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아무리
복잡한 모델도 결국에는 이해의 매개체다. 머이브리지의 혁신적인 사진 작업은 새로운 이해의 모델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격변의 증거이기도 하다. 흔히들 간결한 모델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여기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 모델에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면, 아무리 진보한 모델일지라도, 모든 모델은 미완의 개념으로, 즉 추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아무리 강력할지언정, 이와
같은 추상은 득이 되기도 하고 실이 되기도 한다. 머이브리지의 사진이 시각 예술을 재정의했듯이, 오늘날의 AI 모델은 우리가 복잡한 시스템을 이해하는 방식을 재구성한다. 하지만 사진의 셔터 소리가 회화를 멈춰 세우지 못했듯이, AI가
생성한 결과물 또한 우리의 이해를 멈추게 할 수는 없다. 핵심은 픽셀들의 사이 공간과 알고리즘에서 손실된
미묘한 차이들을 해석하는 데에 있다.
사진이 발전함에 따라 회화는 구상에서 추상으로, 확실성에서 상상성으로 옮겨갔다. 인상주의는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무수한 감각을 더 깊게 파고든 데에 따른 결과물이었다. AI가 정량화된
지식과 정밀한 모델을 제공하는 지금, 우리의 과제는 AI가
생성한 결과물을 단순히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진정으로 느끼고, 재해석하고, 재창조하는 일일 테다.
머이브리지가
사진을 통해 드러낸 것은 당대의 인식 체계에 반하는 새로운 시각적 시대의 시작에 불과했다. 이와 비슷하게, 현재의 AI 모델 역시도 다가오는 지적 지평의 서막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러한 기술에 감탄만 할 것이 아니라, 아직 초기 단계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AI의 진정한 가치는 그 결과물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있다.
22)
그렇다면
여기에서 질문을 던지고, 인식을 촉발하는 실천적인 모델을 개념화하는 문제와 직면하게 되는데, 우리는 이를 ‘무지의 모델’이라고
불러 보려 한다. 언뜻 생각하면 ChatGPT와 같은 대규모
언어 모델은 ‘모른다’고 답할 줄 모를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가능하다. 이러한 모델은 방대한 양의 텍스트로 훈련됨과
동시에 불확실성 또는 지식 부족을 인정하는 것 역시 인간과 유사한 반응을 생성하도록 설계되었다. GPT가 ‘모른다’고 답하는 영역은 아래와 같으며, ‘감정적 혹은 인지적 압도’를 제외하고는 인간과 상당히 겹친다.
- 지식 또는 전문 지식 부족
- 불확실성 또는 모호성
- 추측 또는 미래 예측
- 개인적인 의견 또는 경험
- 기밀성 또는 개인 정보 보호 문제
- 감정적 또는 인지적 압도
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무지의 모델을 떠올려 봐야 한다. 단순히 ‘모른다’라는
답을 끌어낼 수 있는 모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과도 같은 무지의 모델일 테다. 지능과 역량의 증강을 위한 인공지능이 아닌, 우리의 지식의 한계와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또 더듬어 모색해 보기 위한 무지의 모형 말이다. 분석하고 모형화할 수 있는 것에만
몰두하는 모델이 아닌, 지식에 내재하는 미지와 간극들을 인식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모델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인공지능으로부터 직접적인 답변을 얻어내는 대신,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질문을 함께 만들어 내고, 여러 관점을 종합하고, 지적 자율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모형화 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은 공통된 무지의 상태를 수용하는 교육학을 옹호한다.
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 ―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 양창렬 옮김. 궁리, 2016. 이는 무지를 결핍이나 약점이 아니라 지적 성장과 비판적 사고의 촉매제로 보는 관점이다. 무지를 포용함으로써 지적 자율성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방식은 학생들이 학습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의문을 제기하며, 독립적으로
지식을 추구하는 과정을 통해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관찰하고, 되풀이하고, 검증하고, 더듬어 간다. 마치
수수께끼를 풀듯이. 그리고 랑시에르는 이렇게 더듬어 가는 과정이야말로 참된 지능의 운동이자 지적 모험이
아닐지 묻는다. ‘무지를 모르는’ 상태에 파열을 일으키는
모델이야말로 ‘무지의 모델’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23)
‘무지한 스승’의 개념에 기반한 AI를 개발한다는 생각은 반직관적이면서도 매우 필요하다. 이러한 ‘무지의 모델’은 정보로 포화된 현시대에서 역설적으로 지식의 등대가
될 수도 있다. 공백과 간극을 받아들임으로써, 더 깊고 총체적인
형태의 학습을 가능하게 할지도 모른다. 이는 음악에서 음표만큼이나 중요한 침묵이 지식의 선율에 깊이와
울림을 더해 주는 것과도 같다.
GPT의 정보 중심적 접근법과 ‘무지의
모델’을 병치해 보면 독특한 관점이 드러난다. 이를 통해
우리가 지능을 이해하는 방식을 재고해 볼 수가 있다. 핵심은 정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고 의심하며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을 향한 열린 자세를 유지하는 용기일 테다.
누구는 이러한 ‘무지의
모델’을 AI에 적용하는 것이 퇴행적이라고 하겠지만, 실제로는 지식을 향한 여정이 멈추는 법이 없는 미래로 나아가게끔 해 주는 원동력이 된다. AI가 모든 문제의 답을 제공해 줄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진정으로 추구하는지를 자문해 봐야 한다. 단순한 생산성인가, 아니면
보다 깊숙한 이해인가? 생산성은 본질적으로 양날의 검과도 같다. AI를
비롯한 기술 덕분에 우리는 더 짧은 시간 안에 더 많은 일을 성취할 수 있게 됐지만, 이해의 깊이가
그 속도를 따라가고 있는지 자문해 봐야만 한다.
속도와 깊이 사이에 내재하는 긴장감은 근현대적 수수께끼의 핵심이다. 오늘날 정보의 접근성은 그 언제보다도 높지만, 깊이 있는 이해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이제는 지식의 양에서 이해의 미묘함으로 초점을 옮겨, 지적 성취의 지표를 재평가해야 할 때인듯하다. ‘무지의 모델’을 받아들이는 것은 현대 기술의 편리함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모호성의
사이 공간을 긍정하고, 이해를 추구함으로써 이를 보완하는 것일 테다.
24)
다시
매스터먼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녀의 또 다른 주장 하나를 살펴보자.
“언어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상당히 규칙적인 간격으로 호흡하는 생물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금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매스터먼의 논지를 거칠게 축약한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Wikipedia contributors. “Margaret Masterman.”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https://en.wikipedia.org/w/index.php?title=Margaret_Masterman&oldid=1154803664 매스터먼이 더 확장적이고 깊이 있게 이 논지를 전개해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도 다음의 문장들은 개인적 가설에 가까울 것이다.
그녀의 주장을 조금 더 조작적으로 이야기해 보자면, 언어는 어떠한 생물체의 물리적, 생물학적 제약에 의해 형성되는 복잡한
체계다. 호흡의 리듬, 성대의 한계, 두뇌의 구조, 심지어 음성 언어를 수신하는 청각 기관과 공기의 파동
마저도 언어의 형성과 사용방식에 기여할 것이다. 이러한
물리적 한계는 언어를 이해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음성 언어는 어떠한 유기체와 그
주변의 물리적 특성의 산물이고, 문자 언어도 어느 정도는 마찬가지일 테다.
이는
우리가 어떠한 실재의 조건 속에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한 생각을 상기시킨다. 이 생각은 다시 시간은 실제로
멈추지 않는다는 로댕의 말을 다시 되새기게 하며, 모형화와 모형화 되지 못할 공백 사이에서 진동하며
대규모 언어 모델을 바라보게 한다.
매스터먼은 “마음을
위한 망원경”이라는 비유 혹은 모형을 통해 컴퓨팅을 이해하고자 했다.
마치 17세기의 망원경이 인간의 인식과 세계가 맺는 관계를 재검토하게 했듯이, 오늘날에는 컴퓨팅과 인공지능이 우리의 인식을 또 한 번 재고하게끔 한다.
자연과학이 망원경에 의해 재발명되었다면, 인공지능은 인식 체계의 재발명과 연관될 것이다. 단순히 통계적으로
추출-합성된 결과물로 인한 스테로이드적 생산성 증강이 아닌, 또
다른 인식 체계와 관련된 무언가로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식의
가설을 수립해 볼 수 있는 블랙박스 혹은 무지의 모델로 대규모 언어 모델을 바라보는 관점은 언어, 인식, 그리고 인간과 기계의 관계에 대한 관습적 사고를 가로질러 새로운 인식의 모형을 생성해 낼 가능성을 생각해 보게
한다.
25)
“마음을 위한 망원경”이라는 비유는 흥미로운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망원경은 멀리에 있는 별을 가까이로 끌어다 주지만, 그 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는 알려 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AI는 엄청난 잠재력을 지니지만, 온전한 지식의 원천이라기보다는
지식을 가까이하고 탐색하게 해 주는 매개체로 봐야 한다. 따라서 ‘무지의
모델’이라는 개념의 핵심은 AI의 지식수준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AI의 잠재력을 활용하여 질문하고 탐구하는 역량과 호기심을 촉진하는 것일 테다.
AI를 단순한 도구가 아닌 매개체로 바라보면, 문학이나 미술과도 유사한 폭넓은 문화적 역할이 부여된다. 이러한
미학적 공간에서, 모호성은 사색과 성찰을 효과적으로 유도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해진다. AI라는 매개체는 ‘무지의
모델’로서 이러한 미학적 공간들을 촉발할 수 있을까?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설이나 음악처럼, 불확실성을 억제하는 대신 이를 깊숙하고 성찰적인 이해의 통로로 활용할 수
있을까?
여기서 살펴본 모든 작품과 개념들은 방대한 디지털 생물군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해 줄 잠재력을 지닌다. 그 속에서 디지털 예술의 역동성, 모형화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진동, 그리고 언어의 풍부한
미묘함이 모두 교차한다. 여기서 우리의 과제는 미지의 영역이나 모호성을 회피하지 않고 긍정하며, ‘무지의 모델’을 활용하여 더 깊은 탐구를 촉진하는 일이 아닐까?
-
이
글은 2023년 포킹룸에서 열린 토크에서 발표한 〈생산성과 생성성 -
취한 시인으로의 GPT〉 (이계성 & 최빛나)에서 출발해 확장된 글이다.
이계성은
번역과 저술을 통해 대규모 언어 모델과 컴퓨터 생성 텍스트의 능률적이기보다는 시적인 측면들을 고찰하고자 한다 .
『파르마코 - AI』 (작업실유령 , 2022), 『태양과의 대화』 (미디어버스 , 2023) 등의 책을 옮겼고 『맥락과 우연 —GPT와 추출적 언어학』 (미디어버스 , 2023)의 저술에 참여했다
최빛나는
언메이크랩에서 활동하며 포킹룸의 리서처로 참여하고 있다. 발전주의 역사와 기계 학습의 추출주의를
서로 겹쳐 현재의 사회문화, 생태적 상황을 드러내는 것에 관심이 있다.
최근에는 데이터셋, 컴퓨터 비전, 생성 AI의 예측성을 ‘일반자연 ’이라는
개념과 함께 놓고, 그 사이에서 드러나는 인간중심적 문화와 신식민성,
재난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