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 1: ‘납작’의 모양
권아람은 이번 개인전의 제목을 《납작한 세계》라고 했다. 처음 제목을 접했을
때 근래 미술계에서 회자되었던 ‘플랫’, ‘스킨’ 등의 단어를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단어에 대한 무지함과 반복적인
사용에서 오는 피로가 동반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TV 모니터를
중심으로 영상 작업을 선보였던 작가가 왜 이제야 세계를 ‘납작하다’고
명명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갑자기 ‘납작’에 대한 복잡한 소회와 의심으로
글을 시작한 것은 SNS 시대를 살아가는 미술인들에게 납작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지만 모호한 존재이기 때문이다.1) ‘느낌적인 느낌’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감지할 수는 있지만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때문에 전시장에 발을 디디기 전부터 《납작한 세계》에 대한
의심은 시작되었다.
전시장에는 모니터의 한 축을 기준으로 붙어 서로 마주보는 검정색 모니터들이 있다. 그런데 ‘마주 본다’는 상태를 인지하게 되는 것은, 단순히 모니터가 설치된 모양 때문이라기보다 모니터 화면에 삼각형 혹은 타원형으로 잘려 붙어 있는 거울의 존재에
있다. 이 거울은 반대편에 있는 모니터 그리고 모니터에서 재생되는 이미지는 물론 전시 공간까지 무한히
담아낸다. 검정색 모니터는 사물의 표면, 빨강, 파랑색의 화면을 번갈아 내보내고, 오작동을 알리는 듯한 소음이 전시장에
규칙적으로 울린다.
마주보고 있는 모니터와 거울은 서로를 비춰낸다. 아니, 밀어낸다. 결국 전시장에는 2차원과 3차원의, 납작한 이미지와 납작하지 않은 공간이 반복된다. 여기서 다시 질문을
정리해보자. 작가에게 있어 납작의 의미와 모양은 무엇일까? 납작한
세계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의심 2: 표면의 맨얼굴
권아람은 그동안 영상 매체를 통해 ‘언어’를
다루어 왔다. 타국에서 지내면서 언어의 차이로 인해 소통이 불가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언어의 재〉(2013), 〈미완의 언어〉(2014) 등 언어의 충돌을 통한 세계와의
관계 맺기의 실패는 번역의 문제로까지 이어졌다. 〈말 없는 말〉(2015)은
괴테의 「파우스트」 독어 원문을 번역기를 통해 영어와 한글 버전으로 재생한다. 당연히 의미가 성립되지
않는 문장들이지만, 도리어 그 모호함으로 인해 상징성을 획득하면서 아방가르드 시를 연상시키기까지 한다. 즉 번역기가 만들어낸 언어는 원본이 가진 의미 전달에는 실패한 결과물이지만,
원작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언어로 발화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두 개의 모니터로 엇갈리며
재생되는 시지프스의 돌 이미지와 번역된 언어의 낭송은 제3의 언어로서 「파우스트」라는 거대한 세계를
삭제시킨다.
이렇듯 언어에 대한 의심은 권아람의 작품에서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데리다(Jaques Derrida) 식으로 말한다면 언어에 대한 의심은 곧 ‘세계’에 대한 의심일 것이다.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은 언어를 통해 이뤄지기에
이는 권력과도 연결된다.2) 사회를 구성하는 담론과 그 구조는 언어를 통해
형성되며 그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위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간 작가가 사회가 명명한
완전한 소통의 도구인 언어라는 대상을 의심하고 그 불완전함을 들춰냈다면, (〈언어의 재 II The ashes of words II〉(2013), 〈미완의
언어 Words in fragments〉(2014)), 〈표면들 Surfaces〉(2016), 〈덩어리들 Spheres〉(2016)등 최근 작업에서는 모니터 너머의 ‘정보’를 의심하고, 그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우리의 사고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상징적인 형태의 이미지를 통해 실험한다.
이는 인간의 발명품인 미디어와 인간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유기적 관계에 대해 자문한다는 작가의 말과 연결된다. 사실 미디어의 전달 방식에 대한 의심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리차드
세라(Richard Serra)는 1973년 〈텔레비전은
사람을 전달한다 Television Delivers People〉라는 비디오 작품을 발표했다. 세라에게 있어 텔레비전은 수용자를 전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의식을 자극함으로써 커뮤니티와 고객층 같은
시장 주도의 동일시를 촉진해 특정 수용자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매체다. 미디어를 통해 공유되는 커뮤니티와
광고를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이 작품과 연결시켜 데이빗 조슬릿(David
Joselit)은 비디오의 매체는 커뮤니티라고 말한 바 있다.3)
권아람의 작품은 이러한 작품들과 분명 연결점을 가지지만, 미디어의 영향력을 경계하는 날선
태도를 직접 드러내지는 않는다. 대신 모니터에 피부를 부여하듯4) 은유적인 이미지들을 반복적으로 재생하여 미디어와
수용자의 관계를 고찰한다. 〈Flat Matters〉
시리즈의 경우 마치 돌 혹은 광물의 표면처럼 보이는 이미지들이 반복 재생된다. 관람자는 자연스레 모니터에
띄워진 이미지를 통해 사물의 촉각을 상상하고 경험한다. 게다가 화면의 미니멀한 구획과 색의 조합은 심지어
모니터를 아름답게 느껴지도록 만든다. 환영이 인식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화면이 빨강, 파랑, 검정색으로 전환되면서
이미지가 초래한 감각의 활동은 보류되고, 모니터에 부착된 거울은 2차원을 3차원의 공간으로 끌어들여 환영을 더욱 강조한다. 실제의 공간과 모니터가
비춘 공간이 혼재하는 것이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관객은 미디어가 노출시키는 각종 형태의 이미지에
빠져든다. 〈Flat Matters〉는 그렇게 자신의 표면을
끊임없이 갈아 끼운다.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화면에 매혹되는 것은 그저 일반적이며 일상적인 일일 것이다. 작가는
이를 교란할 몇 개의 장치를 은밀히 추가한다. 〈Flat
Matters〉에서 재생되는 파란색 화면은 블루 스크린(blue screen of death)을
은유한 것인데, PC에 문제가 생겼을 때 발생하는 이 현상은 곧 오류의 발생을 의미한다. 또한 이미지들은 광물의 표면과 디지털 모델링에 사용되는 텍스쳐 그리고 작가가 만들어낸 버전이 섞여 있어 쉬이 ‘돌의 이미지’라고 정의 내릴 수 없으며, 이미지의 유사성 때문에 차이를 구별하기도 쉽지 않다. 만약 수용자에게
사전 정보가 없다면, 표면의 맨얼굴을 의심하지 못한 채 그 이미지는 그저 ‘돌’로 정의될 것이다. 그런데
〈Flat Matters〉안에서 이 오작동의 상징들은 잘 세팅된 환경 안에서 그저 무리 없이 돌아가는
듯 보인다. 이제 질문은 하나 더 추가된다. 수많은 정보가
공유되는 액정화면 앞에서, 불신은 작동 가능한 것인가?
의심 3: 압축과 단절의 세계
앞서 언급했듯이 작가는 사회가 구축하고자 하는 시스템의 틈을 발견하고, 그 유약함을 드러내고자
한다. 디지털 미디어로 전달되는 정보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자의 관계가 실재와 가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사고를 조종한다는 점은 작가가 포착한 균열의 한 단면일지도 모른다. 각종 크기의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디지털 미디어들은 삶을 이어가기 위한 필수 요소 중 하나이며, 그것의 부재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마치 언어가 통하지 않아 고립되는 것처럼, 미디어의 부재는 이와
동일한 상황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언어가 진실은 아니듯 미디어 역시 세계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완벽한
매체가 아니다. 수용자는 미디어가 제공하는 정보를 선별하여 받아들이거나 의심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압축된 정보들, 그래서 점점 단편적으로 귀결되는 사고들이 세계를
작동시킨다.
권아람의 표면에 대한 의심은, 결국 수용자 즉 화면을 바라보는 관람자에 대한 의심이다. 작가는 모니터에 ‘피부’를
재생하여 실제와 가상의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관람자의 위치를 상기시킨다. 압축된 정보는 납작하게 변환되어
수용자 앞에 놓여지고, 사고의 유연함은 단절된다(혹은 확장된다). 결국 권아람에게 납작한 세계는, 평면으로 전송되는 가상의 이미지와
그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용자가 살아가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모니터가 내뱉는 이미지와 색, 거울에 비친 화면이 섞여 도출된 감각적인 화면을 지각했을
때, 이미 나 역시 납작한 세계에 포획된 수용자가 아니었는지 의심해본다. 돌아보니 전시장의 모니터들은 모두 관람자를 둘러싸고 ㄱ(기역)자로 마주보고 있다. 실재도 가상도 아닌 풍경 사이에서 우리는 표류하며
정보를 받아들이기만 하고 소화할 줄은 모르는 존재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름답고 절제된 직사각형의
숲 안에서 나의 존재를 지각하는 경험은, 꽤 오싹한 것이었다. 그런데
모니터 너머에 존재하는 균열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다가갔을 때, 우리가 마주하게 될 풍경은 어떠할까.
1) 김뺘뺘의 「무엇이 (도대체) 무엇이 플랫할까 (1) 밑그림 그리기: 서울-플랫을 더듬어보며」는 근래
‘납작’이라는 단어가 미술계에서 통용되는 현상에 대해 고찰한다. http://yellowpenclub.com/kbb/flatness1/
2) 《납작한 세계》 전시 노트 참고
3) 데이빗 조슬릿, 『피드백 노이즈 바이러스』, 이홍관
외 1인 역, 현실문화,
2016, p.15
4) 작가와의 대화 중에서 차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