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llation view © pal project

아직도 온기가 남은 칼날이 막 탁자 위에 내려놓였다. 무언가가 끊어졌다. 연약하고 평화롭던 막이 순식간의 절개로 갈라졌다. 살의 문이 사방으로 열려버렸다. 벌어진 상처, 틈.

가장 먼저 당신을 덮치는 것은 붉음이다. 밝고도 깊은 카민색 피가 튀어나온다. 탈출하려는 듯, 다른 곳으로 흘러가려는 듯, 공기 중에 금속성 냄새를 뿜으며 퍼져 나간다. 그것은 침범의 냄새, 피를 흩뿌린 칼날의 냄새다. 상처는 아직도 박동한다. 숨을 쉰다. 그 안에서 형상들이 떠오른다. 서로 다른 것들이 뒤섞이고 충돌하며 섞여드는 혼돈의 수프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마치 씨앗이 담긴 자루나 모래사장을 대하듯, 손을 천천히 그 마그마 속으로 밀어 넣는다. 휘젓고, 더듬고, 찾아낸다.

그 안에서 우리는 젤라틴처럼 흐물거리는 투명한 구체, 울고 있는 꽃, 고대의 진흙 항아리, 갓 허물을 벗은 뱀의 축 늘어진 피부 같은 물컹한 고리, 물건인지 파편인지 모를 잔해들을 꺼낸다. 그리고 나서, 너무도 익숙한 형상을 만난다. 우리 자신의 형상. 그것은 생명을 품고 있다는 직감을 주며, 결국 그 역시 열어보아야 한다는 느낌을 준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국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칼과 상처는 식었지만, 발견물들은 여전히 갓 드러난 채, 눈앞에 놓여 있다. 이것이 바로 《HARUSPEX》에 참여한 작가들의 작업이다. 그들은 해부의 결과물을 이번 전시에 모아 펼쳐 놓았다. Haruspex—고대 에트루리아의 제관으로, 제물의 내장을 읽어 미래를 점쳤던 이들에서 따온 이름이다. 어원은 harviga, 즉 “내장을 조사하는 자”에서 비롯되었다. 이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 역시 금기의 표면을 절개하며, 그 속에 숨겨진 혼돈의 비밀을 파헤치고자 한다.

앙리 미쇼(Henri Michaux)가 말했듯, 그들 각자는 “기이한 내면-외면”을 탐색한다. 하나의 형태가 다른 형태를 감추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을 따라. 확신하기 위해, 그들은 과감히 절개하고, 파고들고, 꺼내고, 뚫고, 찢는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이제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게 되는 위험을 감수한다. 시점을 전환하고, 시선을 흘리며, 발을 헛디디고, 위장을 뒤흔든다. 모든 벌어진 상처는 어지러움을 부른다.

우리는 왜 무언가를 열고, 해부하고, 경계를 녹여야만 할까? 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단면으로, 속이 비어 있고 조각난 모습으로 보려 하는 걸까? 그것은 아마도 아직도 안쪽 깊이 타오르고 있는 어떤 진실을 꺼내 보이기 위해서일까? 세상에 우리의 날것의 신경을 노출시키기 위해서? 아니면 우리와 우리가 아닌 것 사이의 경계, 그 미묘한 한계 상태를 시험하기 위해서일까?

혹은, 들여다보고자 하는 본능적인 욕망에 휘말린 채, 혐오와 쾌락, 금기를 넘는 쾌감, 황폐와 무질서 사이의 기울어진 경계에 도달하고자 해서일까? 상상력을 되살리고, 표면을 교란하고, 긴장과 집중을 유지하기 위해서? 들뢰즈(Deleuze)의 말처럼, 인간에게 감금된 삶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아니면, 어쩌면, 그것은 본능적인 충동, 불가피한 금기 어김, 우리가 절대 열어서는 안 되는 그 문—푸른수염의 이야기 속 금단의 문—을 열어젖히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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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를 해부하는 것은 고대에도 오랜 시간 금기로 여겨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의 역사』에서 이렇게 썼다. “인간이라는 종을 이루는 것을 본다는 것은 매우 큰 혐오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혐오감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신 해부가 금지되었던 이유 중 하나이다. 죽은 이를 향한 존중, 그리고 당시 ‘오염물’로 여겨졌던 피에 대한 혐오가 그 감정을 더욱 강화했다.

기원전 3세기, 알렉산드리아에는 해부를 활발히 수행하는 학파가 존재했으며, 헤로필로스 같은 인물은 죄수들을 대상으로 공개 생체 해부를 수백 회 이상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중세에는 교회의 공식적인 금지가 없었음에도 해부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체에 대한 현대적 인식이 생겨나기 전, 중세인들에게 몸은 자아의 일부라기보다는 우주의 상징체계 속 일부였다. 인류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David Le Breton)은 중세에서는 몸이 하나의 우주적 반영으로 여겨졌으며, 그 완결성을 훼손하는 것은 곧 세계 자체에 상처를 내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흑사병의 창궐은 공공 해부를 불가피하게 보편화시켰다. 중세 최고의 의사 중 한 명이었던 기 드 쇼리아크(Guy de Chauliac)는 흑사병 희생자들을 연구하며 림프절 페스트와 폐 페스트를 구분해냈다. 그는 시신을 접촉하다 감염되었지만 살아남았고, 심지어 자신에게 생긴 부기를 직접 절개하기도 했다.

1532년, 18세의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는 묘지기에게서 몰래 구입한 시체 조각을 해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자신이 대학에서 배우던 고대의 해부학 문헌이 틀렸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졸업 후 그는 파두아(Padua) 대학에서 해부학 교수로 재직하며 처형된 범죄자의 시신을 합법적으로 해부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그의 생애는 700쪽에 달하는 해부학 대작 『인체 구조에 대하여(De humani corporis fabrica)』로 완성되었으며, 여기에 실린 정밀한 일러스트는 얀 반 칼카르(Jan van Calcar)의 작업으로 알려져 있다. 베살리우스는 49세에 생을 마쳤고, 그의 무덤은 끝내 알려지지 않았다. 마치 그 누구도 그를 다시 해부하지 못하게 하려는 듯이.

1632년, 니콜라스 툴프(Nicolaes Tulp)는 베살리우스를 뛰어넘기를 원했다. 자신의 명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그는 해부 수업 장면을 그림으로 남겼고, 그 그림은 결국 그의 이름보다 더 유명해졌다. 26세의 렘브란트(Rembrandt)는 초록빛 피부, 당겨진 신경, 무거운 공기가 흐르는 장면을 포착하며, 붓을 칼처럼 휘두르는 화가로서 자신의 이름을 미술사에 새겼다.

이 계보는 샤르댕(Chardin), 리베라(Ribera), 쿠르베(Courbet), 고야(Goya), 수틴(Soutine)으로 이어진다. 수틴에게 벗겨진 동물의 살을 그리는 것은 어린 시절의 울음을 토해내는 행위였다. 상처마다 슬픔이 있다. 그 슬픔은 형식과 무형, 아름다움과 공포, 삶과 죽음이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부딪히며 만들어낸 견딜 수 없는 충돌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불협화음은 르네상스 시대의 해부학적 비너스(anatomical Venus)에서도 울린다. 해부학 교육을 위해 제작된 여성 마네킹들은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복부는 열려 있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은 자신의 저서 『비너스를 열며(Opening Venus)』에서 이러한 존재를 타나토스(죽음)와 에로스(욕망)의 불편한 결합으로 묘사한다. “움직이는 것, 즉 감동 받는 것 자체가 곧 상처를 입고, 열리는 것이 되는 이 마스크 뒤의 불편한 경첩.”

신체를 열면, 평소 피부가 갈라놓던 두 세계—날것과 익힌 것, 밝음과 어둠, 공적 영역과 친밀한 영역—이 거칠게 충돌하는 장면이 드러난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이러한 들쑥날쑥한 감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들은 끌어당기면서 동시에 밀어낸다. 안나 카스트로 드 바르보사의 날은 곡선과 유혹적으로 맞닿아 있고, 금속과 유리가 살갗에 아슬아슬하게 닿아 있다. 그 만남은 결코 완전히 이어지지 않지만, 긴장을 유지한다. 방황하는 유리 구슬은 부뉴엘(Buñuel)의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Un Chien Andalou)〉에서 면도날에 의해 베인 커다란 눈을 대체한다. 그 유리는 우리의 눈이자, 시선을 거둘 수 없는 눈이다.

뤼실 부아롱(Lucile Boiron)의 사진은 세상의 기원을 고요한 상처로 기록한다. 차분하면서도 비몽사몽한 임상성으로 표현된 상흔은 조용하지만 뚜렷하다. 카미유 아제마(Camille Azéma)의 세라믹 작품들은 열기에 들떠 있고 기이하게 식욕을 자극하며, 그 안의 상처는 주름 속에 감춰져 있다. 이 작품들은 만지면 움찔할 것 같은 불길한 직감을 불러일으킨다. 조한나(Hanna Jo)의 회화 역시 따뜻하게 떨리며, 우리를 동굴 같은 내부로 초대한다. 그곳에서 장기들은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계속해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온도치멕 다바도르지(Ondochimeg Davadoorj)와 토마 페로토(Thomas Perroteau)의 작업에서는 애니메이션이 곧 태동의 상태를 숨기고 있다. 각각의 형상은 다른 형상들을 그 내부에 품고 있으며, 언제든 새롭게 등장하고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해부는 이러한 복수성—삶을 지탱하는 영원한 변형의 상태—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HARUSPEX》에 참여한 작가들에게 경계는 명확하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칼을 댄 자리, 절개된 선 위에 존재한다. 우리에게 남겨진 일은 단 하나—아직 민감하게 살아 있는 그 표면을 살며시 간질이는 일이다. 그 표면이 아물기 전까지. 그리고 이해의 경계 너머, 예기치 않은 놀라움이 터져 나오는 그곳에 존재하는 자유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곳에서 욕망은 생살을 휘돌고, 열정은 푸른 혈관을 타고 흐르며, 믿음은 찢긴 심장에서 솟구친다. 갈라진 틈에서, 살아 있음이 넘쳐 흐르고, 삶은 다시 시작된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