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주 작가의 작업을 처음 접했던 때는 2017년 아라리오 갤러리 <불분명한 대답> 전시였다. 이후 작가와 2018 강원비엔날레 <악의 사전> 전시를 함께 진행하게 되면서 작가의 작품 세계에 조금씩 더 가까워졌고, 작가의 삶과 작업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이진주 작가에 대한 비평문은 아주 예리하면서도 섬세한 문장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작용한다. 작가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날카롭고 아름다운 가위들처럼 말이다. 작가의 작업에는 특유의 아슬아슬한 균형 감각과, 미술 안과 밖의 경계를 살짝살짝 솜씨 좋게 비집고 들어오는 균열과 틈새들이 존재한다. 이런 경계들을 온전히 텍스트로 표현할 수 있을까?
 
 2017년 <불분명한 대답>의 전시 서문에서 비평가 안소연은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의 『기다림의 망각』 중 한 글귀를 언급한다. 책에 등장하는 남녀의 대화는 우리의 삶에서 ‘공동의 단일하고 명료한 기억’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사건과 기억이 개인의 망각의 영역으로 편입하면서 진리(진실)와 비밀은 사라지고 공동의 것에서 점점 멀어지게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은 진실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냉소주의를 옹호한다기보다는, 진실은 여러 개의 얼굴을 하고 있고, 다만 망각이라는 기억의 서랍 속으로 들어가 공통된 일괄성이 마모되어 버린다는 말로 들린다. 두 번째의 해석은 기억하는 주체의 자유 의지를 존중한다는 데 조금 차이가 있다. 이진주 작가가 그리는 것들은 예술가 자아가 목격한 일련의 사건과 상황을 시각적으로 재편한 ‘주관적 진경’ 이다. 린넨 천 위에 나열된 풍경들은 사실주의의 개연성에서 벗어나 있고, 대신 대상들의 정교하고 섬세한 디테일을 재현하는 특징을 보인다. 인물과 사물, 생명과 무생물이 형성하는 논리적인 연결고리는 불투명하다. 재봉틀 위에 놓인 생닭, 작업대 위에 도구들과 바비 인형, 화분과 화살, 가지런히 놓여진 잎사귀들과 박제된 곤충들. 정연심 비평가는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2011, 갤러리현대 16번지) 전시비평에서 ‘심리풍경화’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사각 死角〉, 2020, 린넨에 아크릴, 채색, 122 x 488cm, 122 x 488 cm, 122 x 244 cm, 122 x 220 cm

이번 전시의 제목이자 동명의 대표 작업 <사각>은 가시 범위에서 가려져 있지만 실상은 언제나 존재하고 있는 전경을 보여 준다. ‘사각’은 위험한 뉘앙스를 풍기는 단어이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종종 우리의 신념을 배반하곤 한다. 전작 <불분명한 대답>과 마찬가지로, <사각> 역시 일상의 모순과 미스터리를 작가의 시각 언어로 재현한 응답이다. 작업에 등장하는 인물(스타킹을 신은 여인), 화초, 잘려진 나뭇가지, 죽은 새, 손, 가위 등 재현의 대상은 작가를 둘러싼 상황과 주변 파편의 나열이자 작가의 무의식을 총체하는 무언의 풍경이다. 그림에는 유난히 손이 자주 등장한다. 새로 태어나는 생명을 받는 의사의 손, 도움을 건네는 손, 서로 맞잡은 손, 얼굴을 가리는 손... 손은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신체이자 표현 도구이다. 심리적 풍경에 등장하는 손의 비중은 작가의 강한 예술가적 자아를 드러낸다. 또한 손은 그림에서 중심 축 역할을 한다. 시선을 회피하고 싶은 이의 얼굴을 가려주는 것은 한 뼘의 손바닥이고, 여인과 소녀의 관계는 맞잡은 손으로 연결된다. 작업대 위에서 가위를 쥐고, 실 한 가닥으로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고 지지하는 것도 모두 손이다.(<그것의 중심>) 곤란한 손, 책임감 있는 손, 노동하는 손, 방해하는 손, 실수하는 손... 작가의 손 그림이 표현하는 풍부한 표정을 찾는 것도 작업 감상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다. 하지만 막상 이진주의 그림을 해석할 때, 개별적 상징보다는 ‘이야기’와 ‘스토리’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고 느낀다. 그녀의 그림은 마지막 퍼즐 조각을 맞추며 완성되어가는 규칙을 따르고 있지 않다. 이야기는 한 땀 한 땀 알 수 없는 미래로 나아간다.

<사각>은 A자형 구조의 대형작업이다. 말린 종이를 또르르 펼쳐내듯이, 하고 싶었지만 빈 공간이 부족해서 미처 다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불분명한 대화의 서사는 스스로를 확장한다. 지난 전시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가장 두드러진 차이이다. 작가의 서사는 편린의 나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삶과 죽음,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를 바라보는 예술가의 관점을 반영한다. 작가는 예술가로서 우리가 처한 상황에 끊임없이 ‘질문’을 해야 한다는 책임 의식을 짙게 가지고 있다. 작가의 그림은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인들이 함께 겪은 사회적 사고와 밀접하게 닿아 있다. 세월호 사건과 엄마 자아로서 발동하는 애도, 가족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삶과 죽음의 모호한 연결지점으로의 작가 탐구, 코로나 팬더믹으로 불거진 사회 공동체 의식과 종교의 방향 등이 모두 작업 안에 새겨 있다. 작가의 자아 - 작가를 둘러싼 주변의 풍경 - 그 풍경을 끊임없이 침투하는 세상의 모순. 작가의 서사체계는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어 분석할 수 있으며, 서로는 가냘프고 위태로운 균형감각으로 서로를 지탱하고 있다.

〈사각 死角〉, 2020, 린넨에 아크릴, 채색, 122 x 488cm, 122 x 488 cm, 122 x 244 cm, 122 x 220 cm

A형 구조는 가장 짧은 변을 축으로 낮과 밤/빛과 어둠 식의 반전을 형성한다. (a)면은 작가의 일상과 생기가 담겨 있다. 캔버스를 지탱하는 아이들의 손과 일상 노동을 수행하는 손, 화초들은 작가의 실제 삶과 많이 다르지 않다. 반면 바닥에 힘없이 떨어진 십자가와 기울어진 부처 도상은 이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에 대해 되묻는 작가의 의식이 묻어나기도 한다. (b)면은 코로나 팬더믹으로 수면 위에 드러난 사회 공동체 의식에 대한 작가의 응답이다. 그림을 가득 메우는 붉은 물은 늪과 같다. 등장인물들이 늪의 수면과 맞닿아 있거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거나, 몸을 담그고 있다. 흙탕물처럼 탁하고 핏기가 도는, 도대체 바닥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물은 마치 모두를 보이지 않는 외압으로 가두는 사회적인 현 상황을 암시하는 듯하고, 실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는 사회의 속성을 반영하는 것 같다. 이진주 작가는 전작에서부터 여러 형태의 물을 작업에 등장시켜 왔다. (b)면의 탁한 물은 작업의 테마 ‘사각’이 가장 효과적으로 형상화된 것이기도 하다. 고무나무의 수액에서 채취한 라텍스를 말리는 모습, 하얀 광목천과 붉은 물의 긴장감, 얇은 끈들로 유지되는 균형 감각 등이 (b)면을 구성하고 있다. <사각>에서 또 한 가지 특기할 것은 설치 구조의 독특한 조형성과 그에 담긴 작가의 의도이다.  A형 구조에서 a/b면은 서로의 면을 등진 채 예리한 꼭지점으로 수렴한다. 꼭지점에서 작업을 바라보면 두 이질적인 풍경이 교차하며 전지적 관찰자 시점을 선사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점에서는 왜곡된 방식으로 작가의 (a)/(b) 전경을 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a)/(b)면을 연결하고 지탱하지만 시점에서 가려진 (c)면은 완벽하게 숨겨진 사각의 영역에서 침묵하게 된다. 거대한 회화의 입체적 구조물을 지탱하는 가냘픈 원목 다리 역시 전지적 관찰시점과 사각의 반전 모멘트를 품고 있다.


〈사각 死角〉, 2020, 린넨에 아크릴, 채색, 122 x 488cm, 122 x 488 cm, 122 x 244 cm, 122 x 220 cm

이진주 작가의 미학은 한없이 연약한 면을 드러냄으로써 강함을 표현하는 방식을 취한다. 다양한 손의 표정을 포착하는 섬세함, 주변 풍경의 디테일을 담아내는 정교함, 조명 기법처럼 강약의 조절이 분명한 색 감각, 잘못 손대면 툭, 하고 끊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추의 균형, 미완의 분명함보다는 불분명한 완성을 추구하는 작가의 태도 등은 이진주 작가만의 가지고 있는 스타일이자, 예술가의 사회적인 자아와 작가 특유의 따뜻한 온기에서 비롯되는 창작물이다. 불가해한 세상이 던지는 물음에 맞서는 연약함은 조금씩 서사를 확장해 나가며 작업 세계를 끝없이 펼쳐놓는다. 세헤라자드의 천일야화처럼 말이다. 그 세계는 불분명하기에 더없이 솔직하고, 위태롭기에 스릴이 넘친다. 어느 예술가가 말했듯이, “상처받기 쉬운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가장 강한 것”이라는 말을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