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동현의 초기 작업은 눈에 보이지만 결코 실재한다고 할 수 없는 영화와 애니메이션 속 등장인물들의 초상화로 대표된다. 전통의 방식 그대로 정교하게 그려진 가상 인물의 초상화는 이미지가 지배하게 된 시대적 변화를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스스로가 동양화임을 강하게 어필한다. 익숙했던 하나하나가 만났지만 낯설어졌다. 전통을 따르는 듯 벗어난 낯섦 때문에 동양화의 정체성이 선명해진다는 역설은 동양화의 개념적이고 매체적인 본질을 고민한 실험의 결과이다.
 
손동현의 초상화는 전통 초상화의 중심이 되는 전신사조(傳神寫照)의 개념과 관련해 문제적이다. 작가는 전신사조를 실현하기 위해 가상의 대상을 관찰하고 조사한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존재의 내면을 추적하는 작가에게 자연스레 던지게 되는 질문들이 있다. 계획된 시나리오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가상의 존재가 지닌 고유한 정신(의 경지)을 형상으로 옮겨 그리는 것이 가능한가? 몇 번이나 복제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을 바탕으로 그려낸 초상화에서 진정으로 천상묘득(遷想妙得)을 이룰 수 있을까?

그 본질이 불명확한 대상인데 작가의 주관적 정신과 사상, 상상이 더해진다 해도 상(像)의 내적 본질을 온전히 화폭에 담아내는 것은 무리이지 않을까? 배트맨(Batman), 터미네이터(Terminator), 조커(Joker)를 지나 토이 스토리(Toy Story)의 우디(Woody), 스타워즈(Star Wars)의 로봇 C-3PO와 R2-D2, 그리고 그렘린(Gremlin)에 이르면 작가의 의도가 더욱 궁금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을 뒤로 한 채 작가는 우직하게 여러 점의 초상화를 완성했다.


손동현, 〈인조인간알이두이시삼피오도〉, 2005, 지본수묵채색, 162 x 130 cm © 손동현

실재와 가상, 사실과 허위, 현실과 상상, 원본과 복제품을 구분하는 것이 어려워진 시대이다. 현실을 대신하는 가상, 끝없이 이어지는 복제, 실재처럼 보이는 파생실재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이제는 그것을 실감한다고 말하는 것이 어색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최소한 초상화 연작을 진행했던 동안, 아니 그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작가는 리얼리스트로서 이 시대를 재현했던 것처럼 보인다.

손동현의 작업은 현대의 모습을 거짓 없이 담아낸 사실주의 회화이다. 그가 그리는 대상들은 모두 작가를,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현실이다. 생각보다 실재와의 만남이 쉽지 않은 세상이다. 분명 시대가, 세상이 바뀌었다. 인위적 이야기들이 현실의 이야기를 압도하고, 가상의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들이 현실 속으로 깊숙이 들어온 세상이다. 영화 속 이미지와 해당 배역을 맡은 실제 배우의 사진을 참조해 완성한 〈헨치맨 Henchmen〉(2011)은 누구의 초상인가?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그 경계선을 명확히 그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3D 입체 영화와 4D 영화, 만화 속 캐릭터를 현실화하는 배우, 콘서트를 열고 라이브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보컬로이드(Vocaloid). 진짜보다 더 감각적인 가짜. 실재하는 자연보다 이미지로서의 자연을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간다. 이웃의 얼굴보다 텔레비전 속 스타의 얼굴이 익숙하게 느껴진다. 영화 속 주인공의 감정을 공유하며 웃고 우는 사람들 안에 내가 있다.


손동현, 〈island(The Day After Tomorrow)〉, 2011, 8곡병풍, 지본수묵담채, 130 x 371 cm © 손동현

이런 시대에 작가는 대피 덕(Daffy Duck), 토니 더 타이거(Tony the Tiger) 같은 애니메이션과 광고 속 동물 캐릭터를 바탕으로 영모도(翎毛圖)를 그렸고, 밤비(Bambi), 닌자거북이(Ninja Turtle), 〈텔레토비 Teletubbies〉(1997~2001)의 해님, 〈스타워즈 Star Wars〉(1977)의 데스 스타(Death Star), 〈환타지아 Fantasia〉(1940)의 춤추는 버섯 등이 등장하는 십장생도(十長生圖)를 선보였다.

〈섬 Island〉(2010)에서는 〈딥 임펙트 Deep Impact〉(1998), 〈투모로우 The Day After Tomorrow〉(2004)와 같은 블록버스터 영화의 파괴된 도시 풍경을 담았으며 〈배틀스케이프 Z Battlescape Z〉(2013)에서는 만화 『드래곤볼 Dragon Ball』 속 전투 장면의 배경을 이어서 산수화를 완성했다. 현실에서는 보기 힘든 사건들이다. 그러나 가상의 세계에서는 익숙한 풍경이다. 우리는 만질 수 없는 세상 속에 둘러싸여 있다. 이미지로 서로와 만난다.
 
다시금 질문 하나. 실재하지 않는 대상을 그린 그림이 특이한 것이라면, 자신이 실제로 보지 못한 존재들을 그려냈던 이전 시대 미술가들의 작업과 손동현의 작업은 무엇이 닮았고 무엇이 다를까? 손동현에게는 만질 수 없어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미지가 있었다. 진짜를 그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진정한 재현은 무엇인가? 어쩌면 작가는 회화의 본질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실재가 아닌 가상 이미지의 모방이든, 복제된 것의 모방이든, 아니면 사상과 감정의 모방이든 회화다. 그리고 회화(예술) 창작의 시작에는 미메시스(mimesis)가 있다.


손동현, 〈영웅울배린선생상〉, 2006, 지본수묵채색, 190 x 130 cm © 손동현

한편 손동현의 작업은 가상과 현실을 분리하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가 그린 초상화를 여러 번 볼수록 한지와 그 위에 칠해진 물감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실재하지 않던 이미지는 물질화되었다. 그런데 작가가 성실히 재현하면 할수록 초상화 속 존재는 더욱 허구처럼 보인다. 실재감이 약화된다. 복제된 가상의 이미지로 존재할 때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다.

전통 초상화의 형식에 맞춰 아무것도 그려 넣지 않은 빈 배경도 이런 상황에 일조한다. 모든 스펙터클이 사라지고 오직 인물만 남은 상황. 초상화의 주인공과 진정으로 마주하는 순간이자 그들에게 열광하는 우리 시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자각하는 순간이다. 가상 존재의 초상은 그렇게 한 시대의 초상이 된다.
 
가상은 현실의 부분일 뿐 전부가 될 수 없다. 전부가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사실이다. 무조건 부정할 수는 없다. 가상의 세계가 그저 의미 없이 텅 비어있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은 그저 이미지에 휘둘리기만 하는 것인가? 우리는 물리적 세계에서만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말인가? 쏟아지는 질문들에 선뜻 답하기 어렵다.

그 원인과 목적은 제각각이겠지만 가상 세계의 많은 부분은 현실에 근거한다. 직설적이든, 상징과 은유를 이용하든 결국은 인간 삶의 반영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인간의 삶이 담긴 또 하나의 세상이다. 거기에는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이 담겨 있다. 때론 더 많은 가능성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울버린(Wolverine)과 슈퍼맨(Superman)의 뒤로 보이는 여백은 그저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다.


좌: 손동현, 〈Portrait of the King(billie jean)〉, 2008, 지본수묵채색, 194 x 130 cm © 손동현
우: 손동현, 〈Portrait of the King(22 man in the mirror)〉, 2008, 지본수묵채색, 194 x 130 cm © 손동현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초상화 40점으로 구성된 ‘왕의 초상 Portrait of the King’(2008~2009)도 실재와 가상의 관계를 고민하게 만든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생산되고 전파되는 이미지가 스타의 본모습에 얼마나 가까울지 알 수 없다.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 그랬듯 기획되고 만들어진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우리는 스타에 반응한다.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스타에게 투사한다. 스타도, 스타를 소비하는 사람들도 모두 허상에 가까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의 초상’은 분명 전통 초상화가 지향했던 가치에 한층 더 가까워졌다. 마이클 잭슨이 실존 인물이라는 점도 영향을 주었지만 무엇보다 연작으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작가는 긴 호흡으로 대중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슈퍼스타의 삶과 이미지를 추적했다. 그리고 변화의 절정을 여러 번 겪은 스타의 초상은 과정 중의 주체를 시각화하는 데에 성공했다.

작품을 마주하며 나의 삶을 반추해본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슈퍼스타만 과정 중에 놓이는 것은 아니다. 세상만 변하는 것도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자발적이든 아니든 모든 인간(의 외면과 내면)은 계속 변한다. 살아가면서 자신이 놓인 상황에 따라 반응하는 멈추지 않는 현재진행형의 존재가 인간이다. 고정되지 않음은 필연적이다. 스타의 일대기를 담아내는 그림은 그렇게 개인들의 일대기를 상상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좌: 손동현, 〈Mask: Dark Man(Dark Man)〉, 2011, 지본수묵채색, 53 x 45.5 cm © 손동현
우: 손동현, 〈Mask: Hit Girl(Kick Ass)〉, 2011, 지본수묵채색, 53 x 45.5 cm © 손동현

이제 한 발 더 나가보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도 자신에게 요구되는 혹은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모습으로 진짜 모습을 가린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마스크 Mask’(2011)는 영화 속 존재와 스타를 그린 초상화의 연장인 동시에 인간 존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작업이다. 사실 인간은 자기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없다. 자신을 한 번에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나 촬영된 이미지로만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인간에게 가면은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대신하는 것이자 직접 마주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얼굴이다. 이처럼 자기 자신조차 온전히 붙잡을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 모순을 환기시키는 가면은 인간 존재의 정체성을 다루기에 적합한 소재이다. 전신사조를 탐구해온 작가의 작품에 인간 내면의 본질에 대한 탐구가 담기는 것은 필연적이다. 인간 그 자체에 관한 관심과 고민이 없었다면 애초에 초상화 작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회라는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독립적인 개인인 동시에 시스템의 일원이기에 나에게 주어진 혹은 내가 원해서 만든 가면에 맞춰 살아간다. 따라서 시스템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적절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고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마치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가면을 통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가면에 따라 매번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듯 연출된 모습을 보여준다.

인위적인 외적 인격을 뜻하는 페르소나(persona)는 주어진 상황에 맞게 우리가 바꿔쓰는 관념적이고 가상적인 가면이다. 그것은 개인의 실체와는 거리가 먼 타협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페르소나의 이면에는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든, 숨기기 위해서든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내적 인격이 존재한다. 결국 가면은 감추는 것과 상징하는 것을 동시에 지시한다. 가림으로써 드러낸다. 이중적이다. 당연히 숨겨진 것과 보이는 것의 조화가 중요해진다.
 
손동현의 ‘마스크’는 가면을 통해 숨김과 드러냄 사이의 심리, 인간의 자아와 그림자, 내적 인격과 외적 인격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다. 〈스타워즈 Star Wars〉의 클론트루퍼(Clone Trooper)는 모두 같은 가면을 쓰고 집단성을 드러낸다. 영화 〈300〉(2007)의 가면은 적에게 강함을 드러내고 자신의 두려움을 숨기는 보호 장치이다. 가면을 쓴 제이슨(Jason)의 정체를 알 수 없기에 공포는 배가된다.

블록버스터 영화의 주인공은 가면을 쓰고 코스튬을 입는 순간 선, 악, 혹은 제3의 무엇으로 변신해 평소와는 다른 새로운 정체성을 발현하고 일상의 자신을 벗어나 한계를 뛰어넘는다. 이성적 사고를 벗어나 무법적인 욕망에 빠지기도 하고 현실에서는 꿈꾸지 못했던 이상을 실현하기도 한다. 조로(Zorro)와 아이언맨(Iron Man), 힛걸(Hit-Girl)은 가면을 씀과 동시에 영웅이 되어 세상을 구한다. 블랙스파이더맨(Black Spiderman)은 무의식에 억압된 어두운 부분인 그림자와 자아 사이의 균형과 통합이 깨진 상태의 은유처럼 보인다.
 
가면은 사실과 상상, 현실과 이상, 이성과 본능,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하는 매개체이자 경계이다. 그리고 가면이 그렇듯 손동현의 가면 그림 뒷면에도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마스크’는 그저 가면을 묘사한 그림이 아니다. 이번에도 작가는 형상의 뒷면을 포착하고 이미지의 심층을 재현해낸다. 손동현의 다른 작업이 그렇듯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이해, 그리고 상상력이 더해진 초상화이다.


손동현, ‘Mask’ 연작, 2011, 지본수묵채색, 각 53 x 45.5 cm © 손동현

누군가는 손동현의 작업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확정적이라 느낄 수 있다. 작가가 모든 작품에서 명확히 지시 가능한, 익숙한 대상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시리즈마다 소재와 주제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보이는 분위기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구체적 대상인 동시에 은유적 상징이다. 전통적인 초상화의 기본형식을 따라 등장인물의 이름이 작품의 제목이 되는 상황은 최소화된 정보만을 제공할 뿐이다. 익숙한 것과 잘 아는 것은 다르다.

또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될 수도 없다. 한편 일부의 사람들은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동양화의 정신과 화법을 고수하는 그의 화풍이 대중문화의 요소들을 만났다는 점을 보고 그의 작업이 생성하는 내러티브를 단정짓기도 한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손동현의 작업은 그렇게 구체적이거나 한정적이지 않다. 명시적이지만 명시적일 수 없는, 모든 의미를 열어놓는 작업이다. 혹시 우리의 시선이 너무 성급하게 그의 작업을 한 자리에 고정시킨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손동현의 작업은 처음부터 경계선 위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작업은 경계를 가로지르고 초월하는 과정을 향한다. 그의 작품 속 존재들이 고정되지 못하거나 고정되길 원하지 않는 것처럼, 현재진행형인 우리의 정체성이 그런 것처럼 손동현의 초상화도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영역 모두에서 가능성을 열어둔 채 수평적인 횡단을 하고 있다. 눈여겨볼수록 그의 작업은 다음 편을 기대하라고 여운을 남긴다. 또 다른 이야기가 남아 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그의 작업을 생각하며 막연히 찍어두었던 마침표를 조심스레 거두어 본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