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격과
프레임
윤향로의 규격에 대한 관심은 책의 레이아웃에서부터 종이 용지의 비율과 크기를 바탕으로 반복과 전용, 점진적인 확장 등 틀형식을 기본적으로 활용하는데서 엿볼 수 있다. 일곱
점의 〈ASPKG〉(2018)와 석 점의 〈Tagging-C3, C2, C1〉(2022)은 기본 단위 아래 오브제로서
단일한 의미를 갖게 됨으로써, 각각의 입체로 구현한 방식이 사물화되는 구심점 역할을 하는 어떤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평면을 탈피한 몇몇의 작업들은 오브제로서 우선시되는 안정적인 감각보다, 작가가 고집하는 데이터 편집과 표면의 두께를 더욱 공허하게 하기 위한 상반된 전략을 내세운다. 작가가 끝없이 표면 위에 배설해내는 입자들은 인쇄, 분사, 덧칠하기, 뿌리기, 나아가, 실시간 데이터 수집-송출이라는 다양한 포맷으로 변신 중이다. 특히, 최근에 연 개인전 《태깅(Tagging)》(실린더/Hall 1, 2022)은
공간의 건축적인 형태와 크기, 그리고 구조를 또 다른 표면이라 가정하고 앞과 뒤, 안과 밖, 측면에서 생성된 의미들을 뒤섞인 표면의 이미지로 인식하는
효과로 귀결되었다. 특히, 거대한 스케일의 최근 작업은 유독
신체적 경험이 필수적으로 뒷받침되어 이미지를 보고 감각하는 것을 구체화하는 데 다다른다. 윤향로는 공간을
캔버스라 상정하고 일련의 ‘파티클’ 이미지를 투사한다. 공공 공간에 의미가 부여될 때, 거리두기를 해왔던 건조한 감각들이 조금은 느슨하게 즉흥성이 담보된 순간들을 주고받는 시도로 전환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화면의
크기가 일정한 비율에 따라 점진적으로 커지는, 규격을 나열하는 방식은
2014년 인사미술공간에서 연 《Blasted (Land) Scape》의 시초가 된 〈GE91-3〉
(2014)에서부터 시작되어 2018년 광주비엔날레에서는 바닥에 나열한 회화 조각에서도
등장했다. 국내 특유의 캔버스 ‘호’ 단위와 종이 판형 기준에 대한 의구심은 평면에 부피를 만들어내면서
발생하는 깊이와 이미지를 감각하는 상대성에 대한 이야기로 우리를 이끈다. 데이터 이미지를 어떤 방식으로든
자유롭게 크롭하여 스크린샷하는 과정이 갖고 있는 규격에 대한 자율성을 생각해본다면, 데이터 이미지가
조형의 여러 요소로 변주되는 과정에서 구조적으로 가장 납작한 표면에 두께감을 줬을 때 추상성이 부각되는 역설적인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윤향로가 이미지를 인식하는 방향과 이 시대의 여러 장비가 이미지를 송출하고 디스플레이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은, 오늘날 이미지에 따라올 수밖에 없는 규격에 대한 사유로 귀결된다. 이 시대에 만들 수 있는 회화의 제작 방법에 동일한 맥락이 반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일 것이다. 한편으로, 모두가 유사한 틀 위에 비슷한 장치로 이미지를 경험하고
제작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대량생산된 표준 크기가 이미지 혹은 동시대 회화에 영향을 주어 연동될 밖에 없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이처럼, 윤향로는 표면과 입자, 그리고 규격이라는
기본 단위들의 역할을 중심으로 동시대 회화를 탐구해왔다. 데이터 이미지들을 수집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데 비해 수고로운 과정이 여러 층위에 걸쳐 진행되고 그 안에서 작가만의 분류 체계가 결정되었다.
이 소스들은 캔버스와 물감이라는 기본 재료에 충실하되, 작가는 편집 툴에서 어느 정도 구획되고
계산된 표면을 구현하기 위해 그에 적합한 그리기의 방식을 택했다. 여기서 그린다는 표현이 적합하지 않다면
인쇄하고, 분사하고, 붓질하고, 짜내는 회화의 제스처라 언급해도 되겠다. 2012년을 시작으로 10년이 된 지금, 그의 작업세계에서 근래 가장 크게 변화한 소재는
캔버스 위 소립자들일 것이다. 물질을 구성하는 미세한 알갱이인 입자가 담고 있는 속성을 염두에 두자면, 크기가 없고 질량과 위치, 그리고 속도와 같은 역학 운동의 성질만
갖고 있는 기본 단위로 공간상 한 점에 위치하는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이때, 규격에 대한 의구심이 스케일에 대한 연작으로 이어지고, 명확한 윤곽의
형태에서 입자들이 종합적으로 뒤섞인 근래의 방식은 작가가 그동안 기피해왔던, 회화에서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우연과 오류들에 관대해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렇듯, 흩어지고
모아진 데이터 이미지를 회화 위에 매핑하는 작가의 태도는 이미지 포맷의 변화를 의식적으로 구현하는 과정이다. 나아가, 윤향로는 오브제에 기반한 미학으로부터 벗어나 이미지 군집에서 새로운 표면과 형태가 나타나는 것을 전제하는 데이터
기반 회화를 극단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전환을 시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