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낀 새벽처럼 희뿌연 대기 사이로 단단한 구조를 드러낸 강철 울타리. 오랫동안 무언가가 밟고 지나며 남긴
흔적. 그것의 육중한 무게 때문인지, 한겨울의 추위 때문인지, 단단하게 다져진 채 굳어진 대지의 표면은 울타리의 안과 밖을 잇는 희미한 길목이 되었다. 길이 인도하는 방향을 따라 서서히 시선을 움직이면 알 수 없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 법한 암흑의 세계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그 내부로부터 다시 눈부신 빛이 비추는 문턱을 향해 고개를 돌리면, 이내 불투명한 회색 공기로 둘러싸인 밀실로 인도하는 또 다른 울타리가 기다리는 풍경. 임노식은 자연에서 목도한 인위적인 상황과 흔적에 관한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경계의 형태와 그것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갈등과 인식, 가치판단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에게 자연은 그림의 소재이기 전에, 그가 유년시절을 보낸 삶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의 유년시절 평범한 일상은 오랫동안 목축업을 일궈 오신 아버지의 곁에 머물면서, 목장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을 직접 체험했던 시간과 궤를 같이한다. 가정이라는
최소한의 사회단위를 경험한 작가에게 목장은 그 다음으로 자연 속에서 접한 사회의 작은 축소판과 다름없는 대상으로서, 가치판단을 하는 나이로 접어든 그에게 자연스럽게 세계에 대한 관찰자적 시선을 심어준 터전이다. 평범한 일상이 관찰과 의문의 대상이 되는 길목에서 그가 경험한 사회는, 목장처럼
울타리로 구획되어 안과 밖의 경계가 있으나 좋고 나쁨, 안전과 위험,
자유와 결박, 일탈과 구속과 같은 양가적 가치로만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모호함이 존재하는
곳이며, 인간의 언어로 말할 수 없는 소처럼 진실을 알고 있으나 침묵할 수밖에 없는 현실 공간이다.
울타리를
경계로 나눠지는 두 개의 세계에는 자연과 인간이 각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가치판단의 문제가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 두 대상은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여지고 적응하는 과정 안에서 또 다시 옳고 그름을 정할 수 없는 판단의 문제에
계속해서 도전을 받는다. 가로 길이가 약 9미터에 달하는
〈안에서 본 풍경1〉은 이번 전시의 대표작이자, 그가 현실을
투영한 하나의 작은 사회로서 목장을 바라보게 된 중요한 계기를 고백하듯 담아낸 대작이다. 그는 몇 년
전 가축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일정량의 전류가 흐르고 있는 구조물 밖으로 목장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젖소 한 마리가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으나, 엄동설한 속에 얼어붙은 세상과 마주한 끝에 결국 다시 스스로 목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목장은 강제적인 임신과 착유가 진행되는 폭력적인 공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생명의 탄생과 생존을
위한 출산, 사육, 치유와 보호가 이뤄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목장의 역할과 기능 안에서 정해진 틀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소들의 삶은 외부에 의해 통제된 사회로부터 일탈을
꿈꾸지만 결코 사회를 떠나서 살 수 없는 인간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가 그려낸
〈안에서 바라 본 풍경〉이란, 단순히 울타리라는 물리적 공간 구획이 만들어낸 안과 밖의 풍경의 모습을
그린 것을 넘어, 눈앞에 닥친 현실과 그에 반하는 이상이 끊임없이 부딪치고 뒤엎어지기를 반복하면서 갈등하는
내면의 심리와 이를 통해 바라본 세계에 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