 코드를 타고 지향되는 것은 사실 많지만, 지민석 작가의 경우가 시대를 통할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코카콜라, 치토스처럼 멕시코에서 크게 유행한다고 하나 지난 30년 동안 글로벌 유행이었던 작은 역사도 있는 반면, 캠벨 주스 같은 미술사 내부에서 나온 상품 물신도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내부 맥락과는 다소 갭차이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멕시코 옥수수 여신과 담배 여신 그리고 날개 달린 우주뱀의 신 케찰코아틀 같은 세계가 한국의 전형적인 동해안 별신굿 문화라든가 다대포 풍경 속에 깃든 애미니즘적 문화라든가 등등 낯선 세계와 거의 치명적으로 습합되는 작업은 지민석 작가가 유일할 것 같으며, 이는 멕시코의 애니깽이라든가 마야 문명 아즈텍 문명 등등 대상화되거나 소재화 된 형태의 작업과는 그 수준을 달리하는 것이다. 앞으로 태평양이라는 물신명이 양안의 문화적 습합, 샤머니즘의 포스트-페티시즘적 재문화화 작업 속에 나타나기를 앙망하며 건투를 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