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술-이미지(Technical
Image)는 ‘보이는 것’과
‘있는 것’ 사이에 투명한 벽을 세운다. 이 벽은 투명한
만큼이나 얇고 미세해서 우리는 종종 벽의 존재를 망각하고 어딘가에 나타난 이미지가 현실 그 자체라 믿게 된다. 카메라나
카메라의 알고리즘은 속도와 효율성을 미덕으로 삼고, 세계의 복잡다단한 사건을 즉각적으로 소비 가능한 데이터
조각으로 가공한다. 이 과정은 경험의 질감이나 시간의 밀도를 제거해 기계가 사로잡은 이미지를 소비자에게 납품하는
일종의 공장식 축산 시스템을 연상시킨다.
이진주의 회화는 이 매끈한 흐름에 부적응하는 다소 강퍅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그가 시각적 조급증의 사각에서 극도로 느리고, 수정이 번거로우며, 시대착오적일 정도로 노동이 집약된 회화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화면은
일견 고요하고 정적인 제스처를 취하지만 내부에는 이질적인 파편들이 위태롭고 불편하게 병치되어 있다. 기억의
잔상, 일상의 사물, 알 수 없는 인물과 무어라 불러도 상관 없는 신체
부위가 일견 맥락 없이 부유한다.
이렇게 그려진 회화에는 까맣고 사실적이라는 평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까맣다는 점과 사실적이라는 점마저 잠시 잊어버린다면 이것을 화면 위에 ‘불투명한’ 단층을 구축하는 일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이진주의 작업은 동시대의 이미지에
관한 미술의 반응으로 위치할 때 진가를 드러낸다. 그는 세계가 고정된 사물이 아닌 유동하는 사건으로 이루어졌다는
통찰을 기반으로 동양화의 진경(眞景), 즉 관념적 사실의 전통을 영리하게
호출한다. 그는 파편화되고 불연속적인 경험에 기댄다. 《불연속연속》은
이렇듯 최근 몇 년간 그의 방법론이 집요하게 파헤친 회화적 풍경—미술의 압력으로 응축된 지질학적 단면—을 제시하는 전시다.
2.
이진주의 〈사물이 아닌 사건으로 이루어진〉(2024)과
〈비좁은 구성〉(2021–2023)은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 그의
이번 전시를 이해하려면 상술한 두 작품을 가로지르는 화가의 생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는 『The Order of Time』(2019)에서 “세계는 사물이 아니라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썼는데, 그에 따르면 사물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상호작용 속에서 잠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는 사건의 매듭에 불과하다.
이진주는 몇 해에 걸쳐 학교 실기실 앞의 후박나무가 변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 발상을 회화적 방법론의 근거로 삼았다. ‘사물이 아닌 사건으로…’는
사물이 보이는 장면을 사건의 단위로 분해한 블랙 페인팅 연작으로, 손, 종이, 낙엽과 같은 최소한의 내용이 서로의 시간을 간섭하며 결과적으로 각각의 캔버스가 다른 사건들의 발현을 겨냥하도록 설계되었다. 〈비좁은 구성〉은 회화의 화면뿐 아니라 현실의 공간을 끌어들여 사건으로서의 보기를 일으킨다.
요컨대 보이는 것에 대한 생각이 보는 법에 대한 생각과 함께 발전한 것이다. 특히
이 작업은 동명의 개인전 《비좁은 구성 Confined Composition Part 2》(2023-2024)의 주된 감각을 이루었다. 《불연속연속》의 첫 번째 장면에서
새로운 전시 공간에 배치된 〈비좁은 구성〉은 그가 지난 연구로부터 계승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드러낸다. 우리는
이미지를 완결된 생산물로 간주하고 그것을 소유하거나 소비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이진주는 자신이 본 대상을
재료, 형태, 시선, 시간이 얽혀
현실을 딛는 불투명한 사건으로 재정의할 것을 제안한다.
그가 즐겨 그리는 지면(ground)의
형상처럼, 완성된 캔버스는 사건을 잠시 붙들어 두는 무대일 뿐, 사건을
다시 이미지로 지시하는 이미지가 되는 일에 심드렁하다. 이렇듯 순수한 사건으로서의 이미지는 기술-이미지의 존재 방식과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세계가 독립적인 사건들의 예측
불가능한 발생과 소멸로 이루어진다면 불연속성이야말로 세계의 근본적인 조건일 것이다. ‘정처 없는’ 병치는 바로 이러한 세계의 불연속을 상상한다.
이진주가 불연속의 세계를 연속으로 이어 붙이는 방법론은 동양화가 추구한 진경과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그의 작업이 콜라주기법이나 초현실주의 양식으로 간단히 환원되지 않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화의 전통은 원근법과 명암법을 이용해 세계를 재현하는 것에 주력했다. 단일한 시점에서 포착된 순간적인 사실을 추구하는 재현의 방식은 그 자체로 광학적이라 부를 수 있다.
반면 진경은 실경(實景)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들여 대상을 배우고 익힌 관념적 사실이다. 이것은 순간의 포착이라기보다 사유의 누적에 가까우며
다시점을 통한 재배치 과정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이진주는 이 전통을 동시대적으로 갱신한다. ‘참된 풍경’은 불연속의 이미지가 아니라 불연속과 그 다음의 연속이 기이하게
경합하는 인식에서 출현한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 경험 역시 대체로 비슷하다. 기억은
어디서든 불쑥 침입하고 현실은 어디로든 무방하게 자라난다. 〈오목한 눈물-볼록한
용기〉(2025)와 같은 대형 회화에서, 이진주를 상징하는 초현실적인
풍광—눈 덮인 계곡과 기암괴석, 예측할 수 없이 자라난 혹은 잘려나간
식물들, 붉은 액체 속에 잠긴 인물과 동물 형상—은 화가의 내면에서
자라난 것임에도 일종의 시대적 징후처럼 다가온다. 그것이 다른 방식의 리얼리즘이기 때문이다.
3.
그렇다면 불연속의 사건들로 이루어진 진경은 어떻게 화면 위에 구축될 수 있을까? 이진주의 회화를 이해하는 또 다른 유용한 은유는 지질학이다. 그의 회화는 평평한
매체-표면이 아니라 사건이 퇴적되고 시간이 압축된 지층이자 회화적 지층이 드러난 불투명한 단면이다. 이 지질학 구조는 화가의 기법과 직결되는데, 캔버스 위에 장지를 바르고 필요에
따라 아교와 분채를 수십 번 겹겹이 쌓아 올리는 지난한 그리기는 기술-이미지에 대한 대안으로서 불투명함, 일종의 두께를 구현한다.
여백, 어긋난
배치, 절취선과 같은 경계는 회화적 접합을 수행하는 단층선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예컨대 〈슬픔과 돌〉(2025)의 암석 표면에서 드러나는 세밀한 질감은 재현의 증거라기보다 불균질한
압력에 노출된 퇴적의 결과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불연속연속’이라는 제목 역시 지질학의 언어로서 더욱 풍부한 의미를 획득할 것이다. 지층이
쌓이는 과정은 연속(층리)을 만들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외부의 압력과 응력이 임계치를 넘을 때 불연속(단층)이
발생한다.
이 불연속은 파괴의 흔적이 아니라 에너지를 방출한 뒤 다음 층을 수용하기 위한 ‘지면’의 전환이다. 일련의 셰이프트 캔버스
연작은 그가 천착해 온 관심사가 매체 내부로 치우친 결과라 보아도 좋다. 〈사물이 아닌 사건으로…〉가 도달한 블랙 페인팅의 재배치, 〈대답들〉(2024)을
기준으로, 〈슬픔과 돌〉, 〈서 있는〉(2025),
〈쫓아가는〉(2025)은 〈비좁은 구성〉의 반대 분면에 위치할 것이다.
이진주의 지질학적 단면은 독특한 빛의 사용을 통해 회화로 완성된다. 그의 화면에는 특정한 광원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림자나 하이라이트가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모든 대상이 균등한 빛을 받고 있는 상태, ‘비조명’의 상태다. 이로 인해 화면은 기묘할 정도로 평면적으로 보이고 대상들 사이의
원근감이나 위계가 사라진다. 비조명은 동양화 재료의 특성이 만든 우연한 결과가 아니라 작가의 개념적 선택이다.
명암법은 빛과 어둠을 통해 대상의 입체감을 강조함으로써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동시에
빛을 받는 부분과 가려지는 부분을 구분한다. 이는 특정한 순간의 광학적 조건에 종속된 시선이다. 광학적 환영과 멀어진 균등광의 화면에서는 트라우마적인 기억과 사소한 잔상이 같은 강도로 발화한다. 이 건조한 시선은 표현의 과잉이나 연극적인 고양을 억제하는 거리두기의 장치이기도 하다.
손은 비조명의 무대 위에서 사건을 조율하고 개시하는 중요한 행위자로, 이진주의 작업 전반에 걸쳐
작가의 주체적 능력(agency)을 응축한 매개체로 등장한다.
손은
불연속적인 세계의 파편을 불러 모으고 연결하며 사건을 발생시키는 방아쇠다. 능력으로서의 손은 관념적 사실을
정리하는 편집의 권한인 동시에 혼돈스러운 이미지 조각을 구축하는 기술이다. 여기서 작가의 주체성은 심리의
고백이 아니라 세계를 배우고 재배치하는 능력으로 드러난다. ‘대답들’ 연작을
포함해 〈5-남은〉(2025), 〈5-결〉(2025), 〈5-얇은〉(2025)처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떠오른손은 무언가를 쥐고, 자르고, 잇고, 가리고, 건넨다. 손의 동사는 곧 화면
속 사건의 동사다.
4.
마지막으로, 이진주가 구축한 사건의 지층은
회화 바깥의 존재, 즉 회화가 본 세계를 보기 위해 역방향으로 회화를 보는 존재를 통해 활성화된다. 그의 회화는 관람자에게 특정한 보기의 방식을 요청하는데, 그 핵심을 간격(interval)이라 부를 수 있다. 간격은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빈틈이나
여백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 시선과 시선의 어긋남, 보임과 가림의 교차, 그리고 인식이 지연되는 짧은 정지를 포함한다.
과거에 〈비좁은 구성〉이나 〈사각〉(2020)은 대형 캔버스를 맞물려 은폐하거나 어긋나게 해 이미지를 단번에 붙잡는 관람이 구조적으로 실패하게 유도했다. 사각 형태의 설치를 에워싼 좁은 통로, 삼각형 구조물과 같은 장치는 관람자의
시야를 제한하고 신체적 이동을 이끈다. 회화는 총체적 시선을 서비스하지 않고 관람자는 작품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이상적인 위치를 찾을 수 없다. 관람자가 관람의 안온함을 배제한 채 전시실을 걸으며 이미지와 이미지의
간격을 함께 읽어내야 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즉물성이나 현전성을 강조한 미술사의 시도들과도 구분되는 것이다.
불완전한 보기는 결핍이 아니라 작품에 설계된 불투명함 앞에서 관람의 압력을 높이는 핵심적인 조건이다. 이번 전시가 열리는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의 구조는 이러한 경험을 더욱 증폭시킨다. 관람자는
대부분 지하 1층으로 진입한 뒤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이용해 1층, 3층, 4층으로 비선형적인 이동을 시도한다. 약간의
우발성과 함께 각 ‘층’을 오르내리는 신체적 경험은 그의 화면 속 단층선을
횡단하는 시각적 경험과 공명한다.
전시의 불연속은 관람자의 이동이라는 연속을 통해서만 연결될 수 있다. 이렇듯 흥미로운 관람의 제안은 〈음각의 풍경(Negative Landscape)〉(2025)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실험되는 듯하다. 이 작업은 회화이자 입체적인
구조물이며, 삼면화의 관습을 떠올리게 한다. 작은 캔버스에 각도와 깊이를
부여한 이 구조는 관람자의 시야를 일시적으로 제한하고 임시-사각을 만들어낸다.
‘네거티브’라는 제목은 몇 가지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그것은
사진에서의 네거티브 필름처럼 명암과 색상이 반전된 공간을 뜻할 수 있고, 형태가 아닌 배경이나 기타 나머지의
것에 주목하게 만드는 미술사적 용법일 수 있다. 어쩌면 기술-이미지가
보장하는 ‘좋은’ 가시성에 반하는 ‘부정적인’ 현실로의 역전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어떤 의미를 경유하든 네거티브한 이미지는
즉각적인 생산과 소비로부터 뒤집힌다.
이진주의 《불연속연속》은 기술-이미지가
발휘하는 시각 문화의 지배력으로부터 회화가 어떻게 여전히, 그리고 급진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회화를 고정된 사물에서 유동적인 사건으로, 평평한 표면에서 시간의 밀도를
가진 지층으로, 즉각적인 투명한 것에서 어디론가 표류하는 불투명한 것으로 전환한다. 그는 동양화의 전통을 동시대적으로 재고하며 현실에 다가서기 위한 관념적 사실을구한다. 그는
느리고 노동집약적인 방식을 동원해 회화의 두께를 구축한다.
손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장면은 더 오래 열려 있고
사건은 더 늦게 닫힐 것이다. 그는 이 두께의 감각이 오늘날 화가에게 주어진 새로운 윤리의 표명임을 직감한다. 회화가 아직 유효하다고 믿는다면, 이만한 답변이 더 있을 것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