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소개하는 일종의 작업도식을 살펴보자. 일관된 기획의도에 따라 개별 작업의 당위가 마련되고, 작업 간의 상호 연관성이 긴밀하게 확보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시계열적 성취라기보다, 작업에서 작업으로 자연스럽게 연동되어 나타난 결과지에 가깝다. 도식에 따르면, 김현석의 작업을 촉발시키는 네 가지 요소는 물질과 환영, 보간과
열화이다. 서로 대비되는 두 쌍의 개념이다. 여기에서 출발한
조합에 따라 다시 여섯 가지 구도가 파생되고, 작업의 좌표는 그 중 어디든 걸쳐지게 된다.
가령, 디지털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열화시켜 이미지의 허상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환영’과 ‘열화’에 대한 일련의 실험이
있었고 (2015~2016), 가상 공간의 이미지를 물질계로 소환하여 환영의 표면과 물리적 지지체를
탐구하는 작업으로 ‘환영’과 ‘물질’의 관계를 다루는 작업이 전개되었다(2017~2020). 그리고 2021년부터 최근까지 기술의 계보와 당대성을 환기하는 작업에 집중하면서 ‘보간’에 관한 작업을 하고 있다. 일련의 작업을 하나의 틀에 넣고 설명하기에는 다소 도식적인 부분도 있을 테고,
틀에 맞지 않는 작업의 발화 가능성을 놓칠 우려가 있지만 김현석의 작업이 상당히 구조적인 틀거리 안에서 기획되고 실행되어 온 흐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에 남는 질문은 오늘날 시각문화 안에서 실재와 재현의 관계를 어떻게 재정의하고
효과적으로 독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미술 작품의 생산과 저장, 전달과 폐기 과정에서 디지털 매체의 개입으로 인해 일어나는 이미지의 증강과 감소의 문제는 인터넷과 액정으로
이미지를 흡수하는 시대의 미술적 문맥에서 매체의 생산과 수용 방식을 새롭게 사유해야 할 당면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김현석의
초기 작업 중에서 JPEG 파일이 실물 프린트로 육화되거나 반대로 실존하는 조각과 회화의 물성이 디지털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어떤 부분이 빠져나가거나 (열화) 부풀어오르는 (보간)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가령, 초기작 중 하나인〈완벽함에 대한 무의미적 행위(달)〉(2015)은 두 세계가 완벽하게 대칭적일 수 없으며, 원만한 절충지점에 도달할 수 없음을 직시하게 한다. 과거 작업에
대한 화답으로 이루어진 〈완벽의 기원〉(2023 )은 인공지능을 통해 이미지를 복원함으로써 디지털 이미지와
실제 물성 사이를 오가는 유동적 지점들을 지시한다. NASA에서 촬영한 달의 위성이 붕괴되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은 1픽셀만큼 키웠다 줄이는 과정을 무수히 반복함으로써 이미지의 표면이 일그러지고 함몰되는
지점을, 이미지의 환영성이 붕괴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초기작부터
근작에 이르는 작업 전반을 순차적으로 톺아보자면 김현석이 짜놓은 실행 구조 안에 각각의 파편들이 포함되는데, 결국
작업의 종횡을 움직이는 힘은 하나의 작업에서 다음 작업으로 이어져야만 하는 당위의 수립과 단계마다 검증해야 할 자기이론화에 있다. 여러모로 합당한 제작 논리를 가진 작업을 만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물론
전시가 논리를 입증하기 위함이 아니기에, 작업을 펼쳐놓는 과정에서 조형예술의 특징적 미감을 부러 흔적처럼
남긴다거나, 전시 제작의 디자인적 완성도를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 또한 작가의 의도에 조응한 결과이기는
하다. 회화와 조각, 텍스트와 프린트, 미디어 장비를 이용한 관람 인터페이스의 설계, 전시 환경의 조성이
반복될 리 없는 이유는 작품 제작의 형식이 곧 내용이자, 기기 메커니즘이 관람 서비스와 직접 연동되기
때문이다. 일례로, 김현석의 작업〈메모리즈〉는 2021년과 2023년 각기 다른 버전으로 설치되었는데, 분명한 의도 차이에서 비롯된다. 인공지능 언어모델 GPT-3와 공동 집필한 단편 소설 여덟 편을 처음 발표했던 2021년의
설치는 1.44MB 분량의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는 플로피 디스크를 통해 관람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고, 2023년의 전시에서는 이를
다시 e-book에 담아 리클라이너에 거치하였다. 관람자는
길게 누워 거치대에 의존하여 스크린으로 독서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데, 양쪽의 설치 방식 모두 얼마간은
퇴행적인 시각문화 인터페이스를 경험하도록 한다. 관람객이 어떤 신체적 자세로, 혹은 어떤 기기를 접면으로 하여 정보를 수용하는가의 문제는 전시 설계에서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다.
김현석은
이어서 2022년에 발표한 〈환영의 변증법〉에서 인공지능 생성 프로그램을 통한 본격적인 서사 실험에
돌입했다. 인공지능의 언어 학습을 통한 이미지와 언어, 사운드
생성 프로그램은 비슷한 시기 많은 작가가 주목한 새로운 창작 도구이자, 오직 인간의 영역으로 간주되는
즉흥, 우연, 직관을 통한 예술적 표현과 서사 방식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김현석에게도 작업에 인공지능을 도입한 것은 중요한 전기를 열어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공지능 기반의 생성형 프로그램과 다양한 이미지 증강장치를 필두로 빠른 속도로 상용화되고 있는
디지털 프로그램과 이를 활용한 작업에 피로감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고 있는 것은 작업의 목적과 결과 사이에 무엇인가 쏙 빠져있기 때문이다. 별다른 효용 없이, 기계와 인간의 대극을 강화시킨다거나, 전에 없는 방식의 협업을 고취하고자 하는 작업으로부터 신선한 점을 기대하다 실망했던 경험이 더러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기술과 인간을 둘러싼 해묵은 이슈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탓일 테고, 결과가 도출되는 양식이 얼마간은 익숙한 언어적 문법과 시각적 관성을 따르고 있어서일 수도 있다. HCI(Human-Computer Interation )와 같은 학문 분과나 상용화를 기다리는 서비스 영역에서
진전된 논의나 효과를 참조한다면 더욱 그렇게 느껴질 수 있다. 다만,
기술 발전에 매우 탄력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김현석의 작업이 전달하고자 하는 형식적 함의와 담론적 구성에 대해서는 오래 지켜볼 필요가
있다.〈환영의 변증법〉에서 두 인공지능이 나눈 문답 내용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그 내용을 감상하는 관람객의 불편한 움직임 또한 기묘한 불쾌감과 소외를 낳는다. 기계와 기계가 서로 등진 채 나눈 미래의 시지각성에 관한 선문답과도 같은 철학적 대담은 더이상 기계가 인간
내면의 반영이거나 하부 장치가 아닌 독립적 지성을 갖춘 개체로 느껴지도록 한다.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작품에서 겉돌고 있는 것은 오직 인간일 뿐이다.
연이어
발표된 〈데이지 체인 아고라(Daisy – Chain -Agora)〉(2023) 역시 가상으로 세운 복수의 이론가들과 그들 간의 대화를 연결 짓는다는 점에서 전작들과 유사성이 크다. 이 단계에서 돌출되는 것은 능수능란한 인공지능의 활용에 관한 것보다는 대화의 정교함과 풍부함에 있다. 직렬로 연결된 데이터 처리의 시각적 형태를 지칭하는 ‘데이지 체인’을 본떠 만든 공간, 아고라 광장은 이즈음 김현석이 가장 깊이 몰두해 있는 관심사를 효과적으로 가시화한 ‘콘퍼런스’이자 지식생산의
현장이다. 이 작업은 1947년 뉴욕에서 사이버네틱스를 주제로
개최되었던 역사적 회의인 ‘메이시 콘퍼런스(Macy Conference )’를 교본으로 삼고 있는데, 당시 회의에서 학제를 넘나드는 방대한 대화를 통해 다양한 학문 간의 협력과 지식생산을 촉진하는 획기적 사례로
남아있다. 둥글게 순환하는 아고라를 통해 고고학과 철학, 생태학, 디자인학, 컴퓨터 과학 등 다양한 지식생산을 대변하는 가상의 석학들이
인류 최초의 도구에서 현대적 사물로 이어지는 가파른 진화 과정을 중심에 두고 열띤 대화를 이어간다. 부분적인 비약과 내용의 오류를 내포하고 있음에도 김현석이 설계한 가상의 집담회는 올도완 석기(뗀석기)로부터 최신 아이폰에 이르는 사물의 진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도약과 퇴행의 비선형적 발전 역사에 관한 자신의 사전 연구를 반영하여 설계된 것이다. GPT-3.5, 4.0을
혼용하여 적용한 이 단계에서의 작업은 그 전과 비교한다면 더욱 세밀하고 정제된 편이어서 불과 2년여
만에 놀라울 정도로 진보한 기계언어의 학습 능력을 실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