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 속에서 헤어질 시간을 앞둔 남자가 여자에게 너의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말하면서 마주 선 채로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본다. 영원히 기억할 것을 말하며,
그는 그 순간의 모든 것이 사진과 함께 기억될 것을 믿고 있었다. 둘 사이의 사진 찍는 행위는
서로 눈을 바라보며 길 위에 잠깐 동안 멈춰 선 게 전부였다. 카메라 없이 눈의 초점을 맞춰 그녀를 멈춰
세운 그의 사진 찍는 행위는, 그 순간의 시간이 일제히 눈 앞에 나타나 있게 하려는 강력한 유예를 동반한다.
그가 말한 “이 모든 것”은 둘이 서
있던 골목길에서 들려오는 하프시코드 연주 소리와 6월의 이른 아침 저 먼 우주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햇살과
지구 깊숙한 곳에서부터 둘의 몸을 땅 위에 마주 세워놓은 거대한 중력 사이의 모든 것을 향한다. 말하자면, 그의 사진 찍는 행위는 현재의 순간을 관통하고 있는 일체의 힘을 둘 사이의 시선 앞에 임의의 자리를 만들어 멈춰
세운 것으로, 그의 바람대로 영원한 기억을 매개하는 (세계 내) 중심축의 전환인 셈이다. 남자는 자신의 몸을 카메라 삼아 이 세계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의 얼굴을 현재의 시간 축에 가져다 놓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새롭게) 엮을 “그녀의 사진”을 찍었을 테다.
수잔 손탁(Susan Sontag)은 그의
『사진론(On Photography)』(1973)에서 사진 찍는 행위에
대하여 “현실을 움직이지 않는 물체로”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했다. 그는 곧 “이미지라는 형태로 세계를 소유한다는 것은, 즉 현실성과는 거리가 먼 비현실을 다시 체험하는 것”이라 했는데, 이는 사진으로 묘사된 대상에 의해 나와 이 세계 사이의 (현실적인) 거리가 재편되는 일종의 마법을 경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소유할 수 없는 현실의
흔적을 사진으로 소유한다는 엄청난 모순은, 현존하는 (실제의) 대상과 복제된 (허구의) 이미지 사이에서
이 세계를 멈춰 세울 만큼의 강력한 힘에 대한 상상을 불러온다. 그러한 까닭에 사진을 찍겠다고 길 위에서 “그녀를” 멈춰 세운 남자의 모습은, 둘
사이에 존재하는 비현실적인 세계에 관한 이미지를 기대하게 한다. 비현실과 통하는
“사진적 현실”을 목격한 순간, 남자는 현실(의 부재)을/를 대신할 이미지(의 현존)를/을 (손탁의 말로 표현해 보자면) “달래고 통제”하고
싶었으리라.
아르누보 스타일의 벽지 앞에 비슷한 패턴으로 장식된 의자가 정면을 향해 나란히
겹쳐 있다. 이 고요한 사진에 조금 더 시선을 머물러 놓고 보면, 특유의
민트색 벽지 바탕에 초록색과 갈색 계열이 어우러진 색채 위로 꽃과 줄기와 이파리 등 식물의 곡선이 화려한 움직임을 드러낸다. 관건은 그 앞에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의자인데, 의자의 생김새와 등받이 표면에
나타난 장식적 패턴의 대칭성은 (사물과 이미지 사이에서) 이상할 만큼
어떤 것의 현존을 환기시킨다.
사진은 의자의 등받이 상단에 볼록하게 솟은 나무 장식 어딘가에 초점을 맞추고
그 아래는 과감하게 프레임 바깥으로 잘라버렸다. 그 절단된 형태 때문만은 아닌데,
벽 앞에서 정면을 향해 서서 “나”와 마주하는 이 형상은
누군가의 얼굴이나 가슴의 “자리”이거나 혹은 그의 무덤 앞에 세운 “묘비” 같아서 말 없는 유령의 형상을 떠올리게 한다. 무엇보다 저 절단된 의자의 이미지가 마치 거울처럼 그것을 각별하게 응시했던 누군가의 시선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떤 관계의 “흔적”을 여태 소유하고 있다는 확신을 준다.
이 사진의 제목은 〈Uncanny 26〉(2023)으로 정경자의 ‘Uncanny’ 시리즈 중 하나다. 그의 말대로 “이상하고 모호한 사물들로 가득 차 보이는 이 세상의 파편적인
이야기”로서, 사진 속 이미지는 자명하고 당연한 형상들로부터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비밀로 남아 있는 흔적을 마주하게 한다. ‘Uncanny(언캐니)’는 정신분석학 개념으로 대상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비롯된
일종의 불안을 말한다.
말하자면, 대상에 관한 숨겨져 있고 은폐되어
있으며 어둠 속에 비밀로 남아 있는 모호함으로 인해 한 사람이 겪게 되는 “불안한 낯설음”에 가깝다. 〈Uncanny 26〉에서는
벽지와 의자의 패턴이 교묘하게 일치하는 경계와 더불어 그 경계선을 자처한 의자의 나무 틀에 발생한 오래된 균열, 그리고
벽지와 벽지 사이에서 노골적으로 만들어진 패턴의 불일치, 이 모든 것들이 심리적인 긴장과 불안을 연쇄시키는
가운데 나와 너, 즉 사진 앞에 있는 나와 저 대상 앞에 섰던 작가 사이에 비밀스러운 보기의 방식을 서로가
상상해야하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일종의 불확실한 추적이 시작된다.
앞에서 언급했던 영화 속 남녀의 사진 이야기처럼, 거대한
이 세계의 일상을 지배하는 흐름을 일시에 멈춰 세우는 것과 맘 먹는 둘의 사진 찍는 행위는 그 순간, 그러니까
모든 것이 정지된 그 비정상적이고 불가능한 순간의 현존을 함께 기억하고자 하는 둘의 공모에 가깝다. 어쩌면
일체의 사진 찍는 행위에 잠재되어 있는 마법 같은 수수께끼는, 거대한 일상성의 리듬에 파열을 일으키려는 누군가의
은밀한 내막에서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언캐니는 그러한 파열의 순간에 발견되는 두렵고 낯선 실체에 대해, 그 이미지와 나의 신체가 대면하여 그 불확실함을 주고받는 말할 수 없음에 닿게 한다.
정경자의 ‘Uncanny’ 시리즈는 이미
현실에 자리잡고 있는 비현실적인 이미지, 말하자면 “사진적 현실”에 관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정지되어 있는 물체처럼 비현실적인 세계로의
길을 열어주는 하나의 이미지로서의 현존 같은 것 말이다. 현실의 아주 오래된/낡은
패턴 너머로 기이한 긴장감과 모호한 시차를 제시하는 〈Uncanny 26〉의 낯선 감각은 〈Uncanny 02〉(2023)나 〈Uncanny
11〉(2023) 같은 풍경 속 찰나의 이미지에서 비현실적인 것과의 대면을 또 다시 가늠하게
한다.
유령 같은 현존, “볼 수 없음”과 “소유할 수 없음”으로 말할 수 있는 저 불확실한 이미지의 현존을 사진이 기억해내는
것이다. 에티엔-쥘 마레(Étienne-Jules
Marey)가 연속적인 움직임을 사진에 담아냈던 크로노포토그래피(chronophotography)의
환상적인 경험이 지지난 세기의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진 한 장 속에 자리잡은 불확실한 이미지의
현존은 거대한 힘의 움직임을 멈춰 세울 만큼의 비현실적인 순간에 대해 그 어떤 주저함도 없어 보인다.
〈Uncanny 07〉(2023)과 〈Uncanny 09〉(2023)는
하나의 이미지를 공유하고 있다. 기이한 닮음과 다름 사이에서, 저 찰나의
우연적인 순간이 어떤 전후의 서사를 지어낼 수 있을 만큼 둘은 닮아 있으면서 동시에 다르다. 〈Uncanny 09〉에서 허공에 박제된 새의 양 날개는 그 시선이 향하는 발 아래의 바위(산) 만큼이나 무겁고 단단해 보인다.
현실에 박제된 일련의 상황은 삶을 복제한 이미지로서
비현실적인 감각을 실체화 하는데, 그것을 (굳이) 사진으로 고정시켜 놓으려는 듯 정지된 것을 다시 한 번 멈춰 세움으로써 현실에서의 “사진적
현실”을 포착해낸 것만 같다. 그렇다면, 〈Uncanny 07〉은 찰나와 같이 순간의 시간이라는 게 전혀 헤아려지지 않는 어떤 영원성을 암시하는 것 같은데, 마치 날개를 활짝 편 채로 영원히 정지된 것처럼 삶과 죽음의 형태가 공존하고 있는 대상을 상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이러한 서사는 이미지의 현존으로서 이 사진들과 마주한 이들의 몫일
테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이미지들 속에 작동하던 기표의 끊임없는 연쇄처럼, 정경자의 ‘Uncanny’ 연작에서 보이는 양가적인 이미지들의 지속적인 겹침과 교차는 이미지와 이미지들 사이의 우연한 알리바이를
제공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러한 사진적 순간들을 가속화 시키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동일한 제목에 일련번호만 붙은 ‘Uncanny’ 연작들 간에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수없이 넘나들며 시작도 끝도 없는 이미지의 세계를 눈 앞에 구축해내려는 충동이 엿보인다.
박제된 가짜 새의 이미지를 사진적 현실의 예시로 말할 때, 〈Uncanny 41〉(2023)에서는
〈Uncanny 42〉(2023)의 검은 새들의 날개와 허공을 가로지르는
전깃줄이 만들어낸 절대적인 평형의 순간과 대구를 이룰만한 비현실적인 조화에 순응할 태세를 갖게 된다. 저
형태 너머의 장면과 서사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미지의 불확실성을 감수하고서도 어떤 절대적인
상태이면서 그 순간의 멈춤이라는 엄청난 힘의 파장에 거리낌 없이 동조하는 것이다. 이처럼 애초에 사진이 포착하는
이미지의 파열을 넘어, 정경자는 이미 현실 속에 파열된 이미지로 현존하는 실체를 다시 한 번 멈춰 세우는
것으로 언캐니의 이중적 효과를 (재)강화하기도 한다.
적어도 〈Uncanny 32〉(2023)와 〈Uncanny 23〉(2023)은
이 전시의 제목인 《다른 면 Another Face》의 수수께끼에 관한 지표로 볼 수 있다. 두 세계의 경계 혹은 두 세계의 파열을 동시에 제시하는 이 이미지들은, 사실
하나가 다른 하나의 면을 숨기는 은폐의 행위로 수렴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진짜 보려는 것인지
혹은 무엇을 진짜 봐야 하는 것인지 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계속되는 “볼
수 없음”과 대면하는 강박에 사로잡히게 된다. 정경자의 사진은 그러한
사진적 순간, 즉 이미지의 세계와 대면한 신체의 감각을 무효화 함으로써 유효성을 갖는 아이러니를 이끌어낸다.
〈Uncanny 06〉(2023)과 〈Uncanny 24〉(2023)에
대하여 이미지의 실체를 보는 것과 묘사된 대상을 아는 것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불일치는, 과연 어떤 것이
이 세계 안에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 대신에 불확실한 이미지의 현존을 경험할 수 있는 신체적 감각의 출현을 기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사진이 사진 안에서 구축해 왔던 비현실적 세계의 표상을 다시 한번 전복시켜 “사진적
현실”과 마주한 채 이미지의 세계가 지닌 다른 면-그것이 이미지의 허구에
반하는 진짜 현실은 아닐 테지만-에 가서 닿고자 하는 사진가의 충동을 엿보게 한다.
모든 것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너의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말한 한 남자의 다짐은 이미 현실의 실패를 담고 있다. 결국 사진은 현실의 부재를 대신할 이미지의 세계를 불러오는 것으로, 정경자의
사진처럼 이미 현실 속에 자리잡고 있는 비현실의 세계를 포착하는 것과 대구를 이룬다. 그는 현실의 부재에서
비롯된 언캐니의 이미지를 재구성하기 보다는 불확실한 이미지로서 현실에 은폐된 모호한 형태들에 (무효한) 사진의 프레임을 덧씌운다. 이러한 이중의 역설은 사진 속 사진적 현실에 관한
현존에 다가갈 수 있는 수수께끼 같은 감각에 우리의 관심을 돌려 놓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