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은
광활하고 거대한 지평을 떠올리게 한다. 가닿기에 너무 먼 것만 같다.
기원(origin)은 라틴어 originem에서
유래해 ‘출현, 개시, 시작, 근원’을 뜻한다. oriori라는
어근에서 파생되어 ‘일어나다, 솟아오르다, 일어서다, 보이게 되다, 태어나다, 생명을 얻다’와 같이 풀어볼 수 있다. 그렇다면 기원을 역사적 시간이나 태초의 근원으로 여기기보다 동사로서 감지해 보면 어떨까. 일어나고 솟아오르는 움직임으로 받아들여 보는 것이다.
2인전
《기원의 땅》에서 이천국, 조한나는 각자의 방법론으로 땅, 신체
내 세포, 벌레, 식물 등 유기체의 이미지를 연결한다. 전시는 생명체들이 일어나고 솟아오르며 생동하고 있는 세계, 그리고
인간의 시지각 체계에서 인지하기 어려운 그 너머 존재들의 다층적 움직임을 포착한다.
자연은
서로 그리고 우리와 매우 철저히 뒤섞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분리하여 그것들이 발휘하는 역능들의 명료하고 고유한 기원을 찾아내기를 바랄 수 없다.1) 모든 유기체는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모이고 움직이는 그물망이며, 그런
점에서 기술, 문화, 자연은 혼종된 생태계를 발생시키고 형성한다. 《기원의 땅》은 유기적 물질들의 연합과 사변의 세계로 안내한다. 동시에
두 작가의 작업은 미디어 환경과 기존의 질서를 가로지르며 오늘날의 시지각 체계를 갱신하고자 한다. 미시
세계 속 단위와 존재를 다루는 것은 두 작가 작업의 출발이지만 각자 매체를 추동하고 활용하는 내적 작용을 통해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이천국이
식물, 넝쿨, 거미줄, 모기와
같은 유기체를 도상화 하거나 3D 프로그래밍을 통해 부피가 있는 조각을 출력하는 것은 오늘의 조각 매체가
놓인 환경을 바라보게 한다. 작가는 디지털 기반의 문화와 시지각 체계에서 조각이 이미지의 위상을 가진다고
상정한다. 이러한 이미지 네트워크의 경제 안에서 유통되는 예술 작품은 다양한 포맷으로 변경되는 연쇄작용과
같다. 〈Under the Green〉, 〈Mosquito〉의 경우, 3D
비물질 데이터로 존재했다가 3D 입체로 출력되었기에 뼈대를 세우고 살을 덧붙이는 조각의
전통적인 제작 과정에서 벗어나 이미지 포맷 변환의 연쇄에 놓인다. 소셜미디어, 디지털 게임과 같은 가상현실의 유저/플레이어로서의 경험과 스케일
문제는 이 가상의 네트워크 안에서 물성을 가진 조각을 갱신하는 배경이 된다.
한편, 식물, 넝쿨, 거미줄, 촉수 달린 모기는 유기체와 기술적 인공물 사이를 메우는 존재들이다. 이
존재들은 가상/현실, 또는 기술/생물같이 서로 먼 곳을 이어주는 촉수 달린 형상들이다. 인터넷망이
거미집(web)에서 그 기술의 미래를 상상했듯이 이 형상들은 먼 세계를 연결하는 능력이 있다. 다른 세계에 걸쳐진 존재들의 도상은 부피, 무게, 크기로 돌아와 이미지 환경안에서의 조각이 되기로 한다. 이 오브제는
이미지 네트워크의 문턱을 넘어 도착한 봉헌물로 의식과 물질 사이를 잇는다.
조한나는
신체, 땅, 자연물을 현미경으로 본 듯 인공기관적인 시점의
공간을 그린다. 이 회화는 땅에 뿌리를 내리는 동시에 신체 세포의 분열이 일어나며, 여러 겹의 땅 내지는 근육 층위의 내부 공간이 결합하고, 잔뿌리
식물 또는 근육의 섬유 다발, 미생물과 진균류, 박테리아가
얽혀진다. 우연히 흘러내린 물감의 흔적이 신체 해부학의 이미지와 유사한 형태로 나아가고 그 과정에서
확대된 땅과 뿌리, 균류의 촉수와 같은 자연물의 이미지와 결합한다. 작가의
회화는 인간의 시각성을 벗어난 존재들이 일으키는 세계를 인공기기로 확대해 보여주며 생명력을 가진 존재들이 일어나고 발생하는 생동의 공간이 된다. 작가는 현미경, X선과 같은 기계의 해부학적 이미지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묻고자 하는데,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기계 이미지가 들춰내는 것은 사회 문화 안의 질서와
기준점에서 벗어난 오직 물질로 된 평평한 세계이다. 그러니까 그 회화에는 신체의 메타볼리즘과 유기체의
공생 발생이 포착되고, 민주적인 관계를 이루는 물질의 생동만이 활성화된다. 회화에서 발견되는 눈 달린 입자들처럼 의인화의 표현은 인간이 아닌 물질에 인격을 부여하며 물질들의 에너지와
생기를 한 번 더 강조한다. 이로써 우리가 다다르는 곳은 모든 것이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그 은밀한
진실이다.
《기원의
땅》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세계를 현미경의 시선으로 확대한다. 그 시선은 그동안 감지할 수
없던 세계를 깨어나게 한다.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 내부와
외부, 인간과 촉수 달린 것의 관계에서 구분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으며 서로 동맹을 이룬다는 것이
중요한 사실이다. 이제 땅의 근원은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 그
근원의 이야기는 땅의 존재가 행위를 하며 힘과 생기로 차오르는 그물망의 움직임들로 채워지고 변주될 것이기 때문이다.
1)
Latour, The Pasteurization of France , 205-6; 이언 보고스트, 『에일리언 현상학, 혹은 사물의 경험은 어떠한 것인가』, 김효진 역, 갈무리, 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