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영, 〈세미프레임시리즈〉, 2021, 《Super-fine 가벼운 사진술》 전시 전경 (일민미술관, 2021) ©오가영

“사진 미디어를 이해하는 것은, 낡은 것이건 새로운 것이건 다른 모든 미디어와의 관련을 포착하지 않는 한 전혀 불가능하다.”[1] 복잡한 미디어(media) 세계의 구조를 정리하며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이 지나가듯 뱉은 사진에 관한 이 규정은 (다른 맥락이지만) 오늘날 예술 매체(mediums)와 관련해서도 중요한 실마리를 던져준다.[2] 최초의 기술 영상으로서 사진은 객관적 사실의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회화와 차별화되며 고유한 위치를 점하였고, 영화와 비디오아트라는 ‘무빙이미지’로의 확장을 가능케 하였다. 그러나 사진은 비교적 짧은 시기, 협소한 범위에서 그 자체 매체의 본성을 탐구하는 모더니즘 외에는 대체로 다른 여러 예술 매체들과의 관련성 아래 논의되거나 기록 또는 자료로서의 가치, 대중문화 내에서의 보편적 활용에 논의가 편중되는 경향이 강했다. 한편, 이러한 사진의 ‘중간적(middle)’[3] 위치는 이미지 세계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이동하면서 또 다른 국면을 맞았다.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한 이미지의 내재적 변용 가능성으로 인해 사진이 가진 ‘시각적 진실’에 대한 보장이 무너졌고 휴대폰과 인터넷에 의해 누구나 손쉽게 사진을 찍고 공유할 수 있게 되면서 범람하는 이미지들 가운데 예술 매체로서의 위치를 확보하는 것 역시 쉽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사진 이후의 사진’을 논해야 할 때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사진은 본래 매체가 지니는 중간적 속성, 그리고 디지털 이미지로의 변환으로 인해 동시대미술과 관련된 이른바 ‘포스트’ 논의에서 고유한 위치에 놓인다. 확실하고 투명하고 단일한 것을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하여 사진은 ‘픽쳐’ 개념과 함께 중요한 예술 매체가 되었다.[4] 이후 디지털 기술에 의한 뉴미디어 아트의 등장으로 동시대미술은 ‘포스트-미디엄’과 ‘포스트-미디어’로 논의가 분화되었다. 그러나 사진은 그 중간적 속성 때문에 관점에 따라 양쪽 모두에 속하거나 둘 다를 벗어나는 결과를 맞았다.[5] 비디오 이후 무빙이미지를 가능케 한 예술 매체로서는 포스트-미디엄에, 문자 시대에서 벗어난 기술 영상의 시작점으로서는 포스트-미디어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진에 관한 보다 효과적인 논의를 위해 범위를 좁힐 필요가 있다. 1990년대 초 윌리엄 J. 미첼(William J. Mitchell)은 아날로그 사진과 디지털 이미지의 물리적 차이가 근본적이며 그것이 곧 문화적으로도 다른 결과를 가져올 것임을 주장하며 ‘포스트-포토그래피’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6] 미첼이 포스트-포토그래피로서 강조한 전유, 변형, 재가공, 재조합 등에 의해 컴퓨터로 만들어진 디지털 이미지의 특징은 “분열과 불확실성, 그리고 이질적인 것에 특권을 부여하고 완성된 예술 객체보다 과정이나 수행을 강조하는 매체”로서의 속성이다.[7] 이는 어렵지 않게 포스트모더니즘과 연결된다. 디지털 매체의 등장으로 인한 예술의 변화를 다룬 매체미학자 노르베르트 볼츠(Norbert Bolz) 역시 디지털 이미지에서 적극적으로 사용되는 방법론이 곧 이질적인 것과 유희하고 동일성이 분열된 포스트모던의 특징과 연결되며 즉 “우연의 세계이자 많은 가능한 세계들 중 하나”임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결국 예술이 그러한 예기치 못한 비개연적인 카오스로부터 탄생한다고 보았다.[8]

그런 한편 2000년대 후반 등장한 포스트-인터넷[9] 개념은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의 측면에서 중요한 논점을 제공한다. 그것은 인터넷을 단순한 기술로 바라보기보다 문화 전반에 미치는 영향으로 주목하기를 제안하고 이미지가 매체 자체에 얽매이지 않은 채 동시대 디지털 시각문화 전반에서 보다 자유로운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특히 포스트-인터넷은 사진 매체와 관련해 인터넷을 통해 이미지가 생산되고 교환되는 가운데 가치가 발생하는 이미지의 ‘순환’ 개념을 강조한다. 이미지가 업로드 되고 원하는 사람 누구나 언제든 해당 이미지에 접근해 그것을 저장하고 변용하여 다시 공유하는 순환의 속도 및 범위가 확대되는 현상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발터 벤야민이 그리도 바랐던 이미지의 ‘민주적 가치’의 보다 나은 실현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포스트-인터넷아트의 핵심은 공유의 차원을 온라인 밖의 세계로까지 확대해 이미지가 실제로 어떻게 제시되는가를 고민하는 것에 있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 시각문화가 전통적인 매체와 어떤 관련을 맺으며 기존의 예술 영역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된다.

《Super-fine: 가벼운 사진술》은 이러한 ‘포스트 담론’의 맥락에서 오늘날 사진의 확대된 영역을 논할 필요성을 제시한다. 별 다른 관련성 없어 보이는 9명(팀)의 작품으로 구성된 이 전시는 동시대미술에서 사진이 할 수 있는 여러 양상의 예술적 시도를 제시하고 사진 이후의 사진을 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작품에 대한 구체적 설명과 함께 그 특징을 몇 가지 논점으로 압축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가벼운 사진술’이라는 부제대로 실제 사진이 가벼워졌다. 거대한 크기와 육중한 무게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대형사진의 압박에서 벗어나 오늘날 미술 전시장 안에서 사진은 각자의 필요에 따라 다양한 보여주기 방식을 선택하게 되었다. 디지털 기술은 카메라와 프린트 양면에서 1990년대 유형학을 비롯한 대형사진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일상에서 이미지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변형하며 인터넷을 통해 순환시킴으로써 이미지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워지도록 만들었다. 특히 그러한 디지털 시대 시각문화를 공유하는 포스트-인터넷 세대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오가영은 일상에서 숨을 쉬듯 채집한 무수히 많은 디지털 이미지의 파편들을 포토샵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재조합하고, 그렇게 만든 새로운 이미지를 종이에 프린트한 뒤 다른 여러 재료를 동원해 재가공하여 실제 공간 안에서 제시한다. 3차원 공간을 2차원 평면으로 전환하는 것이 사진이라면 작가는 그것을 다시 3차원 공간으로 어떻게 끌어낼지 고민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사진의 표면을 보호하는 부차적 재료인 유리를 프린트와 결합하고 경첩과 바퀴를 이용해 공간을 가로지르도록 설치했다. 포토샵에서 이미 상당한 변형을 거친 이미지의 프린트를 오려내어 유리에 붙이거나 바닥으로 흘러내리도록 했고 프린트와 겹친 유리 위에 또 다른 형상을 그리거나 마스킹 테이프를 더했다. <세미 프레임 Semi-frame>이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때 유리는 더 이상 사진을 보호하는 액자의 일부분이 아니라 프린트와 하나 되어 그것들을 지탱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매체의 일부분으로 작동한다. 


디지털 이미지는 우리에게 또 다른 세계를 가져다준다. 더 이상 그것은 편리하고 놀라운 신기술 자체가 아니며 예술을 포함한 문화 전반에 스며들어 우리의 삶과 하나 되어 작동한다. 특히 디지털 시대 예술 영역에서는 더 이상 조작이 특별하거나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조작의 다른 말은 구성이며 자신의 생각과 개념을 효과적으로 제시할 수 있도록 돕는 형식적 방법인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사진을 포함한 시각예술 작가들에게 선택과 표현의 자유를 부여한다. 포스트-포토그래피 시대에는 시각적 진실의 의미가 변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포스트’ 담론은 그 접두사가 붙은 원 단어를 다시 고찰하게 하고 그로 인해 더 많은 것이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포스트-포토그래피에 관한 논의는 사진을 더 잘 이해하게 하고 사진의 범위와 역량을 더욱 확장시킬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진 그 자체가 지닌 중간적 속성으로 인해 사진 ‘매체’에 대한 고찰은 결국 시각문화 내 보편적 ‘미디어’에 대한 논의로 이어질 수 있다. 사진 이후의 사진에 대한 논의가 보다 넓어지고 깊어져야 할 때가 왔다.

 
[1] 마셜 매클루언, 『미디어의 이해: 인간의 확장』(1964), 박정규 역, 커뮤니케이션북스, 1997, 231쪽.
[2] 원래 ‘미디어(media)’는 도구나 수단을 의미하는 영어 ‘미디엄(medium)’의 복수 형태로서 일반적으로 대중 매체와 같은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지칭한다. 뉴미디어 등장 이후 예술 영역에서는 이와 구분하기 위해 예술의 재료 및 장르의 의미에서 복수 형태 ‘미디엄(mediums)’을 사용한다. 상용화된 한국어는 ‘매체’이기에 이 글에서는 미디엄을 예술 매체와 병행하여 사용한다.
[3] 여기서 ‘중간’의 의미는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중간예술(Un art moyen)’을 염두에 둔 것이다. 부르디외는 사진을 고급예술과 대중문화 사이에 위치한 완전히 공인되지 않은 예술이라는 의미에서 중간예술이라고 보았다.
[4]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 더글라스 크림프(Douglas Crimp)가 기획한 전시 《픽쳐스(Pictures)》(1977) 이후 사진, 비디오, 회화, 판화, 드로잉 등 2차원 표면의 이미지를 ‘픽쳐’로 통칭하면서 사진은 동시대 예술 매체 중 하나로 적극 논의되었다.
[5] 포스트-미디엄 담론은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의 『북해로의 여행: 포스트-미디엄 조건 시대의 예술(A Voyage on the North Sea: Art in the Age of the Post-Medium Condition)』(Thames&Hudson, 2000)을 비롯해 미국 미술이론가들을 중심으로 설치 위주의 현대미술 경향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매체 특정성에 대한 회복을 골자로 전개되었다. 반면 포스트-미디어 담론은 이러한 현대미술의 논의에 대한 반감과 함께 디지털 미디어의 보편적 매체성에 주목하는 피터 바이벨(Peter Weibel)과 레브 마노비치(Lev Manovich) 등의 뉴미디어 이론가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6] William J. Mitchell, The Reconfigured Eye: Visual Truth in the Post-Photographic era, Cambridge: MIT Press, 1992.
[7] Ibid., pp. 7-8.
[8] 노르베르트 볼츠, 『컨트롤된 카오스: 휴머니즘에서 뉴미디어의 세계로』(1995), 윤종석 역, 문학과지성사, 2000, 358-365쪽.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