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를
비롯한 이른바 ‘벽에 걸려있는’ 작업에서 색이란 단연 먼저 눈에 띄는 요소 중 하나이다. 그런데 임창곤의
그림에는 색이 없다. 여기에서의 없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無)이 아닌 다른 색채가 존재하지 않는 단색이라는 의미가 되겠다. 그의
작업이 이처럼 단색인 것은 색이 중요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반대여서일까? 단도직입적으로 색이 중요한
요소인지 작가에게 물었을 때 그는 색에 대해서는 아직 더 고민해 보아야 한다고 에둘러 대답했지만, 그의
황색 그림을 보고서 나는 스페인 궁정화가 출신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가 말년에
그렸다는 〈검은 그림〉[1] 연작이 떠올랐기에 더 곱씹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젊은 작가에게서 왜 고야의 말년작이 떠올랐을까? 고야가 청력까지 잃고 암울한 시기에 그렸다는 ‘검은 그림’이지만, 그가
궁정화가로서 그렸던 왕가의 초상보다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 환상성 그리고 표현주의에 가까운 필치와
섬세함이 깃들었던 말년작에서 임창곤의 붓질이, 인간 실존에 대한 탐구가 스쳤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 글은 임창곤의 그림을 앞에 두고 머릿속을 스친 여러 질문과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시도로 이번
전시 《48! 움직이는 몸짓》 출품작을 중심으로 작업의 형상, 구조, 방법론을 두루 살펴보길 목적으로 한다.
도드라지는 동시에 정체를 감추고 있기도 한 근육의 굴곡,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러날 수밖에 없는 비틀린 손과 발을 눈으로 조합하다 보면 마침내 ‘몸’이다. 임창곤은 몸과 정체성을
화두로 작업을 풀어낸다. 작업 안에서 그의 몸은 그리고 썰어내는 몸(패널
위의 움직임)과 조립하는 몸(공간에서의 움직임)으로 나뉘고, 이 모든 몸들은 맞물려 작동하며 (작업으로서의) 몸은 형상을 드러낸다.
현재의 그는 작업에서 나무 패널을 주 지지체이자 재료로 활용한다. 작업의 바탕이자
몸인 패널은 솔직한 재료다. 작가가 가한 어떤 행위에 대한 반응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가 패널을 다루는 방식(그리고 자르고 깨는) 안에서 숨김은 당연하게도 불가능하다. 물리적 힘을 가한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넘어간다는 의미일 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과정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작가는 “재료와 대화하는 느낌”이라고 표현한 바 있는데, 그의 움직임에 예상처럼 쪼개지고 예상치 못하게 파이는 패널의 화답은 어긋나고 맞물리는 대화이자 재료를 ‘경험하는’
과정과 닮아 있다. 패널을 다루는 그의 몸을 통해 드러난 형상에 섬세한 붓 터치가 겹쳐지며 몸은 완성된다.
임창곤은 언젠가 “〈비어있는 남자〉(2018~2019) 연작에서는 신체가 패널이
걸린 흰 벽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면,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신작 〈움직이는 몸짓〉(2022)을 작업할 때는 패널 밖으로 몸이 튕겨져 나오는 것 같은 느낌”[2]이라는 언급을 한다. 이는 신작이
전작으로부터 갖는 가장 큰 차이점과 관계 맺는 발언으로,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작품의 작동 방식에 대한
여러 변화를 시도한다. 먼저 전시의 중심이 되는 〈움직이는 몸짓〉은 고정된 형태가 아닌, 언제든 변동가능한 상태를 함의한 작업으로, 약 3주간의 전시동안 작가는 매일 전시장에 나와 〈움직이는 몸짓〉의 배열을 바꾼다.[3] 그가 재료를 다루는 것에 대해 “경험한다”고 언급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보아도 무방하겠다. 아직 ‘작업과 나’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와
싸우듯” 고군분투하며 형상을 찾고 드러내고 섞는다. 그가 지금 이 순간 몸에 집중하는 이유다.[4] 전작들에
비해 커진 개별 조각들이 마침내 신체 스케일을 벗어나 벽을 가득 메움으로써 그의 (다중적 의미로서의) ‘몸’은 확장 가능성을 도모한다. 앞서 언급한 “공간으로 튕겨져
나오는 감각”이란 아마도 작가가 주무르던 작업 공간이 2차원 ‘판’이었던 예전과 달리 실재하는 (벽과 바닥, 천장이 있는) ‘공간’과
그곳에서의 ‘운동성’까지 작품의 요소로 확장됨에 따라 느낀 감각의 변화였을 것이다.
한편 패널을 잘라 형상을 떠내면서 발생한 여백 조각을 조합해 만들어온 〈결정체〉 연작들은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독립된
작품이 된다. 이번 전시 출품작인 〈결정체, glow〉, 〈결정체, landscape〉 등으로 명명된 (일시적) 〈결정체〉 작업들은 눈송이가 뭉쳐져 눈덩이가 되고, 눈덩이가 눈사람이라는 (일시적) 실존이
되듯, 언제든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는다. 조립식
조각이 수행가능한 역할들을 상상하며 이를 실존으로 연결시켜보기, 즉 “눈앞에 두고 경험해보기” 위한
임창곤의 시도가 되겠다.[5]
〈움직이는 몸〉과 〈결정체〉 연작이 몸의 생김, 즉 형태에 연계된 작업들이라면, “자르고 쪼아 형태를 드러내는” 과정 없이 오로지 붓질만을 통해 보다 회화에 근접한 태도로 그린 작업(〈물이 고이는 웅덩이〉(2022), 〈공기가 지나는 길〉(2022))은 이들이 보여주지 못했던 ‘속’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이는
일종의 번외편처럼 느껴지는 동시에 정확히 형상을 정의내릴 수 없기에 보는 이로 하여금 다시 한번 실존을 상상하게 만든다. 몸이라는 장소 내부를 순환하며 문득 정체를 드러내었다가 사라지는 (상상적) 풍경으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움직이는 몸짓〉은 날마다 섞이고 재조합하며 스스로가 〈결정체〉의 일부였음을 드러내기도 하고, 어느 날은 “공기가 지나가는 길”을 만들며 “물이 고이는 웅덩이”를 짓기도 한다. 결국 임창곤의 작업은 하나의 주머니[6]에서 나온 나와 너의 모습에 대한 같고 다름을 확인하는 페르소나다. 주체(작가의 움직임)와
객체(작업 속 이미지)는 서로 움직이고 조응하며 매체가 가진
한계를 돌파해나간다. 그가 탐구하는 실존, 몸, 움직임은 관계를 통해 매개된다. 좀 더 급진적으로 생각해보자면, 그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결국 사랑 아닐까? 그러므로 가장 급진적인
의제를 다루면서도 그것을 가장 전통적인 방식(이미지를 새긴다고도 표현할 수 있는, 회화와 조각 사이를 오가는 행위)을 통해 드러내는 그의 작업을 ‘온몸으로
사랑을 외치는 황색 그림’이라 불러 보도록 하자.
[1] 1819년에서 1823년 사이로 추정되는 프란시스코 고야가 말년에 그린 14점의
그림.
[2] 필자와의 이메일.
[3] 관람자는 전시장에 들를 때마다 다른 배열 즉, 재조합된 작품을 볼 수 있고 이전의 조합들은 웹에 아카이빙된다.
[4] 임창곤은 2019년
첫 개인전 《Bulging Scenery - 불거지는 풍경》이래 지속적으로 몸 그리고 정체성을 화두로
캔버스와 패널을 오가며, 그리기와 조각하기의 사이에서 작업을 지속해 오고 있다.
[5] 임창곤은 미팅에서 상상하기에 대한 어려움을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이 어려움이란 불가능성에서 기인한다기보다는 경험적, 실존적
성향의 그에게 상상하기는 증명하기 어려운 지점에 위치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중요한 동기가 되는 작가에게 상상이란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 즉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지 않은
것(더 나아가 경험하지 않은 것)을 떠올리는 시도와 이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창곤은 작가노트(“계속해서 조합되고
바뀔 수 있다는 미래의 시간들을 상상하는 것. 내가 보지 못한 것들을 상상해 보기.나의 몸속을 상상해 보기. 신체이며 풍경일 수 있는 공간을 상상하기”)를 통해 상상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하는 것은 아마 이번 개인전《48!
움직이는 몸짓》을 통해 상상이 경험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스스로 시도해 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6] 여기서의 주머니라는 은유에는 재료, 작업, 정체성 등 그 어떤 단어가 들어가도 무방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