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러가 개입해온 일련의 작업들은 우리 시대 인공지능 자본주의가 데이터, 노동, 자원의 추출에 기반한 거대한 포획의 틀이라는 사실을 알레고리와 개념의 배치가 통합된 ‘지도’라는 시각적 형식을 통해 재현함으로써 전형적인 학술적 논의의
방식에서 벗어난다. AI가 이 행성적 추출주의의 거대한 포획 장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예술은 이를 어떻게 사유하며, 결국
우리에게 어떻게 보여주는가? 욜러에게는 지도가 미디어이며, 지도
그리기가 바로 담론적·예술적 실천인 셈이다. 그는 “주로 지도 그리기의 방식을 통해 사유”하는데, “지도는 비선형적인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탐구할
수 있는 인지적 영역”이라고 보았다. “각각의 지도는 자체적인
상징, 관계, 의미에 대한 고유한 언어를 가지고 있”기에 우리를 지도 속으로 끌어들여 “각자의 경로와 해석을 만들 수
있게”하는 하나의 예술 작품이기도 하다.12
AI가 인간의 고유한 창의적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믿게 된 시대에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성형 AI 기술을 도구와 협력자로 채택해 작품을 제작하는 데 새로움과 속도를 부여하는 데 전력투구하는 예술가들이 한쪽에
존재한다면, 다른 한쪽에는 그것 자체에 대해 의문을 품거나 질문을 제기하는 예술가들이 있다. 전자는 지금도 앞으로도 대다수가 되겠지만 후자만큼 급진적인 방식으로 예술의 경계를 돌파해나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돌이라는 자연적 대상과 AI 사이에서 발견되는
모종의 관계를 일련의 작업들로 보여주고 있는 언메이크랩(Unmakelab)은 후자의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유토피아적 추출〉(2020)과 같은 퍼포먼스
영상, 〈신선한 돌〉(2020)과 같은 실시간 영상에서부터 GPT-3와 모션 트래킹, 가상엔진 등을 사용한 영상인 〈시시포스의
변수〉(2021), 객체인식 AI를 사용한 〈카무플라주 케찹〉(2022)에 이르기까지 언메이크랩은 돌을 주요 소재로 하여 최근의 디지털 기술이 내포하고 있지만 비가시적인 추출주의적
본성에 대한 비판적 이해를 시도하고 있다. 돌, 암석, 대지, 지구, 자연은
어떻게 데이터와 AI의 영역에 포섭되고 추출되는지, 그러한
추출은 어떤 문제를 야기하는지, AI가 생성하는 과정이 어째서 결과적으로는 추출인지를 일련의 재현과정을
통해 보여준다.
다시 돌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와 글을 맺자면, 우리가 디지털, 데이터, AI의 시대에 경험하는 많은 것들은 어쩌면 이 돌과 흙, 지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도나 해러웨이가 땅속, 지하의(chthonic)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우리가 호모나 인간이 아니라 부식토(humus), 퇴비(compost)라고 하는 것, 그래서 인류세보다는 쑬루세(Chthulucene)로, 땅의 시대로 지칭해야 한다는 것13의 의미를 곱씹어본다면,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이에,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 사이에 놓인 경계란 지극히 허구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모든 것이 채굴의 대상이 되어가는 세계에서, 인류세라는 파국의
징후 앞에서, 예술은 무엇이 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직은 열려있다는 것이 커다란 위안이다.
1.
Matteo
Pasquinelli, “The Automaton of the Anthropocene: On Carbosilicon Machines and
Cyberfossil Capital,” South Atlantic Quarterly, Volume 116, Issue 2 (April
2017), 311-326. ↩
2.
케이트 크로퍼드, 『AI 지도책』, 노승영 옮김(서울: 소소의책, 2022). ↩
3.
Benjamin
H. Bratton, The Stack: On Software and Sovereignty (Cambridge, Massachusetts:
The MIT Press, 2016). ↩
4.
번역본에서는 ‘지구’라고 번역했지만, ‘땅(대지)’이기도 하고 ‘흙’이기도
하다. ↩
5.
Kate
Crawford and Vladan Joler, “Anatomy of an AI System: The Amazon Echo as an
anatomical map of human labor, data and planetary resources,” AI Now Institute
and Share Lab, September 7, 2018, https://anatomyof.ai. 제13회 광주비엔날레(2021) 웹사이트의 한국어 번역본을 참고. https://13thgwangjubiennale.org/ko/crawford-joler/. ↩
6.
Sandro
Mezzadra and Brett Neilson, “On the Multiple Frontiers of Extraction:
Excavating Contemporary Capitalism,” Cultural Studies 31, no. 2–3 (March 2017),
185-204. ↩
7.
Kate
Crawford and Vladan Joler, “Anatomy of an AI System” ↩
8.
Vladan
Joler and Matteo Pasquinelli, “The Nooscope Manifested: Artificial Intelligence
as Instrument of Knowledge and Extractivism,” KIM HfG Karlsruhe and Share Lab,
May 1, 2020, https://nooscope.ai. (본문의 뒤이은 인용문은
필자 번역.) 전문은 제13회 광주비엔날레(2021) 웹사이트의 한국어 번역본을 참고.
https://13thgwangjubiennale.org/ko/pasquinelli-joler/. ↩
9.
만약 〈지식경 선언〉을 쓸 당시 욜러와 파스퀴넬리가 지금의 생성형 AI의 역할에 대해서 말하고자 했다면, ‘예측’이라는 개념보다는 ‘제작’이나 ‘생성’을 써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
10. 케이트
크로퍼드, 『AI 지도책』,
13. ↩
11. Vladan Joler, “New Extractivism: An assemblage of concepts and
allegories,” commissioned by Digital Earth for the Vertical Atlas publication
(Ljubljana: Aksioma, Institute for Contemporary Art, 2020),
https://extractivism.online/. ↩
12. 블라단
욜러, 김상민, 「대담:
‘신채굴주의’ 지도 읽기」, 『국립현대미술관
연구』 제14집, 2022, 81. ↩
13. 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하기』, 최유미 옮김(서울: 마농지, 2021),
99. ↩ (출처: 채굴되는 지구, 추출되는 데이터: AI 시대의 지도 그리기와 예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