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N》에서 개별 작품은 전시공간 내외부를 적절히 인식하며 배치된다. 계획과
선언이 공존하고, 만화적 상상과 추상성의 외피를 입은 가벼운 물질의 설치가 자리한다. 뮤지엄헤드 앞으로 가자. 작가의 핑크빛 깃발은 건물의 외부에 걸려
있다. 앞마당의 설치물들은 제주도의 ‘돌 박물관’이나 다른 나라의 민속박물관 앞마당처럼 연출되었다. 두꺼운 종이와
얇은 합판, 오랜 시간을 버틴 것처럼 보이는 흔적 취향과 인스턴트 정신으로 무장한 휘발의 감각이 공존한다. 이러한 그의 작업들이 전시 공간 앞면을 차지한다. 공간 뒤로 가보자. 위장이라 하지만 어느 정도는 근래의 폭우를 피할 수 있을 듯, 안전해
보이기마저 하는데. 그것은 바로 해외 배송된 포대가 쌓인 〈Dead
end〉(2022)이다. 이 작업은 육중한 배경화면
그 자체다. 배경화면 역할을 하기에 비대한 것들. 그러나
인프라스트럭처인 고속도로나 인터넷 통신망과 같이 기본이 되어버린 것들이다. 포대 자루는 전쟁이
일어나는 2022년 현실의 실제 리얼리티이자 ‘특정한 정보값’을 망실한 배경막이다. 무대 연출로서는 ‘투 머치 과잉’인 2018년의
평창 비엔날레에 등장했던 조류들을 생각나게 한다. 그래서 묻게 되는 질문은 ‘여기 어디지?’ ‘재난과 나의 거리는?’ 등등이다. 총체적으로는, 배경화면
치고는 너무 육중한 무엇이다. 부조화와 비균질성이 뒤로 숨기는커녕 포장의 미학이 된 시대에 정유진의
만들기 과정은 너무 많은 땀과 육체노동을 부른다.
정유진의 《RUN》을 영화가 상영되지 않는 극장 같다고 말하게 된 두 번째 이유가 있다. 바로
작가의 과거 작업과의 연관성 때문이다. 실제 그는 비디오 작업과 극장을 작업 재료로 다뤄왔다. 특히 필자에게는 상영 환경으로서의 ‘상영관’을 만든 것이 중요하다. 2019년 아트선재센터 아트홀에서 열린 그의
《해적판 미래 + 인간백해무익가든》 (2019, 아트선재센터
아트홀)를 떠올리자. 풀어헤친 머리카락처럼 관리 불가능해
보였던 녹색 나무들이 가득했던 전시장을 기억한다. 영화 〈해적판 미래〉가 상영되는 48분의 시간 동안 영화는 ‘단채널 비디오’가 아니었다. 영화 바깥으로 나온 폭죽 소리, 내가 찍은 스마트폰 화면이 흔들린 건지 당시 작은 지진이 일어난 건지 헷갈릴 만큼 정유진이 밀어붙여서 만든 ‘못 보던 공간’이 있었다. 관객들은
설치된 작업들 사이를 헤집고 걸어 다닐 수 있었다. 극장 관객석의 엄중한 존치 속에서 그의 부호 ‘+’는 중요한 단서다.
이번 전시 제목에는
느낌표는 없다. 그러나 전시를 보고 나온 후 머릿속에서부터 나는 깃발을 하나의 느낌표(!)로 느꼈던 듯하다. 아니면 물음표였을까? 한여름 땀방울 속에서 이리저리 이동하고, 동시대 문제 지역을 찾아다닌
정유진의 결과물은 미술인 동시에 탐사 보고서처럼 보인다. 미술인척 하는 외피를 둘러싼, 현실의 잔해들이다. 무엇을 믿어야 할까? +가 설치 〈인간백해무익가든〉과 영화 〈해적판 미래〉의 단순한 더하기가 아니었던 것처럼 정유진의 ‘런(Run)’은 관객을 어디로 어떻게 부르는 것일까? 아트선재센터 아트홀 극장의 관객석을 침투해버린 정유진의 겁 없는 설치는 영화 관람을 산만하게 방해했으며, 관객의 시각을 교란했다. 이번 여름 전시장 천정에 있던 작업 〈I•SMILE•U〉(2022)과
유사하다. 천정으로 향한 시선은 뮤지엄헤드의 통유리 창으로 반사된다.
《RUN》에서 정유진은 영화를 만드는 감각으로 공간의 동선을 조율한 듯하다. 즉 정유진에게 영화와 극장은 서로를 넘나들고 침투한다. 2019년
정유진의 극장은 영화의 온전한 집중을 위한 곳이 아니었다. 이처럼 전시장 뮤지엄헤드 또한 개별 작품의 ‘고정된 자리’를 찾는 곳이 아닌 탈주 자체를 물질화하는 시공간이
된다.
2.
정유진 맥북 95, 개인과 사회
정유진은 자신을 타자화하는
유머를 종종 구사한다. 재료를 산만하게 배치해두고 오므리며, 전시장에
와서 더 크게 펼친다. 바닥에 무엇인가 박고 관객들에게 앉아있을 수 있게 한다. 작가 정유진은 〈Funeral of Eugeene95’s MacBook
Pro〉에서 자신의 탄생 연도를 그가 사용하던 컴퓨터 뒤에 붙였다. 지역 특산물과 산업물에는
제작 연도가 붙지만 통상 일상에서는 사람 뒤에 출생 연도가 쉬 붙지는 않는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온라인과
기록, 생활 정보 유통 경제 모든 것이 맥북(노트북)과 핸드폰 안에 있다. 사고하고 훈련받고 답장하는 데 노트북 전원이
안 들어오면 그것은 ‘재앙’이다. 작가가 사용하던 맥북은 그의 전시장이자 극장, 테마파크이자 은행이며, 미래와 과거가 살아있는 인공적 삶 그 자체(였)다. 맥북의 파일을 다 날려버린 어느 날, 작가는 맥북의 사망을 기념하기 위한 작품을 만들었다. “좌식형 동선”의 시공 안에서 전시장에 배치된 작품은 테이블을 겸하는 의자였고
사물의 관이자, 사람의 임시 거쳐였다. 정유진이 만든 의자는 2인전의 다른 작가 코바야시 타이요(小林太陽)의 영상 작업을 보게 하는 관객석이기도 했다.
맥북의 사망은 하나의
이야기다. 정유진의 작업에서 매체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이야기 만들기의 충동이다. 평론가 윤원화, 콘노 유키 또한 글에서 이야기의 중요성을 논했다. 이제껏 정유진이 ‘재난’과
파국의 대상을 논하고 있음은 자주 이야기되어왔다. 그가 작업의 출발점이자 단서로 가져오는 현실의 존재들은
이야기의 어느 부분에서 파생된 경우가 많았다. 점쟁이 문어, 재난의
시공간과 주체들, 하물며 오랫동안 사용했던 자신의 맥북이 고장 난 순간까지 그것은 하나씩마다 다른 작업이
되었다. 점쟁이 문어의 모티브는 〈점쟁이 문어 파울의 부활〉(2019)로, 맥북의 재난은 2021년 시청각랩에서 열린 《해류병》에서의 새하얀
테이블과 유사-관으로 재탄생했다. 그가 관심 있는 이야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물질성과 결합하는가. 분명한 것은
그가 재난에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며 그것은
사회를 바라보는 95년 생 여성 작가의 시각을 제시한다는 점으로 논의의 초점이 옮겨가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2021년 초 《해류병》의 두 작가 정유진과 코바야시 타이요에게 열 개의 질문을 던졌다. ‘eugeene95’를 사용했던 작가에게 시각 이미지로 답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중 일 부분만 질문과 답을 가져와보자.
첫째, 예술가로서 자신들이 태어난 해에 대하여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떤 것이었습니까.
둘째, 파국이란 공통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개인에게 느껴지는
파국의 개별성이 더 중요합니까.
셋째, 정유진 작가의 경우 ‘노트북
이미지’를 ‘바탕화면용 이미지’로 만들었던 적 있습니다. 바탕화면에 바탕화면 이미지를 깐 것이죠. 늘 하려던 것들을 빨리하는 편인가요?
그러자 첫 질문에 정유진은
자신이 태어난 날인 1995년 3월 20일이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이 발생한 날이라는 것을 답으로 했다. 출처는
위키백과. “1995년 3월 20일 – 옴진리교 신자들이 도쿄 지하철에 사린 가스를 살포하다.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두 번째 질문, 파국이나 재난의 개인성과 공통성에 대해서는 다음의 이미지를 캡션과 함께 보여주며 답했다. 정유진이 작업을 시작한 2017년 경의 시점부터 2022년 현재까지 재난, 파국, 재앙은
가까운 타국 일본의 지진에서부터 정치적 파국, 2020년의 코비드(Covid)
19에 이르기까지 매 순간 ‘갱신’되었다. 정유진은 〈해적판 미래〉를 진행하며 그가 찾아갔던 인터뷰의 스크립트를 보여주며 개별성을 강조한 듯 답했다.