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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 수집가 /글. 김태휘
 
 
현남 작가는 2020년에 떠난 일본 여행에서 평소에 자신이 좋아했던 라이트노벨 원작의 애니메이션 『역시 내 청춘 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이하 역내청)의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성지순례는 종교적인 장소를 방문하는 여행의 한 종류를 의미하는 단어였으나, 최근에는 실제 장소 기반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곳을 찾아다니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작가는 이때의 기록을 바탕으로 작품을 제작하였고 전시를 꾸렸습니다. 역내청과 전시 작품의 연관성은 원작의 동인(同人)처럼 종속적인 관계라기보다는 작가의 창작에 작용한 동인(動因) 정도로 보는 쪽이 적절합니다. 애니메이션 스크린샷과 사진으로 엮어낸 풍경 이미지, 성지순례의 경로를 본떠 만들어진 조각, 유쾌하지 않은 사운드 작업으로 구성된 이 전시는 역내청이라는 콘텐츠를 재현하는 것보다는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가 끼친 영향에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때문에 당신이 역내청을 감상한 적이 없거나, 작품의 무대가 되는 지바현(千葉県)에 다녀오지 않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전시를 아우르는 소재는 성지순례입니다. 전시공간 가장 안쪽에는 크고 작은 액자에 끼워진 이미지들이 벽을 뒤덮고 있는데, 웹 커뮤니티에 게시된 여느 성지순례 후기처럼 원작의 스크린샷과 현장을 방문한 순례자가 촬영한 사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일반적인 성지순례기와 다른 점을 꼽자면 작가는 원작의 콘텐츠보다 성지순례라는 현상에 더 관심을 가집니다. 이를테면 지바현 내의 철도역사, 공원, 문화센터, 학교와 같은 공공시설부터 편의점, 레스토랑, 오피스텔, 백화점까지 다양한 공간들은 거주민에게는 모두 일상적인 도시 공간이면서, 역내청의 순례자에게는 성지로 읽힙니다. 나열된 이미지 중에는 신사(神社)와 같은 종교시설도 찾을 수 있는데, 작가와 같이 일본이 아닌 나라에서 방문하는 순례자에게 이곳은 신도(神道)에 대한 신실함보다 애니메이션이 남긴 흔적에 가까워지려는 의도가 앞설 것입니다. 전시를 준비하며 오간 대화에서 작가는 성지순례의 경험을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사소한 장소마저도 소비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점에서 흥미롭게 여겼고, 이번 전시를 통해 그 풍경 뒤편에서 그것을 조직하는 어떤 추상적인 힘에 대해 다루려 합니다. 저는 제 스스로의 언어로 그 내용을 설명해내기에는 역부족이어서, 발터 벤야민의 시각을 빌려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애니메이션과 성지순례 현상을 벤야민을 통해 풀어낸다는 소리를 들으면 의구심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닐 텐데요, 짧게나마 내려놓을 수 있도록 말씀을 드리고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진행하겠습니다. 우선, 과연 애니메이션을 벤야민이 논하는 ‘예술작품’에 대입시킬 수 있을지 우려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매체에 입각하여 자신의 미학을 전개했기 때문에, 예술의 범주로 분석 대상을 가려내지 않았습니다.1) 그의 관심은 매체와 그것을 가능케 하는 기술이 어떻게 감각적 인식을 바꿀 수 있는가에 더 쏠립니다.2) 두 번째 의구심은 신학적인 접근을 신조어에 취하는 타당성일 것입니다. 벤야민은 신학적인 개념들을 자본주의나 정치에 연결하고 이를 극복해야할 것으로 상정합니다. 그는 신학의 신화적, 가상적, 마법적, 신비주의적 요소가 인간을 과거의 관념에 사로잡히게 하고, 산업적, 정치적으로 이용되었을 때 나타나는 반계몽적 결과를 우려하였기 때문입니다.3) 저는 이러한 맥락에서 작품을 보고자 애썼습니다. 마지막 의문은 좌파로 통용되는 벤야민의 이론에서 역사적 유물론에 입각하지 않고 대중문화를 다루는 태도로 자문해봅니다. 벤야민은 문화에 대해서는 특수한 입장을 취합니다. 사적 유물론자가 문화사를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고 말하며, 문화가 그 자체로 물신적 특성을 지니기도 한다고 주장합니다.4)

다시 작품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액자 속 사진은 대부분 애니메이션 장면의 구도를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역내청에 등장한 건물의 외관부터 실내까지 하나하나 방문하면서 지바현의 풍경을 기록합니다. 여기에는 성지를 촬영하면서 거리의 행인이나 공실로 남은 건물처럼 도시의 일상적인 흔적도 나타납니다. 현남 작가는 거의 모든 스크린샷에서 엑스트라를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을 지워내었는데, 이 덕분에 감상자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소재에 집중하기보다 작가가 포착한 사진과 스크린샷, 그리고 그것들의 배치를 들여다보게 됩니다. 작품 속 성지순례를 통해 애니메이션의 장면을 재현하려던 사진은 지바현의 일상을 재현하기도 하고, 애니메이션의 원화 제작 방식을 일부 들춰내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역내청과 같이, 실제 장소에 기반한 애니메이션 원화의 배경 표현은 현장 촬영을 통해 재생산되는 방식을 거칩니다. 반대로 작가의 성지순례는 스크린샷에서 출발하여 현장 촬영을 했다는 점에서 마치 그 과정을 역추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이 작업을 통해서 작가는 물신주의 숭배를 취하면서도 일정 부분 그것을 폭로하는 양가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공교롭게도 이는 벤야민이 말하는 수집가 면모와 맞닿아 있습니다.

 
수집가는 사물을 미화하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는다. 그에게는 사물을 소유함으로써 사물에서 상품적 성격을 벗겨낸다는 시시포스적 과제가 주어진다. 그러나 그는 사물에 대해 사용가치 대신에 애호가적 가치만을 부여할 뿐이다. 수집가는 먼 세계 또는 지나간 세계만 꿈꾸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보다 더 나은 세계를 꿈꾸는데, 이 더 나은 세계에서 사람들은 일상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하지만 사물들은 유용해야 한다는 의무에서 해방되어 있다.5)
 

작가의 2020년 개인전 《축경론》에서도 이러한 수집가의 면모가 나타납니다. 수석에서 돌에 축약된 풍경을 구성한다는 축경 개념에서 착안하여 작가는 작년의 개인전에서 심미화 된 풍경에 온전히 순응하기보다, 여전히 존속하고 있는 조각의 오브제 개념을 확장할 수 있는 근거로 대입하였습니다. 이번 전시에서의 〈축경〉도 작년의 개인전처럼 조각과 수석의 친연성의 맥락을 유지합니다. 다만 함께 출품된 평면 이미지처럼 조각은 두 개의 쌍으로 배치된다는 점에서 예년과 구분됩니다. 좌대에서 우측에 놓인 첫 번째 조각은 성지순례 경로를 따라 조각의 바닥 모양을 결정하고, 각 장소에서 느꼈던 주관적인 감상과 중요도를 높이와 형태로 반영하여 캐스팅해낸 것입니다. 두 번째 조각은 첫 번째로 생산된 조각을 재참조하여 점토로 빚어 올리고 채색해낸 결과물입니다. 이 두 개의 조각은 앞서 역추적했던 애니메이션 원화의 배경을 제작 방식을 원본과 복제의 순서로 다시 뒤바꿔 제시됩니다. 이를 통해 작가는 풍경이라는 상징체계를 복제하여 보여주고 그 허울을 지적합니다.

마지막으로, 전시 감상 중에 들리는 사운드 〈dialogue〉입니다. 이 작품은 역내청 애니메이션 1기에서 도입부마다 등장하는 곡 〈monologue〉를 작가가 재구성한 결과물입니다. 원곡은 가볍고 경쾌한 반면, 작가의 작업은 무겁고 느립니다. 작가는 이 곡의 일부를 발췌하여 두 개의 층으로 중첩하고, 각각의 층을 다른 길이로 연장하여 반복되는 불협화음을 감상자가 듣도록 만들었습니다. 서로의 오차는 지속적으로 쌓여, 수십 바퀴를 돌아 맞아떨어집니다. 각각의 층이 같은 길이로 연장되었다면, 완전히 일치하거나 평행하듯 영원히 오차는 극복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전시는 합치와 오차가 빚어내는 관계부터 서브컬처 산업과 성지순례에 대한 고찰까지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말하고자 합니다. 앞에서 기술한 평면과 입체 작업처럼 사운드 역시 두 개의 항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다만 작가는 그것을 대화로 여기고. 일치하고 어긋나기를 반복하는 이 ‘잘못된’ 관계 속에서 알아차려야 할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1) 심혜련, 『아우라의 진화』, 이학사(2017), 52p
2) “일찍이 사람들은 사진이 예술이냐는 물음에 많은 통찰력을 쓸데없이 쏟아 부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이에 선행되어야 할 물음, 즉 사진의 발명으로 인해 예술의 성격 전체가 바뀐 것이 아닐까 하는 물음은 제기하지 않았다. 영화이론가들도 덩달아 이들과 비슷한 성급한 물음을 제기하였다.”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제3판)」, 『발터 벤야민 선집2』, 도서출판 길(2007), 119p
3) 윤미애, 「정치와 신학 사이에서 본 벤야민의 매체 이론」, 『카프카연구19』, 한국카프카협회(2008), 74p
4)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수집가이자 역사가 에두아르트 푹스」, 『발터 벤야민 선집5』. 도서출판 길(2008), 276p
5)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19세기의 수도 파리(1935)」, 『발터 벤야민 선집5』. 도서출판 길(2008), 201-202p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