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만일 제가 모든 것을 기억하고 당신에게 모든 것을 말한다면, 우리에게 단 하나의 기억만이 남아 있을 거예요.”─”공동의 기억?” 그는 엄숙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우리는
한 번도 공동으로 기억 속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그래요. 그렇다면, 망각 속으로 들어가겠군요.”─”아마도, 망각
속으로.”─”그래요. 제가 망각할 때, 이미
당신과 보다 더 가깝다고 느껴요.”─”가까움 가운데, 하지만 다가가지는
않은 채.”─”바로 그래요.” 그녀는 열정적으로 다시 말했다. “다가가지는 않은 채.”─”진실[진리] 없이, 비밀도 없이.”─”진실[진리] 없이, 비밀도 없이.”─”마치 지워지는 것이 모든 만남에서 마지막 자리인 것처럼. 망각이 똑같은
기이한 움직임을 통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공동의 것으로부터 우리를 천천히 끈덕지게 갈라놓을 것입니다.”
모리스 블랑쇼의 『기다림 망각』 중에서
“기억보다 더 흡사한 것처럼 보였던 그 망각에 대해”
뜯겨 나간 책장처럼, 말의 덩어리는 더
이상 읽을 수 없게 조각나버렸다. “빈 곳”에 갇혀버린 말의 흔적들은, 이제 불분명한 형태의 중얼거림으로 존재한다. 블랑쇼(Maurice Blanchot)의 말처럼, “그녀는 망각하고 있다.” 알 수 없는 공간에 갇힌 익명의 몸과 도무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들이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희미하게 떠오르지만, 어쩌면 그것은,
다시 블랑쇼의 표현대로, “기억보다 더 흡사한 것처럼 보였던 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기억 속에서 “내가 본 것”을
말하려 했던 그녀는, 또한 망각 속에서 “내가 본 것” 즉 “사라진 것”에 대해 단지 침묵하며
기다려야 하는 그녀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자신을 한없이 의심하며 끝내 도달할 수 없는 과거의 어느 사건으로
바짝 다가가려는 이진주의 그림 앞에서, 나는 그녀가 힘겹게 내뱉은 말들을 가로지르며 말할 수 없음에 대한
침묵/기다림의 목소리를 함께 듣는다. 말 줄임표가 연상시키는 신체의
옅은 호흡처럼.
여기, 두 개의 서로 다른 공간이 수직의
층을 이루고 있다. 어쩌면 상관이 없지도, 그렇다고 있을 것 같지도
않은 두 개의 공간은 사실 더 이상 기억해내지 못하는, 그래서 어떤 가능한 말로도 이 두 개의 사건을 증명할
길 없는, 사라진 것들의 추상적인 흔적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작고 비스듬한 이 공간은 쉽게 다가가기 힘든 감춰진 장소다. 말하자면, 이진주의 〈내가 본 것〉(2017)은 정교한 형태들이 여기저기 즐비하게 늘어서
있지만, 도리어 “왜곡된 재현으로 둘러싸인 위반적 서사”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어 결국 “그녀가 본 것”의
결핍을 다시 실감하게 된다. 익명의 몸과 사물들이 이 추상적인 공간에서 서로를 매개하며 사실도 아닌 허구도
아닌 텅 빈 무대 위의 서사를 묘사하려 하지만, 이것은 말이 자꾸 끊기는 불분명한 서사, 누구의 말인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말들의 끝없는 중얼거림일 뿐이다.
이진주의 그림은, 보통 개인의 “기억”에 의해 재구성된 서사적 장면들로 다뤄져 왔다. 그녀는 줄곧 일상의 어느 한 순간에 불현듯 되살아나는 자신의 기억에 대해 탐색해 왔고,
그것을 작업의 중요한 소재로 끌어들여 자신이 구축한 서사를 풀어나가는데 있어 하나의 실마리로 삼아왔다. 때문에
그녀의 그림은 늘 어떠한 시공을 배경으로 한 서사를 암시하는데, 그것은 대부분 감춰진 기억에서 갑작스럽게
추출돼 창백한 낯을 보이는 다소 병약한 형태들에 의해 짜인다.
더구나 그녀가 만들어내는 화면 위의 서사는, 사실 매우 희미하면서도 순식간에 몰입되는 어떤 기억의 단초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것들이 서로 “공동의 기억”으로 엮이는 유연함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서로가 다가가지
못하는/매개될 수 없는 서사/기억의 빈틈을 보여준다. 이진주의 매우 정교한 그림은 그런 의미에서 블랑쇼의 사유에 따라 “기억이 아닌
망각에 따른 서사”임을 인정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된 작업 중 불분명한 한 장소에 펼쳐진 하나의 추상적 장면으로서의
〈오목한 노래〉(2017)가 있다. 아마도 이 그림의 제작연도를 정확하게
밝히면 2014-2017로 표기될 것이다. 이진주는 이 그림에 어떠한
제목도 붙이지 않은 채 약 3년 간 작업실에 펼쳐 놓고 그 위에 차곡차곡 형태를 얹어갔다. 그래, 서사라기 보다는 형태를 얹었다는 표현이 어쩌면 더 맞다고 본다.
〈오목한 노래〉는 2014년 어느 날부터 그녀의 진부한 삶 속에 콕콕 찌르듯
침투해 들어온 예기치 못한 사건의 잔상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진주는 자신의 일상에서 거짓말처럼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과 그것이 남기고 간 “부재의 형상들”에 마주하여, 다시 그녀가 “본 것”들과의 힘겨운 관계
맺기를 시도해왔다. 블랑쇼가 “존재는 또한 망각을 가리키는 하나의 이름”이라 말했던 것처럼, 이진주는 존재에 대한 경험을 그 비밀스런 “망각”의 관계 안에서 그것이 온전히 남아있을 수 없는 형태임을 확인하며 고통스럽게
보이지 않는 차원으로 밀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보이지 않는 것〉(2016)은, “내가 본 것”을 바로 그 망각 차원으로 밀어 넣고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으로
혹은 사라져가는 것으로 존재를 다시 인식해야 하는 일련의 태도를 환기시킨다. 망각에 대한 블랑쇼의 사유에
비춰 좀 더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진주의 그림은 그가 본 것을 어떠한 형태로 눈앞에 고정시켜 놓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기를 끊임없이 포기하는 시도에 가깝다.
다시 말해 보이는 것이 주체의 내면에 어떠한 흔적을 남기며
다시 보이지 않는 것으로 전환되는 주체의 또 다른 인식을 강조한다. 그러한 존재의 경험이 바로 망각이며, 그것은 내면의 사유로서 보이지 않는 비밀을 간직한 추상적 상태로 주체에게 각인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그림은 지속되는 망각의 경험을 거듭 견뎌내는 기다림의 고된 과정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모든 것들 속의 각각의 것이”
이번 전시의 제목은 《불분명한 대답》이다. 전시의
제목을 두고 작가와 나눈 대화에서, 그녀는 그간 자신의 작업에서 지속적으로 주목해 다뤄왔던 “대화” 혹은 기억과의 “대면”이란 어떤 감춰진 내면들끼리의 (불완전한) 대화라고
말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블랑쇼가 사유했던 망각의 행위와 매우 닮아있다. 존재의 경험이 내면에 남겨놓은 흔적들을 우회하며 가로지르는 그녀의 대화법은, 늘
그 인식의 관계 안에 수많은 틈새를 벌려놓는다. 또한 이진주의 그림에서는 매우 정교하고 탁월한 형태 묘사가
보는 이를 매번 압도하는 형국이라, 그것과 마주할 때면 단번에 의미를 넘어서려는 시선의 강박적 충동이 앞선다.
이를테면 〈얇은 찬양〉(2017)의 경우, 화면 중앙에서 웅크리고 잠든 한 마리의 돼지를 중심으로 검은 천을 뒤집어 쓴 10명의
여인들-근거 없이 나는 이 10개의 존재를
10명의 여인들로 인식했다-, 밑동 가까이 잘려나간-하지만
상대적으로 결코 작거나 하찮아 보이지 않는- 생기 없는 나무들, 갑자기
눈에 들어온 의자와 그 밑에서 부둥켜 안고 옆으로 누워있는 두 사람, 그리고 돌,
끈, 그물이 서로 연쇄하며 하나의 장면을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형태의 배치가 제시하는, 즉 형태만큼이나 선명한 1인칭의 서사를
담아낸 목소리는 화면에서 도무지 감지할 수 없다. 오히려 정교해 보이는 이 형태들의 배치는, 텅 빈 익명의 공간에서 “각각의 것들”이
어느 순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전환되어 내면으로 흩어져 사라질 것을 내심 기다리는 존재의 사건을 연상시키며 매우 불확실한 것들의 표상이 된다.
한편 〈저지대〉(2017)를 보면, 이진주의 그림에서 종종 봐왔던 입방체 형태의 구조가 그림 전체의 틀로 확대되어 유독 강조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공간의 단면을 드러내고 감춰진 구조를 벗겨내려는 그녀의 시도는, 현실의
구체적인 시공이 아니라 여전히 익명의 추상적인 공간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존재의 불완전한 흔적을 찾는데 연루돼 있다. 이 입방체의 환영은 마치 현실로 갑자기 소환되는 억압된 기억의 파편들처럼, 본래의
맥락으로부터 잘려나가 낯선 시공간에 문득 문득 재등장하는 삶의 불연속적이고 불확실한 서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작가가 그려낸 경험의 잔상들은, 끊임없이 그 내면의 불확실한 공간 안에 흡수돼 스스로 구축해온 서사를 거듭
유예시킨다. 예컨대, 〈저지대〉에서 익명의 신체로 반복해서 등장하는
한 인물의 행위는, 〈보이지 않는 것〉에서 한 번 말했던 것처럼 보는 것을 포기 당한 채 사라져가는 존재를
망각의 차원에서 직접 대면해야 하는 주체의 현전을 환기시킨다. “망각은 각각의 말에 그려지는 당신의 현전”이라고 단언했던 블랑쇼의 말대로, 서사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서사를 유예하는
각각의 불완전한 대답들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현전을 체감할 수 있을 테다.
이로써 불완전하고 유예된 서사의 구조는, 전체에서
이탈한 각각의 형태들 사이로 보이지 않는 대상을 적극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인식의 통로를 내포하고 있다. 이진주의
〈유예〉(2016), 〈연〉(2016), 〈보는 것〉(2016), 〈견고한 것〉(2016) 등 일련의 작업에서 볼 수 있듯, 그녀는 익숙한 대상들을 현실의 기억으로부터 끈덕지게 갈라놓으려는 심산에서인지 그 형태의 보이지 않는 이면을 골똘히
들여다본다. 〈가짜 우물〉(2017)에서,
이제 그녀는 눈 앞의 장면들이 하나의 서사로 구축되는 것을 노골적으로 방해하려는 듯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구조 속에서 존재의 불확실성을
한껏 극대화시켜 놓았다. 익명의 시공간에서 익명의 존재들이 주고받는 불완전한 대화의 실체를 보는 듯하다.
사실 이진주는 오랫동안 “기억”에 대한 통찰을 시각적으로 다룰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 왔다. 이번 전시에서도
비슷한 맥락에서 “기억”에 관한 사유를 확장시켜 이어갔는데,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정교한 회화의 표면에는 블랑쇼가 말한 “망각”이라는 절대적 기다림과 유예의 과정 또한 역력하다. 그래서 그녀의 그림은 언뜻
인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 억압된 기억과 그것에 대한 자동기술적 단상들의 총체로 보여지기 쉽다. 하지만 이진주의
그림에서는, 오히려 “보는 것”에
있어서 존재의 불확실성에 대해 사유하는 주체의 인식 구조를 매우 정교하게 다루고 있음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